
25일 서울 고려대 안암병원에 줄잡아 100명의 고려대 의대 교수들이 모인 광경이 TV 방송 화면과 신문 사진을 통해 노출됐다. 이들은 ‘전공의 면허정지, 대한민국 의료정지’ 등의 푯말을 들고 힘차게 구호를 외쳤다. 그리곤 정부를 향해, 국민을 향해 보란 듯이 사직서를 제출했다. 이런 식으로 이날 서울대, 연대, 고대, 울산대 등 이날 약 20개 의대 교수들이 줄사퇴를 통해 실력행사를 연출했다.
앞서 지난 주말 정부와 여당은 유화적 제스처를 취하며 한발 물러서는 모습을 보였다.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개입하며 의료계와 대화 채널을 마련하겠다고 했고, 윤석열 대통령은 전공의 면허정지 처분을 유연하게 처리하라고 지시했다. 미복귀 전공의에 대한 행정처분을 불가역적이라고 했던 정부의 당초 방침을 뒤집으며 “전공의 처벌만은 안된다”는 의료계 요구에 전향적으로 반응한 것이다.
정부 유화적 태도에도 의료계 "2000명 증원 철회" 실력행사
그런데도 의료계는 끝장을 볼 태세다. 막 의료계 울타리에 들어선 20대 전공의를 비롯한 젊은 의사들과 개원의, 의대교수들까지 `의대 정원 확대 철회`를 한목소리로 외친다.
전국의대교수 비상대책위원회(비대위)와 전국의과대학 교수협의회(전의교협)는 정부가 의대 정원 2000명 증원 방안을 강행함으로써 파국을 초래했다며 증원 철회 혹은 축소 없이는 대화하지 않겠다고 했다.
이번 사태의 당사자인 전공의와 의대생들도 증원 철회만이 유일한 해답이라는 입장이다. 대한의사협회 회장 선거에서 1위로 결선 투표에 오른 임현택 후보는 증원 백지화는 물론 한 술 더 떠 '책임자 처벌' 얘기도 꺼냈다.
이게 무엇인가. 지금 의료계는 모든 것을 원점으로 되돌리자는 얘기 아닌가. 불가역적이라던 행정처분이 가역적으로 바뀌는 것을 보고 '2000명 증원 방안'도 가역적으로 되돌릴 수 있다고 내다본 걸까.
그렇다면 대화를 통해 타협점을 찾는 일은 험난해 보인다. 윤석열 정권은 매년 2000명씩, 5년간 1만명 증원하는 방안을 '마지노선'으로 삼고 의료계와 대척점에 섰다. 2000명 증원을 고수하며 대학별 배정까지 마친 터다. 그간 신문에 낸 ‘대한민국 의료체계 제대로 바꾸겠습니다’는 제목의 광고에는 ‘국민과의 약속’ 맨 윗자리에 ‘의대정원 2000명 증원’을 올렸다.
이걸 뒤집으라는 건 윤석열 정권에 두 손 들고 백기투항하라는 얘기다. 그간 벌어진 의료대란 책임을 오롯이 윤 정권이 지라는 것이다. '정부는 의사를 이길 수 없다'는 주장을 인정하라는 꼴이다. 그건 정치적으로 이 정권에 파국을 요구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얼핏 의사들이 이기는 싸움인 듯하지만, 의사들에 대한 불신이라는 큰 짐을 갖고 함께 추락할 위험이 더 크다.
2025학년도엔 2000명 증원...이후 증원 규모 재산정
정치권이나 의사가 이기는 형국으로 이 상황이 끝나선 안된다. 의·정 양측이 서로 조금씩 양보해 만날 수 있는 지점이 없지 않다. 예를 들어 일각에서 제시된 ‘첫 해 2000명 증원, 둘째 해부터 증원 규모 재조정’ 방안도 충분히 검토할 만하다. 정부의 정책 혼선을 최소화하기 위해, 이미 공표한 2000명 증원을 첫 해인 2025학년도에만 시행하되, 의정 대화체에서 도출한 새로운 증원 규모를 2026학년부터 도입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정부는 2000명 증원을, 의료계는 증원 규모 축소를 각각 관철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2000명 증원의 최대 당사자이자 피해자라고 할 수 있는 전공의와 의대생들을 제자리로 복귀시켜야 한다. 병원을 이탈한 전공의, 학교를 떠난 의대생들과 대화 자리부터 마련해야 한다. 젊은 의사들이 이번 사태에서 상처를 입었다면 어루만져주고, 다시 밝은 미래를 꿈꿀 수 있게 해야 한다. 전공의 처우 개선과 필수 의료 강화 등도 보다 더 구체적으로 내놔야 할 것이다.
현재 이들을 대화의 장으로 끌어낼 사람은 윤석열 대통령 뿐인 듯하다. 대통령이 전공의, 전임의 등 젊은 의사들과 대화 상대방으로 나서는 게 가장 좋은 해법이라는 게 의료계 의견이기도 하다.대통령이 나서면 목소리를 키울수록 대우받는 선례를 남길 수 있다는 비판도 있겠지만, 대통령이 전면에 나선 이슈이므로 결자해지(結者解之)의 각오로 문제를 풀어야 한다.
젊은 의사들도 국민인데, 지금까지 수많은 '민생토론회'를 펼쳐온 대통령이 이들을 만나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을까. 과거 2003년 3월 고(故) 노무현 대통령이 ‘검사와의 대화’를 시도한 것처럼 윤 대통령이 의료개혁 명분을 앞세워 ‘의사와의 대화’를 주도하는 모습을 기대한다.
대화의 장에서 당장 뚜렷한 해법이 모아지지 않을 수도 있다. 이 자리에서 전공의들의 호소를, 주장을, 제안을 듣는 것만으로도 대타협의 문은 열었다고 할 수 있다. 대통령이 진심을 담아 급변하는 의료환경에서 미래 의료의 주인공들에게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허심탄회하게 밝히고, 개혁에 동참하길 설득하는 모습, 그것을 국민은 원하지 않을까. 더 늦기 전, 지금이 그럴 타이밍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