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태의 종 이야기(22)
‘정복자’ 메흐메트 2세
서기 476년 서로마 제국이 고트족에게 멸망한 후에도 로마제국의 동부는 스스로를 로마라 생각하였고, ‘동로마제국’, ‘로마인(Romania)’이라 불렀다. ‘동로마 제국’은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324년 로마의 수도를 콘스탄티노플(비잔티움)로 옮기고 기독교를 승인한 이래, 천년 이상 명맥을 유지한 것이다. 동로마의 황제는 군주인 동시에 교회의 수장이었다. 이들은 교회를 부흥시키고 로마제국의 재건시킨다는 명분으로 정벌에 나섰고, 북아프리카, 시칠리아 섬과 이탈리아, 스페인 남부를 회복하기도 했다. 그러나 주변 지역을 군사적 문화적으로 압도하던 서로마와는 달리 동로마의 국제정치적 환경은 그리 녹녹하지 않았다. 사산조 페르시아, 이슬람 아랍제국, 불가르 왕국, 흑해 건너의 루스 세력 등 콘스탄티노플을 무너뜨리고자 하는 세력은 너무 많았다.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은 몇 차례 침략을 당했지만 완전히 정복된 것이 한 번 있었는데, 그것은 1204년 제4차 십자군 원정 때였다. 예루살렘을 회복하기위하여 출발한 십자군은 오히려 콘스탄티노플을 약탈하고 라틴 제국을 세웠고, 동로마 제국은 그리스의 작은 국가로 갈라졌다. 이들 그리스 국가들은 연합하여 라틴 제국에 대항했고, 1261년 마침내 니카이아 제국이 라틴인들로부터 콘스탄티노플을 재탈환했다.
그 이후 2세기 동안 세력이 대폭 약화된 동로마제국은 강력한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끊임없는 위협에 직면해야 했다. 특히, 오스만 1세와 오르한 1세에 의한 팽창이 이어지며 아나톨리아(지금의 터키) 서부의 영토를 빼앗긴 것은 매우 중대한 타격이었다. 제국의 중심영토였던 아나톨리아를 완전히 상실한 동로마는 오스만의 세력을 막을 수 있는 힘이 없었다. 15세기 제국의 영토는 콘스탄티노플, 펠로폰네소스 일부, 흑해연안의 트라페주스 제국으로 줄어들었다.
1453년 5월 29일 동로마 제국은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 제국에게 점령당하면서 종말을 맞이한다. 오스만 제국은 콘스탄티노플을 정복전쟁에서 승리하며 동지중해 및 발칸 반도로 진출할 중요한 거점을 확보하며, 이슬람의 맹주가 된 것이다.

실제로 1274년 리옹에서 통합시도가 있은 이후로 몇몇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는 로마 가톨릭을 받아들였으나, 콘스탄티노플에서 연일 반대 시위가 벌어지면서 국론은 분열되었다. 제4차 십자군 원정 시 콘스탄티노플 점령에서부터 촉발된 그리스인과 이탈리아인들 간의 오래된 민족감정으로 인하여 통합은 무산되고 말았다. 유럽도 동로마제국을 도울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백년전쟁으로 약해져있었고 이베리아 반도의 왕국들도 이슬람을 몰아내기 위한 레콩키스타의 막바지에 있었다. 북부 이탈리아의 몇 도시국가에서 군대를 보내긴 했지만, 그들의 원조는 오스만 제국의 전력에 비하여 너무나 미미한 정도였다.
1451년 다시 술탄의 지위에 등극한 메흐메트 2세는 재상 할릴 파샤의 반대를 물리치고 출병하며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키기로 결심하였다. 1453년 당시 동로마 제국의 군사는 대략 7,000명으로 그중 2,000명은 용병이었다. 콘스탄티노플은 약 20 km의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육지에 면한 5.5km의 테오도시우스 성벽, 금각(golden horn)만과 면해 있는 7km의 해안 성벽, 마르마라 해와 면한 7.5km의 성벽은 당시 최고로 굳건한 성벽이었다.

오스만 제국군은 1453년 4월 2일, 부활절 다음 날 도시 외곽에 진을 쳤다. 메흐메트 2세는 멀리 떨어진 주조 공장에서 만들어 둔 대포들을 끌어와서 공격을 시작했다. 이 대포들 중 큰 것은 90마리의 소와 400명의 병사가 240 km를 끌어왔다고 한다. 대포를 만든 우르반은 먼저 콘스탄티노플 황제를 찾아가서 이 기술을 제안했으나, 형편없는 조건을 제시하자 오스만 제국 술탄에 기술을 넘겼다고 한다.
그러나 몇 주에 걸친 엄청난 포격에도 성벽은 좀처럼 뚫리지 않았다. 대포의 조준이 부정확했고 한번 발사 후 재충전에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으므로, 동로마군이 그 동안 성벽을 보강하였기 때문이었다. 콘스탄티노플은 금각만 입구에 강력한 쇠사슬 저지물을 설치하여 배의 출입을 철저하게 봉쇄하고 있었다. 술탄은 만으로 진입하여 내부 바다를 방어하던 해군을 제압하고, 성벽을 바로 앞에서 공격하기 위하여 이를 우회하기로 한다. 그들은 금각만 북쪽면 해발 60 m의 갈라타 언덕에 기름칠한 통나무를 놓고 불과 이틀 만에 그 위로 함대를 굴려서 금각만으로 들여보냈다. 이로써 제노바의 공급선들이 섬멸되었으므로 콘스탄티노플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졌고, 적은 병력을 금각만과 성벽으로 분산하여 방어하여야만 했다.

5월 24일은 보름달이 뜨는 날이었으나, 그 날은 개기월식이 있었다. 달은 콘스탄티노플의 상징이기도 했는데, 사람들은 이를 도시가 패망할 징조라고 여겼다. 콘스탄티노플에는 첫 황제의 이름과 같은 사람의 다스리는 동안에 멸망한다는 전설도 퍼져나갔다. 당시의 황제는 콘스탄티누스 11세로서 제국의 초대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와 같은 이름이었다. 또한 며칠간 엄청난 천둥 번개가 퍼부었고 짙은 안개가 자욱했다. 이 모든 것이 바로 이 도시가 패망할 불길한 징조로 여겨져서 방어군의 사기가 엉망이었다.
5월 29일 술탄의 총공격이 시작되었다. 제1공격은 5만여 명의 비정규군 보조병 부대였다. 이 비정규군은 무장도 전투력도 형편없었지만 그래도 무지막지하게 밀고 들어와 방어군을 지치게 만들었다. 이 비정규군이 퇴각하자, 오스만 제국의 정규군인 아나톨리아 군단의 파상공세가 이어졌다. 도시 북서쪽의 약한 성벽에 집중된 이 공격으로 점차 도시의 방어선이 무너져갔고, 쉴 틈도 주지 않은 채 제3차 파상공격으로는 총으로 무장한 술탄의 정예부대인 예니체리의 공격이 이어졌다. 술탄은 일종의 폭력배 집단인 바시-바주크들을 앞에 내세웠고 그들이 전멸하자 예니체리들을 투입한 것이다.
예니체리들은 빗발치는 화살과 탄환 속에서도 질서정연하게 진군하였고 동료가 쓰러지면 뒤에 있던 병사가 바로 그 자리를 채웠다. 이때 동로마군의 제노바 용병대장 주스티니아니 장군이 큰 부상을 당해 후방으로 후송되었고, 제노바 용병들의 전열은 무너져버렸다. 결국 예니체리들이 물밀듯이 성벽을 치고 들어와, 성벽 탑에 오스만 제국의 깃발을 꽂는다. 일단 방어선이 무너지니 모두는 앞을 다투며 퇴각하였고 오스만군대는 성문을 열고 밀려들어왔다. 콘스탄티누스 11세는 황제의 상징인 자줏빛 망토를 벗어던지고 마지막 병사들을 이끌고 오스만 제국군으로 돌진했으나, 그와 함께 제국의 운명도 전설이 되었다.

또한 술탄은 군대의 출정을 반대하였던 오스만의 명재상 할릴 파샤를 동로마에서 뇌물을 받은 죄로 처형하게 된다. 백마를 타고 콘스탄티노플에 입성한 술탄 메흐메트 2세는 감격스러워하며, 아름다운 이 도시를 재건하여 오스만 제국의 새로운 수도 이스탄불로 선포하게 된다. 도시의 상징 ‘성 소피아 성당’도 파괴하지 않고 기독교 성화에 덧칠을 한 상태로 유지하며 ‘아야(터키어: 성스럽다는 뜻) 소피아’라는 이름의 모스크로 개조할 것으로 명한다.


동로마제국을 멸망시킨 오스만 투르크 제국은 먼 훗날 1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한 후 쇠락할 때까지 이슬람교를 수호하는 중동의 대국으로 유럽과 아시아를 호령한다.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당한 것은 서 유럽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천년 넘게 그리스-로마의 문화를 간직해온 동로마제국의 멸망으로 많은 그리스인들이 이 도시를 떠나 서유럽으로 망명했고 그들이 가져온 지식과 문서들, 고대 그리스-로마의 전통이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르네상스를 꽃피우는 원동력이 되었다. 역사학자들은 이 도시의 함락을 중세를 마감하고 르네상스 시대를 여는 중요한 사건으로 보고 있으며, 아울러 이 시점을 근대의 시작으로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