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은 아직 '노쇠'를 판단할 국가 기준이 없다.
질병관리청은 18일 오후 서울 중구 로얄호텔서울에서 '국가 노쇠 정의 마련 공청회'를 개최했다. 초고령사회 진입에 맞춰 어르신의 삶의 질을 높이고 노쇠 진입 시기를 늦추려면, 노쇠 예방·관리 정책의 근간이 될 '국가 표준 정의'부터 세워야 한다는 문제의식에서 마련된 행사다.
누가 모여 어떤 얘기를 나눴나
이날 공청회는 오진희 질병관리청 만성질환관리국장의 개회사와 원장원 대한노쇠·내재역량학회장의 축사로 시작했다.
주제 발표는 박기수 경상국립대 교수가 맡아 국가 노쇠 표준 정의 마련을 위한 주요 고려사항과 노쇠 단계별 평가 기준을 제시했다.
이어진 패널토의는 이석구 충남대 교수(대한예방의학회)가 좌장을 맡았다. 원장원 경희대 교수(대한노쇠·내재역량학회), 김정선 전남대 교수(한국노년학회), 유준일 인하대 교수(대한근감소증학회), 이경희 연세대 교수(한국지역사회간호학회), 고홍섭 서울대 교수(대한노년치의학회), 김유미 질병관리청 만성질환관리과장이 패널로 나서 의학·간호학·보건학·치의학 분야를 아우르는 다학제적 의견을 나눴다.
오진희 국장은 "초고령사회 진입에 맞춰 체계적인 노쇠 예방·관리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명확한 국가 표준 기준이 전제되어야 한다"라며 "오늘 공청회가 국가 노쇠 표준 정의 정립은 물론, 지역사회 중심의 건강 노화 분위기 조성에 대한 범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뜻깊은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이어 "질병관리청은 앞으로도 어르신들이 전국 어디서나 격차 없는 예방·관리 서비스를 받으며 건강한 노년을 오래 유지하실 수 있도록 근거 기반의 정책과 사업 기반 마련을 지속적으로 구축해 나가겠다"고 덧붙였다.
노쇠는 질병 아냐⋯'되돌릴 수 있는 상태'
의학계에 따르면 노쇠(frailty)는 단순한 노화나 특정 질병과 다르다. 근력, 균형감각, 인지 기능 등 신체 여러 기능이 함께 떨어지면서 작은 스트레스에도 쉽게 무너지는 상태를 말한다. 미리 발견해 운동·영양·사회활동을 복합적으로 관리하면 다시 회복할 수 있다는 게 핵심이다.
그런데 정작 '노쇠'를 무엇으로 판정할지는 나라 안에서도 기준이 제각각이다. 질병관리청은 이런 문제를 풀기 위해 2026년 지역사회건강조사에 '한국형 노쇠선별도구(K-FRAIL)'를 새로 넣어 전국 보건소 단위 노쇠 현황 조사를 마쳤다. K-FRAIL은 피로감·근력·보행 능력·만성질환·체중감소 등을 스스로 답해 노쇠 위험을 가려내는 국제 'FRAIL 척도'의 한국판이다. 아울러 지자체가 활용할 노쇠 예방사업 표준 매뉴얼과 건강노화 메시지도 함께 개발하고 있다.
일본은 25문항, 영국은 전자차트로 노쇠 가려내
노쇠를 판정하는 기준은 나라마다 다르다.
일본 후생노동성은 2006년 '기본 체크리스트'를 전국에 배포했다. 지금까지 1200만 명 이상이 이 체크리스트로 25개 문항, 7개 영역에 걸쳐 스스로를 점검했다. 이 가운데 일상생활·운동능력·우울 증상 등 3대 핵심영역이 전체 문항의 60%를 차지한다. 조기 발견과 조기 개입을 앞세운 결과 75세 이상 고령자의 요양 인정률은 32% 선을 유지하고 있다.
영국 국민보건서비스는 전자 취약성 지수(eFI)를 활용한다. 1차의료기관의 전자의무기록에 쌓인 임상 징후·질병·장애 등 36개 항목을 자동 분석해 65세 이상 환자 중 중등도·중증 취약군을 가려낸다. 이 가운데 위험도가 특히 높은 환자(약 3%)는 약물 검토와 낙상 위험 평가로 이어간다.
WHO, 점수 대신 '능력' 본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아예 '노쇠'라는 병명 대신 '내재적 능력(intrinsic capacity)'이라는 개념을 내세운다. 인지 기능, 이동성, 청력, 영양, 시력, 정서, 배뇨 기능 등 신체 여러 능력이 종합적으로 떨어지는 과정에 주목해, 점수 하나로 판정하기보다 개인별 맞춤 관리 계획을 세우는 방식을 권고한다.
학계에서도 접근법이 갈린다. 미국에서 나온 '프리드 표현형(Fried Phenotype)'은 체중감소·탈진감·근력저하·보행속도저하·신체활동감소 등 5개 항목 중 3개 이상 해당하면 노쇠로 본다. 반면 캐나다의 '로크우드 임상노쇠척도(Clinical Frailty Scale)'는 의료진의 임상 판단을 9단계로 나눠 평가한다.
두 방식 모두 국제적으로 널리 쓰이지만 서로 다른 잣대여서, 같은 사람도 어떤 척도를 적용하느냐에 따라 노쇠 여부가 달라질 수 있다는 한계도 꾸준히 제기된다. 한국이 여러 도구를 하나로 모아 '국가 표준 정의'부터 세우려는 이유이기도 하다.
내 노쇠 단계는 무슨 색깔일까
질병관리청은 이번 공청회 자료에 '건강 노화 신호등'도 함께 담았다. 일상생활을 스스로 하고 웬만한 건강 문제는 잘 회복되면 '녹색(건강 유지)'이다. 힘이 줄고 걸음이 느려지거나 쉽게 피곤해지면 '노란색(건강주의)', 작은 질병·낙상 속에 건강이 크게 나빠지고 회복이 더디면 '주황색(노쇠 집중관리)'이다. 일상생활에 도움이 많이 필요하면 '빨간색(기능저하·돌봄 필요)'으로, 이렇게 네 단계로 스스로 가늠해볼 수 있다.
지금 어떤 색이든 규칙적 운동, 균형 잡힌 식사, 사람들과의 교류, 정기 건강검진, 마음 건강 관리라는 5가지 습관을 지키면 색은 다시 좋아질 수 있다는 게 질병관리청의 설명이다.
구체적으로 걷기·수영 같은 유산소 운동을 주 3~5회, 스쿼트·아령 들기 같은 근력 운동을 주 2회 이상 하고, 단백질은 체중 1㎏당 1~1.2g 섭취를 권장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