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행하는 나라와 목적지에 따라 편리한 교통수단은 제각각이다.
산과 바다, 호수와 사막을 오가는 여행에서는 이동수단을 어떻게 선택하느냐가 여행의 편의는 물론 풍경을 즐기는 방식, 나아가 전체적인 만족도까지 좌우한다.
걸어야 갈 수 있는 곳을 제외하면 버스가 편한 곳이 있는가 하면, 페루 마추픽추처럼 베이스캠프 역할을 하는 아구아스 칼리엔테스(Aguas Calientes)까지 버스가 아니라 기차가 주요 교통수단인 곳도 있다.
버스가 있어도 정작 필요할 때 이용하기 어려운 곳도 많다. 배차 간격이 길거나 밤에는 운행이 끊기기 때문이다.
그런 곳 가운데 하나가 덴마크령 페로 제도(Faroe Islands)다.

공항은 하나, 수도까지 가려면 해저터널을 지나야 한다
페로 제도는 북대서양에 흩어져 있는 18개의 섬으로 이뤄진 군도다.
스코틀랜드 북쪽과 아이슬란드 사이, 노르웨이에서 서쪽으로 약 600㎞ 떨어져 있다.
전체 면적은 제주도의 4분의 3 정도지만 대부분 가파른 산과 절벽으로 이뤄져 실제 사람이 생활할 수 있는 공간은 많지 않다.
페로 제도는 독립국가가 아니라 덴마크 왕국에 속한 자치령이다.
외교와 국방 등 일부 분야는 덴마크가 담당하지만 자체 정부와 의회를 갖고 상당한 자치권을 행사한다.
주민들은 덴마크 시민권을 갖지만 페로어라는 고유 언어를 사용하며, 덴마크와 구별되는 독자적인 문화와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다.
9세기 이후 노르웨이에서 건너온 바이킹들이 정착하면서 사회의 틀이 만들어졌고, 이후 오랫동안 노르웨이와 덴마크의 지배를 받았다.
1814년 덴마크와 노르웨이가 분리된 뒤에는 덴마크 왕국에 남았다.
수도는 가장 큰 섬인 스트레이모이(Streymoy)의 토르스하운(Tórshavn)이다.
그런데 스트레이모이섬에는 공항이 없다.
페로 제도의 유일한 국제공항인 보아르 공항(Vágar Airport)은 스트레이모이섬 서쪽의 보아르섬에 있다. 토르스하운으로 가려면 해저터널을 지나야 한다.
공항에서 토르스하운으로 연결되는 300번 버스는 평일 기준 하루 7~9회 정도 운행하고 주말에는 횟수가 더 적다.
비행기 도착 시간과 버스 출발 시간이 맞지 않으면 공항에서 한두 시간, 길게는 그 이상 기다려야 하는 경우도 있다.
토르스하운에 도착한 뒤에도 문제는 남는다.
페로 제도의 여러 섬과 작은 마을을 돌아보려면 다시 버스 시간을 맞춰야 한다.
배차 간격과 운행시간을 생각하면 원하는 곳을 자유롭게 둘러보기에는 제약이 따른다.
렌터카를 선택한 이유다.

“P4-C로 가세요”…무인 렌터카가 전해준 사람 간의 신뢰
평판이 좋은 현지 렌터카 업체를 골랐다.
선결제를 마치고 출발을 앞두고 받은 메일에는 ‘P4-C’라는 숫자와 차 번호만 달랑 적혀 있었다. 공항 카운터 위치를 알려주는 코드인 줄 알았다.
그런데 막상 코펜하겐에서 보아르공항에 도착해 보니 아니었다.
‘P4-C’는 공항 주차장에 세워진 렌터카의 위치였다.
찾아가 보니 차 문이 잠기지 않은 채 있었고 글러브박스 안에 차키와 안내서가 들어 있었다.
직원은 어디에도 없었다.
말로만 듣던 무인 렌터카 시스템이었다.
차량을 찾아 직접 문을 열고 키를 꺼내 운전을 시작하면 됐다.
반납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원래 주차 공간에 차를 세워두고 키를 정해진 곳에 넣으면 끝이었다.
처음에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사람의 얼굴 한 번 보지 않고 차를 빌리고 반납하는 일이 낯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 시스템은 단순히 편리함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차를 믿고 맡기고, 빌린 사람도 약속한 대로 돌려놓는다는 신뢰가 전제돼야 가능한 방식이었다.

도로를 점령한 양떼…‘주인’에게 길을 내어주는 기다림
페로 제도에서 렌터카를 이용하지 않는 여행은 상당한 인내심을 필요로 한다.
섬과 마을을 연결하는 대중교통이 있기는 하지만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곳까지 이동하기는 쉽지 않다.
차를 빌렸다고 해서 운전이 편한 것만도 아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날씨가 바뀐다. 비가 내리다가 갑자기 해가 쨍하게 뜨는가 싶으면 다시 안개가 스멀스멀 도로를 점령한다. 강한 바람은 덤이다.
여름인 6~8월 평균 기온이 10~13°C인 만큼 연중 따뜻함이 그리운 곳이기도 하다.
날씨 변덕이 심한 도로를 달리다 보면 불쑥 양들이 아스팔트를 점령해 급정거를 해야 하는 상황이 심심치 않게 벌어진다.
사실 페로제도는 ‘양의 섬’으로 불린다.
인구가 5만4000여 명인데 양은 약 8만 마리. 사람보다 양이 많다.
도로 주변 초원에서 한가롭게 풀을 뜯던 양이 갑자기 도로로 내려오는 건 다반사다.
운전자에게는 예측하기 어렵지만 이곳에서는 양도 페로제도의 풍경을 이루는 당당한 ‘주민’인 셈이다.

터널에도 ‘기다리는 자리’가 있다…속도를 줄이고 배우는 양보
페로 제도 여행에서 또 하나 인상적인 것은 섬과 섬, 마을과 마을을 잇는 터널이다.
길고 어두운 터널이 산 아래로 뚫려 있는데, 일부는 차선 하나뿐인 1차선 터널이다.
이때 필요한 것이 터널 안에 마련된 대기 공간, 이른바 ‘레이 바이(Lay-by)’다.
맞은편에서 차량이 오면 적당한 지점의 대기 공간에 차를 세워 상대 차량이 지나가기를 기다린다.
우리에게 익숙한 도로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풍경이다.
신호에 따라 움직이는 대신, 운전자가 상황을 보고 서로 양보하는 게 일상화돼 있다.
페로제도의 도로는 빠르게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만을 위한 ‘통로’는 아닌 듯했다.
양이 도로를 가로지르면 기다리고, 좁은 터널에서 마주 오는 차를 만나면 양보한다.
여행자는 이곳에서 자연과 도로를 공유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양의 섬인 줄 알았더니…삶을 지탱해 온 진짜 주인은 바다였다
양이 사람보다 많다고 해서 페로제도의 주산업이 목축인 것은 아니다.
오랜 세월 페로제도 사람들의 삶을 지탱한 것은 바다였다.
섬에는 넓은 농경지가 없고 기후도 거칠어 전통적으로 양을 기르고 작은 규모의 농사를 지으면서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았다.
특히 대구와 청어, 고등어 등이 중요한 어업 자원이다. 오늘날에도 수산업은 페로 제도의 핵심 산업이다.
전체 수출에서 수산물이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높다. 차갑고 거센 북대서양 청정 해역에서 자란 페로산 연어는 세계적으로도 유명하다.
척박한 기후와 제한된 농경지는 역설적으로 독특한 식문화를 만들었다.
산비탈에서 야생 풀을 먹고 자란 양과 청정 바다에서 잡아 올린 해산물은 오랫동안 페로 사람들의 식탁을 지켜왔다.
자연환경이 곧 식재료가 되고, 바다가 곧 삶의 터전이 된 곳이다.

지붕 위에 정원을 얹고 사는 사람들
아름다운 풍광을 보면서 "엽서 같다"고 말하지만, 페로 제도만큼 고개를 돌릴 때마다 엽서 같은 장면이 펼쳐지는 곳도 드물다.
깎아지른 절벽과 푸른 초원, 작은 어촌 마을, 북대서양의 거친 바다가 독특한 풍경을 만든다.
북대서양 한가운데라는 지리적 고립은 역설적으로 이 섬에 독특한 자연환경을 남겼다.
집을 자세히 보면 또 하나의 특징이 눈에 들어온다.
지붕 위를 짙은 녹색의 잔디가 덮고 있다.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잔디 지붕(Turf Roof)이다.
잔디 지붕은 거센 바람과 추위를 견디기 위한 단열 효과가 있고, 자연과 어우러지는 페로 제도의 독특한 건축양식이기도 하다.
푸른 초원이 지붕으로 올라가면서 집은 주변 풍경과 자연스럽게 하나가 된다. 실내에서는 추위와 바람을 막아주고, 밖에서는 집 자체가 자연의 일부처럼 보인다.
첨단 기술로 만든 단열재가 아니어도 자연을 이용해 따뜻하고 편안한 주거 환경을 만들어 온 것이다.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방식이 곧 생활의 편안함으로 이어지는, 페로 제도식 ‘거주의 웰빙’이라고 할 만하다.
2007년에는 이 외딴 섬에 미국 전 대통령이 방문하면서 주민들이 들썩인 적도 있었다.
빌 클린턴이었다.
당시 클린턴이 머물렀던 곳 역시 잔디 지붕으로 뒤덮인 ‘호텔 페로야(Hotel Føroyar)’였다.
세계적인 정치 지도자가 거친 비와 바람으로 대변되는 자연 앞에서 한 명의 여행자로서 진정한 치유를 얻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자연을 밀어내기보다 자연을 집 안으로 끌어들여 살아가는 페로제도의 주거문화는 잘 산다는 것, 즉 웰빙이 반드시 더 많은 것을 갖는 데 있지는 않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죽은 007의 묘비가 실제로 있다고?
페로 제도에는 조금 엉뚱한 이야깃거리도 있다.
칼소이(Kalsoy)섬 북쪽 외딴 언덕에 세워진 007의 묘비다.
영화 ‘노 타임 투 다이(No Time to Die)’에서 장렬한 죽음을 맞이한 제임스 본드.
영화 속 가상 인물에게 실제 묘비가 있을 리 없지만, 페로 제도에는 정말 007의 묘비가 있다.
영화 촬영지이기도 했던 칼소이섬 북쪽 언덕에 작은 묘비가 다소곳이 자리 잡고 있다.
페로산 현무암으로 만들어진 묘비에는 ‘제임스 본드를 기억하며(1962~2021)’라는 문구와 영화 말미에 M이 낭독했던 구절이 새겨져 있다.
“인간의 본연의 기능은 존재하는 것(Exist)이 아니라 살아가는 것(Live)이다.”
이 문장은 미국 작가 잭 런던의 글에서 나온 것으로, 이언 플레밍의 소설 ‘두 번 산다(You Only Live Twice)’에서 제임스 본드의 부고에 인용됐다.
영화 ‘노 타임 투 다이’는 이 문장을 다시 가져와 본드의 마지막을 추모하는 장면에 사용했다.
영화 속 제임스 본드의 마지막을 장식한 이 문장이 묘비에 새겨지면서, 가상의 인물이 남긴 마지막 말은 현실의 여행자에게도 묘한 울림을 준다.
그 묘비가 있는 칼소이섬의 바람은 유독 차갑다.
하지만 그 바람이 뺨을 스칠 때 비로소 숨 쉬고 있음을 깨닫는다.
안개 속 도로를 달리고, 길을 점령한 양을 기다리고, 칠흑 같은 터널에서 맞은편 차량의 불빛을 기다리던 페로 여행의 장면들이 하나둘 스쳐 지나간다.
문명의 소음이 모두 꺼진 그 순간, 외딴 북대서양 한가운데서 문득 물음을 던져본다.
“당신은 지금 그저 견뎌내고 있는가, 아니면 온 감각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