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식적으로 약국에서 3개월치 약을 전부 정확하게 조제했는지 일일이 확인하는 사람이 어딨습니까. 그냥 믿고 먹는거죠. 저녁 당직 근무를 하던 간호사가 실수를 발견하지 않았더라면⋯ 정말 생각만 해도 끔찍해요.”
양기종(58) 씨는 자칫 악몽으로 남을 뻔한 지난 봄을 회상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어버이날을 닷새 앞둔 5월 3일, 84세의 어머니가 쇼크로 쓰러졌다. 4월 16일, 4월 17일, 5월 2일에 이어 올해만 네 번째 의식불명이었다.
양 씨는 “여러 병원을 전전해도 이유를 못 찾았다. 모든 수치가 정상이었다”며 “여든을 훌쩍 넘긴 노모가 죽음을 직감하고 삶을 정리하기 시작했을 정도”라고 회상했다.
비슷하게 생긴 두 약이 가져온 나비효과
실마리는 의외로 간단한 부분에서 풀렸다.
양 씨의 어머니가 인천광역시의 한 병원에 입원한 3일 저녁, 처방약을 확인하던 간호사가 양 씨를 호출했다.
“혹시 어머니께서 당뇨가 있으신가요?” “전혀요. 평생 당뇨 없이 살아온 분인데요.”
“이상하네요. 약봉투에 혈당을 낮추는 약이 포함돼 있어요.”
양 씨는 즉시 어머니의 약봉지를 뒤졌다. 혈당을 낮추는 메트포르민염산염과 글리벤클라미드 성분이 합쳐진 알약(글루리아드정)이 발견됐다. 두 성분은 약물 치료에도 혈당이 잘 떨어지지 않는 당뇨 환자에게 사용하는 2차 치료제다.
간호사의 보고를 받은 담당 의사는 “혈당강하제로 저혈당이 나타났을 가능성이 있다”며 “해당 환자의 당뇨 과거력이 없고, 글루리아드정과 모양이 비슷한 마그네슘 보충제가 처방전에 기재된 것으로 보아 약이 잘못 처방된 것으로 보인다”는 소견을 내놨다.

복용 기간이 36일 남은 시점에서 글루리아드정이 포함된 약봉지는 22개였다. 이 중 7개에는 글루리아드정이 두 알씩 들어가 있었고, 글루리아드정과 마그네슘 보충제 ‘마그네스정’이 한 알씩 들어간 봉지도 여럿이었다.
이들 모두 처방전대로라면 마그네스정만 두 알씩 들어있어야 했다.
약국도 실수 인정⋯손해보상 나서
글루리아드정의 제조사인 대웅제약은 약제설명서를 통해 해당 약품이 심한 유산산증(젖산산증)이나 저혈당증을 유발할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이에 식사 섭취가 부족한 환자나 영양불량자, 특히 고령자의 경우 글루리아드정을 신중히 투약해야 한다.
“36일치 약 중 22개(약 61%)에 혈당강하제가 포함되어 있었으니 단순 계산하면 열흘 중 엿새 정도는 어머니가 잘못된 약을 드신 셈이죠. 물론 정확한 복용량은 알 수가 없고요.”
양 씨는 해당 약을 제조한 서울의 한 대학병원 앞 대형 약국에 문제를 제기했다.
약국 대표 약사는 양 씨에게 전달한 수기 사과문을 통해 “약 조제의 모든 과정은 기계를 통해 자동화 되어 있는데, 모양과 색이 동일하고 각인만 다른 의약품이 혼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문제를 일으켰다고 판단된 직원은 해고 조치했다”며 “당사자와 가족이 겪으셨을 고통에 심심한 위로를 올린다”고 전했다.
약국 측은 재발방지를 위해 약 조제 검수 인원 두 명을 배치해 상호검수하도록 조치할 예정이며, 양 씨의 어머니가 겪은 피해에 대해서는 보험 처리 등을 통해 적절한 보상을 취할 것이라고 밝혔다.
다만 양 씨는 “잘못된 제조로 장기간에 걸쳐 직접적인 피해가 발생한 만큼, 대면 사과 없이 보상안부터 제시한 약국의 처사는 납득하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약업계 “의도적인 처방 변경과 단순 실수는 구별해야”
이같은 사고가 아주 드물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대한약사회 환자안전약물관리원 최신 통계에 따르면, 2025년 기준 약국에서 약을 짓는 과정에서 발생한 사고는 1803건으로 집계됐다.
이 중 45% 가량은 단순히 투약 횟수나 1회당 제공량을 혼동한 사고다. 양 씨 어머니의 경우처럼 약사가 아예 잘못된 의약품을 조제한 사례는 241건으로, 전체의 약 13% 수준이다.
약업계 종사자는 코메디닷컴에 “잘못된 조제로 실제 피해를 입은 양 씨의 어머니와 가족들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약국 측에서 적극적으로 실수를 인정했고 관련 직원에 대한 해고 조치와 재발 방지책까지 제시한 만큼 더 이상의 민사 책임을 묻기는 힘들다고 본다”고 말했다.
대한약사회의 기본 입장도 비슷하다.
지난 8월 전북 전주시에서 처방전의 투약일수를 잘못 확인한 약사가 약사법 위반 혐의로 수사를 받은 사건에 대해, 약사회는 “처방을 임의로 변경하거나 수정하려는 의도에 따른 것이 아니라 조제 과정에서 발생한 단순 착오라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는 의견서를 제출했다.
일반적으로 약사의 조제과실에 따른 형사 책임은 ‘약사법 제26조 제1항’ 위반 여부를 쟁점으로 본다. 해당 항목은 ‘약사 또는 한약사는 처방전을 발행한 의사·치과의사·한의사 또는 수의사의 동의 없이 처방을 변경하거나 수정해 조제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의도성이 없는 실수가 법률 위반에 해당하는지에 대해 해석이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이다. 법원 역시 기존 판례에서 “약사법 제26조 제1항은 고의범을 처벌하는 규정”이라며 “단순 조제착오는 고의적인 처방 변경으로 보기 어렵다”고 여러 차례 판단한 바 있다.
약사회의 의견서 역시 이같은 판례들을 근거로 제시한다. 민사상 책임은 충분한 손해배상을 통해 해결하되, 의도성이 없는 단순 실수에 대해서 형사 책임을 물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의료 전문 변호사 “의약품 점검 및 복약지도 책임 다 했다고 볼 수 있나”
그렇지만 법조계 전문가의 입장은 다르다. 충분히 업무상과실치상으로 고발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의료소송분야 전문가로 꼽히는 신현호 변호사(법률사무소 해울)는 코메디닷컴과의 인터뷰에서 “의도성이 없는 단순 조제실수라고 해서 형사 책임이 전혀 발생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업무상과실치상이란 업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주의의무를 소홀히 해 다른 사람에게 상해(신체적 피해)를 입혔을 때 성립하는 범죄다. 고의가 아니라 부주의나 태만으로 타인에게 피해를 줬을 때 발생하며, 주의의무 위반과 타인의 신체 손상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어야 한다.
신 변호사에 따르면 주의의무를 위반했는지를 판단하는 핵심 기준은 위험 예측성(결과예견가능성)과 위험 회피성(결과회피가능성)이다. 위험 예측성은 업무 수행 당시 ‘이러한 행위를 하면 타인이 다칠 수 있다’는 결과를 미리 예상할 수 있었는지를 따진다. 위험 회피성은 사고를 막기 위한 적절한 조치를 취했다면 결과를 피할 수 있었는지를 본다.
신 변호사는 “조제과정 중 일어난 실수는 약사의 업무 행위 중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면서도 “약사의 의무에는 조제한 약을 철저히 점검하고 환자에게 복약지도를 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는 만큼, 사고를 막기 위한 적절한 조치를 충분히 취했다고 볼 여지가 약하다”고 말했다.
양 씨는 “연간 2000건에 가까운 사고가 반복되고, 각각의 책임 소재를 찾는 와중에 소비자에 대한 고려는 어디 있는지 의문이 든다”며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그는 “한 간호사가 아니었다면 영문도 모른 채로 어머니를 잃을 뻔 했다. 의료소비자 입장에서 이같은 사고는 예측할 수도, 대응할 수도 없는 일이 아닌가”라며 “형사고발이나 민사상 합의를 떠나서, 의료소비자 권익 보호를 위해서라도 직접적인 행동에 나설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