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병든 조직에서 특정 유전자나 단백질이 유독 많이 나타났다고 가정해보자. 이것만으로는 질환과 관련해 생긴 특징인지, 사람마다 원래 다른 것인지 판단하기 힘들다. 비교할 ‘정상조직’이 있어야 차이의 의미가 뚜렷해진다.
하지만 심장이나 뇌처럼 살아 있는 사람에게서 연구 목적으로 정상조직을 얻기 어려운 장기가 적지 않다. 정부가 올해부터 사망 기증자의 정상 장기조직을 국가 바이오뱅크에 모으기로 한 이유다.
질병관리청 국립보건연구원은 ‘혁신형 바이오뱅크 컨소시엄 지원사업’에 사망 기증자 유래 정상조직 분야를 새로 추가한다고 14일 밝혔다. 우선 심장 등을 포함한 정상 장기조직과 관련 정보를 모아 질환 조직과 비교하는 연구에 제공할 계획이다.
병든 조직에서 찾은 변화, 정상조직과 견줘야 의미 보여
바이오뱅크는 혈액·조직·DNA 같은 인체자원과 임상정보를 모아 연구자가 쓸 수 있도록 관리하는 ‘생명과학 자료은행’이다. 단순히 검체를 냉동 보관하는 곳은 아니다. 최근에는 MRI·PET 같은 의료영상은 물론 유전체·단백체 분석정보까지 함께 쌓아 질병의 특징과 치료 단서를 찾는 데 활용한다.
국립보건연구원은 2016년 만성뇌혈관질환을 시작으로 육종암, 부인암, 유전성 발달장애 등으로 혁신형 바이오뱅크 사업을 넓혀왔다. 그동안에는 주로 환자에게서 얻은 자원을 모았다. 반면 이들과 직접 비교할 정상 장기조직은 상대적으로 구하기 어려웠다.
올해부터 사망 기증자 조직으로 이 빈틈을 메운다. 기존 부인암 컨소시엄 사업을 마치고 연세대학교 산학협력단 오지원 교수가 책임을 맡은 ‘시체유래 정상조직 컨소시엄’을 새로 지원한다. 이에 따라 사업은 만성뇌혈관질환, 육종암, 유전성 발달장애, 사망 기증자 정상조직 등 4개 분야로 운영된다.
정상조직이 왜 중요할까
가령 심장질환 환자의 조직에서 특정 유전자가 유난히 활발하게 작동한다고 가정해보자. 정상 심장에서도 같은 현상이 흔하다면 질병의 중요한 단서라고 보기 어렵다. 반대로 정상조직에서는 드문 변화가 환자 조직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난다면 질환과의 관련성을 더 자세히 살펴볼 이유가 생긴다.
이런 비교가 쌓이면 수많은 유전자와 단백질 가운데 질환과 관련성이 높은 후보를 추려낼 수 있다. 새로운 진단지표를 찾거나 약물이 겨냥할 치료 표적을 좁혀가는 데 정상조직이 ‘기준점’ 역할을 하는 셈이다.
살아 있을 때 얻기 힘든 심장·뇌…사후 기증이 빈틈 메워
살아 있는 사람에게서도 진료나 수술 과정에서 나온 조직을 연구에 활용할 수 있다. 하지만 건강한 심장이나 뇌 조직을 연구 목적으로 떼어낼 수는 없다. 질환 조직은 있는데 제대로 비교할 정상조직은 부족해지는 이유다.
사망 뒤 기증이 이뤄지면 상황이 달라진다. 생전에는 연구용으로 얻기 어려웠던 여러 장기의 조직을 확보할 수 있다. 한 기증자에게서 여러 장기 조직을 얻으면 장기마다 유전자가 어떻게 다르게 작동하는지도 비교할 수 있다.
해외에서는 이미 이런 방식의 대규모 연구가 진행됐다. 미국 국립보건원(NIH)이 2010년 시작한 ‘GTEx(Genotype-Tissue Expression)’ 사업이 대표적이다. 뇌·심장·폐·췌장·피부 등 여러 조직을 모아 사람과 장기마다 유전자 활동이 어떻게 다른지 분석했다.
최종 데이터에는 사망 기증자 838명의 DNA 자료와 54개 조직 부위·2개 세포주에 걸친 1만7382건의 RNA 염기서열 분석자료가 포함됐다. 같은 유전자를 지닌 사람이라도 어느 장기에서 얼마나 활발하게 작동하느냐가 다르다는 점을 대규모 자료로 살펴볼 수 있게 된 것이다.
GTEx는 건강한 조직의 유전자 활동을 보여주는 대규모 기준 자료를 마련했다. 연구자는 이를 바탕으로 환자 조직에서 발견한 변화 가운데 질환과 관련성이 높은 신호를 추려볼 수 있다.
다만 사후 조직은 많이 모은다고 곧바로 좋은 연구자원이 되는 것은 아니다. 사망 후 조직을 채취하기까지 걸린 시간이나 보존 방법 등에 따라 RNA 같은 생체분자의 상태가 달라질 수 있어서다. 언제 채취했고 어떤 방식으로 보관했는지까지 일정한 기준으로 관리해야 연구 결과의 신뢰도를 높일 수 있다.
앞으로 정상조직의 숫자뿐 아니라 채취·보관 과정과 기증자 관련 정보를 얼마나 꼼꼼히 관리하느냐가 연구 활용도를 좌우할 것으로 보인다.

연구자가 직접 구하기 힘든 조직, 국가은행서 받아 쓴다
국립보건연구원이 운영하는 혁신형 바이오뱅크에는 2025년 말까지 모두 3648명분의 인체자원이 모였다. 만성뇌혈관질환 1755명, 육종암 1089명, 부인암 404명, 유전성 발달장애 400명분이다.
이 가운데 1645명분이 연구자에게 공개·분양됐다. 관련 연구는 국제학술지 논문 46편, 특허 10건, 기술이전 3건, 사업화 1건으로 이어졌다. 치매 디지털 치료제와 셀프케어 정신건강 관리기술, AI 기반 콘텐츠 독성 분석기술 등도 이 사업에서 확보한 자원을 활용해 개발됐다고 연구원은 설명했다.
바이오뱅크의 장점은 연구자가 필요한 환자와 조직을 처음부터 직접 찾아 모으지 않아도 된다는 데 있다. 특히 희귀질환이나 구하기 어려운 장기조직은 한 연구기관이 충분한 양을 확보하기 쉽지 않다. 국가가 일정한 기준으로 관리한 자원을 모아 연구자에게 제공하면 연구를 시작하는 데 필요한 시간과 부담을 줄일 수 있다.
범위를 한국인체자원은행 전체로 넓히면 2025년 말 누적 인체자원은 139만명분이다. 인체자원을 분양받은 연구과제는 누적 5854건, 관련 특허 등록·출원은 246건으로 집계됐다.
이번에 사망 기증자 정상조직까지 더해지면 국가 바이오뱅크의 역할도 한층 넓어진다. 이렇게 쌓인 정상조직은 질환과 관련된 변화를 더 정밀하게 가려내는 비교 기준이 된다. 나아가 새로운 진단지표를 찾거나 치료제가 겨냥할 표적을 발굴하는 연구에도 활용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