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08월 17일 (월)

남겨진 결정 — 신경과 병동에서

[호스피탈리스트 다이어리]#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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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AI생성

“의사 선생님, 다른 형제들은 동의했다던가요?”

평화롭던 일상이 단 몇 초 만에 무너지는 곳, 신경과 입원 병동의 시계는 가끔 잔인하게 흘러간다. 어제까지만 해도 자녀들과 웃으며 저녁 식사를 하던 환자가 뇌졸중이나 대량 뇌출혈로 갑자기 의식을 잃고 실려 온다. 어떠한 유언도, 마지막 인사도 나누지 못한 채 환자는 순식간에 깊은 잠에 빠져들고, 그 순간부터 남겨진 가족들에게는 가혹하고도 슬픈 숙제가 주어진다. 바로 ‘연명의료 결정’이다.

종양내과나 완화의료 병동의 연명의료 결정이 비교적 ‘예견된 이별’을 차분하게 준비하는 과정이라면, 신경과의 상황은 문자 그대로 ‘마른하늘의 날벼락’에 가깝다. 평소 환자가 존엄한 마무리 방식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 물어볼 틈도 없었기에, 우왕좌왕하는 가족들에게 인공호흡기 착용이나 심폐소생술 여부를 물을 때면, 그들의 눈동자에 서린 당혹감과 미안함이 고스란히 전해져 마음이 무겁다.

더 큰 혼란은 ‘법적 가족’이라는 복잡한 테두리 안에서 발생한다. 현행법상 환자의 의사를 확인할 수 없을 때 연명의료를 결정하려면 호적상 등록된 모든 직계 가족의 동의가 필요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는 가족의 모습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평생을 곁에서 간병해 온 사실혼 배우자가 서류가 없다는 이유로 멀찍이 물러서야 하는가 하면, 오래전 마음의 문을 닫고 연락조차 끊겼던 자녀들이 소환되기도 한다.

그럴 때 주치의의 복잡하고 까다로운 여정이 시작된다. 드라마처럼 병실 복도에서 고성이 오가는 경우는 드물다. 진짜 곤혹스러운 상황은 정적 속에서, 전화기 너머에서 조용히 흐른다. 진료와 처방으로 숨 가쁜 하루 중에도 연락처를 수소문해 멀리 있는 가족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건다.

특히 오랜 갈등으로 서로 등을 돌리고 살던 가족들을 마주할 때가 가장 조심스럽고 난감하다. 환자의 생사 앞에서도 서로 대화조차 섞으려 하지 않는 형제자매들 사이에서, 주치의는 의사이자 유일한 대화의 통로가 된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 부모님의 상태를 설명하고, 마음속에 엉겨 붙은 원망과 복잡한 감정의 실타래를 지켜보며 의견을 조율해 나간다.

“다른 형제는 동의하셨는데, 보호자분 생각은 어떠신가요.”

부모님의 마지막 길목에서조차 서로 마주 보지 못하는 자식들의 오랜 상처까지 전화기를 붙들고 다독이며 하나의 결정을 이끌어내는 과정은, 신경과 호스피탈리스트로서 참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1분 1초가 급한 상황에서 눈앞의 질병뿐만 아니라 한 가족의 흩어진 마음까지 전화로 붙잡고 조율하다 보면, 문자 그대로 혼이 빠지는 깊은 피로감이 몰려온다.

그럼에도 이 힘겨운 전화를 돌리며 마음을 다잡는 이유가 있다. 비록 사이가 안 좋고 표현은 거칠지언정,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자식들의 묵직한 침묵과 떨리는 목소리 속에는 결국 부모님을 향한 복잡한 회한이 배어 있기 때문이다. 이 가혹한 순간을 조금이라도 줄이고 존엄한 마무리에 집중하기 위해, 우리는 건강할 때 작은 준비를 시작해야 한다.

첫째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내가 온전할 때 미리 등록해 두는 것이다. 예고 없이 의식을 잃는 순간, 내가 삶의 마지막을 선택할 권리도 사라진다. 따라서 내가 미리 남겨둔 명확한 의사표시는 서먹했던 가족들이 불필요한 죄책감과 갈등 없이 나의 뜻을 따르게 하는 가장 강력한 법적 보호막이 된다.

둘째는 평소 가족 간 대화를 통해 ‘유사시 의견을 조율해 줄 중심 창구’를 한 사람 지정해 두는 것이다. 사이가 서먹한 가족뿐만이 아니다. 평소 우애가 깊고 화목한 가족이라 할지라도, 막상 큰 불행이 닥치면 저마다 부모님을 위하는 마음에 의견이 갈려 우왕좌왕하게 된다. 모두가 슬픔으로 경황이 없는 순간일수록, 의사와 소통하며 가족들의 생각을 하나로 모아줄 ‘소통의 책임자’가 꼭 필요하다. ‘우리 가족 의견의 조율자는 이 사람이다’라는 약속이 미리 되어 있다면, 위급한 순간에 흩어지는 가족들의 마음을 빠르게 한데 묶어 환자를 위한 가장 존엄하고 신속한 결정을 내릴 수 있다.

수없이 많은 연명의료 중단 동의서를 받아 가며 결국 남는 생각은 하나다. 병원 안에서 일어나는 이 다양한 조율들이 결코 남의 집 일만은 아니며, 우리 역시 언젠가 마주해야 할 순간이라는 점이다. 놀라울 정도로 많은 이들이 준비되지 않은 이별 앞에서 뒤늦은 마음에 아파하고 미안해한다.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건 거창한 서류나 제도만이 아니라, ‘그때가 오면 서로 너무 미안해 하지 말자’라고, ‘어떤 선택을 하든 서로의 결정을 믿어주자’라고 평소에 미리 나누어 두는 현실적인 대화 한마디일 것이다.

<편집자주>

입원전담전문의(호스피탈리스트)는 병동에 상주하며 가장 가까이에서 입원환자를 돌보는 의사를 말한다. 2016년 시범사업으로 시작된 입원전담의 제도는 2021년 본사업으로 전환되어 올해 꼭 10년을 맞는다.

'호스피탈리스트 다이어리'는 이들이 병동에서 환자들을 만나고 치료하고 퇴원시키며 하루하루 쌓아가는 작은 순간들의 기록이다. 환자와 보호자, 다른 의료진, 그리고 입원전담의 자신에 대한 고백까지, 이 연재(주1회)를 통해 병원 안에서 겪는 '사람 사는 이야기'를 독자들과 나누고자 한다. 대한입원의학회 도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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