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췌장암은 인류가 아직 제대로 정복하지 못한 대표적인 암으로 꼽힌다. 초기에 뚜렷한 증상이 없고, 발견했을 때는 이미 주변 혈관이나 다른 장기까지 퍼진 사례가 너무 많다.
암세포가 췌장에서 멀리 떨어진 다른 장기로 이동해 새로운 종양을 만든 ‘원격전이’ 환자의 5년 상대생존율은 2.4%에 그친다. 한국 췌장암 환자 전체 5년 생존율이 17%임을 고려할 때 상당히 낮은 수준이다.
최근 한 신약이 미국 식품의약국(FDA) 승인을 받으면서 상황이 달라졌다는 기대감이 나온다.
미국 식품의약국으로부터 26일(현지시간) 승인을 받은 미국 생명공학기업 레볼루션 메디신의 표적항암제 ‘다락손라십’은 췌장암의 중심 성장신호인 ‘RAS(라스)’를 억제할 수 있는 첫 치료제다.
췌장암 환자 90%에 나타나는 변이, 약으로 잡는다
RAS는 세포의 성장과 분열을 조절하는 단백질 계열로, 평소에는 필요할 때 켜지고 임무가 끝나면 꺼진다. 이때 단백질을 켜고 끄는 ‘스위치’ 역할을 하는 것이 KRAS 단백질이다.
그런데 어떤 이유로 KRAS에 돌연변이가 생기면 이 스위치가 켜진 채로 고장난다. 결과적으로 세포에 “계속 자라서 분열하라”는 명령이 끊임없이 전달돼 암을 유발한다. 췌장암 환자의 90% 이상에게 이 KRAS 단백질 변이가 발견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문제는 RAS 단백질 표면에 약이 붙을 만한 공간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이에 RAS는 수십 년 넘게 약으로는 정복할 수 없는 영역으로 인식돼 왔다.
신약 다락손라십은 다른 단백질과 먼저 결합한 뒤, RAS에 달라붙어 암 성장 촉진 신호를 다음 단계로 이어지지 못하도록 해 이 문제를 해결했다. 암이 전이되는 과정을 본질적으로 차단할 가능성이 열린 셈이다. 주로 췌장암에 나타나는 KRAS 뿐만 아니라 다양한 RAS 변이를 폭넓게 억제할 수 있다는 것도 특징이다.
이런 작용 원리를 바탕으로 다락손라십은 임상 3상에서 유효성을 입증하는 데 성공했다. 해당 약물 복용군의 전체생존기간(OS) 중앙값은 13.2개월로, 기존 화학항암요법으로 치료받은 대조군의 6.7개월 대비 약 2배 가까이 길었다.
췌장암 치료 ‘게임체인저’ 될까
다락손라십이 췌장암 완치로 이어지기 위해선 여러 관문을 넘어야 한다. 이번에 다락손라십이 허가를 받은 치료 대상은 기본적으로 한 차례 이상 전신치료를 받고 나서도 암이 전이된 환자다. 모든 췌장암 환자가 진단 이후 바로 이 약을 복용하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다.
이에 다락손라십이 당장 췌장암 치료에 드라마틱한 혁신을 가져오는 것은 힘들 것이란 지적도 나온다.
실제 다락손라십의 임상 3상 데이터가 첫 공개된 지난 5월 미국 임상종양학회 연례학술대회(ASCO 2026)에서 토론자로 나선 제니퍼 녹스 캐나다 토론토대 의대 교수는 “다락손라십이 전례 없는 희망을 가져온 것은 사실이지만, 현재로서는 2차 치료제라는 한계가 뚜렷하다”고 평가했다.
췌장암은 2차 치료에 도달하지 못하고 1차 치료 단계에서 사망하는 환자들이 너무 많다는 설명이다. 녹스 교수는 “1차 치료나 수술 전후 치료에서 효과를 입증해야 췌장암 환자들의 전체 생존율을 큰 폭으로 바꿀 수 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다락손라십 임상을 주도한 다나-파버 암 연구소의 브라이언 월핀 박사 역시 “이 약이 전이성 췌장암의 완치약은 아니다. 종양은 언젠가 RAS의 구조를 바꾸거나, 전이 경로를 우회하게 될 것”이라며 “그렇게 되면 결국 대부분의 환자에게 내성이 발생할 수 있다는 문제가 여전히 남아 있다”고 한계를 인정하기도 했다.
“췌장암 치료 패러다임 완전히 바뀔 가능성도”
한국의 췌장암 치료 전문가들은 다락손라십의 이번 임상 결과를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췌장·담도 질환의 권위자로 알려진 이규택 삼성서울병원 소화기내과 교수는 28일 코메디닷컴과의 인터뷰에서 “지금껏 출시된 췌장암 치료제 중 다락손라십 만큼 모든 의사가 관심을 가지고 박수를 친 약은 없었다. 그야말로 치료의 패러다임 자체를 바꿀 가능성이 있는 약”이라고 평가했다.
현재 췌장암 치료에는 세포독성항암제(화학항암제)를 쓴다. 짧아도 한 시간, 길면 3일에 걸쳐 주사를 맞는 고통스러운 과정이 따른다. 반면 다락손라십은 먹는 약, 일명 경구약이다. 이 교수는 “처방과 복용이 압도적으로 쉬워지는 것”이라며 “이것만으로도 가치가 충분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현재 다락손라십 관련으로는 두 가지 임상 시험이 진행 중이다. 하나는 기존 표준 1차 치료법인 화학항암제에 다락손라십을 함께 사용하는 방식으로, 장기적으로 1차 치료에서도 다락손라십이 충분한 유효성을 보일 수 있을지를 입증하는 것이다.
두 번째 임상은 췌장암 절제술을 받은 환자들에게 다락손라십을 복용하도록 하는 시험이다. 현재까지 췌장암 완치를 기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결국 수술을 통해 종양을 절제하는 것이다. 이런 환자들은 수술 후 추가 항암을 하는데, 이 과정에서 다락손라십이 기존의 약물을 대체할 수 있을지를 알아보기 위한 임상이다.
위의 두 종류 임상 모두 한국인 환자군이 참여하고 있다. 다락손라십이 한국 허가를 받은 이후 추가 임상에서 유효성을 입증하면 별도 검증 없이 한국 환자들에게 적용이 가능할 것으로 전망된다.
'꿈의 치료제' 아닐 수도 있어
다락손라십의 허가와 출시를 신중하게 바라봐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소화기암 치료 분야 대표 권위자로 꼽히는 장대영 한림대성심병원 종양혈액내과 교수는 “다락손라십의 임상 결과는 난치성 췌장암 치료에 있어 매우 긍정적인 소식”이라면서도 “여전히 장기 생존을 위해선 더욱 더 개선된 치료법 개발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장 교수는 이날 코메디닷컴과의 인터뷰에서 “다락손라십이 췌장암 대다수에서 발현되는 유전자 변이를 표적으로 해서 효과를 입증했다는 점은 의의가 크다. 다만 현재 진행 중인 추가 임상 시험 결과에 따라 실제 치료 전략에 얼마나 반영될지가 결정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어 “통상 소화기암에서는 신약이 등장하더라도, 화학항암제를 완전히 대체하기보다는 부작용을 줄여주거나 치료 효율성을 개선하는 정도의 효과를 보일 때가 많다”며 조심스러운 견해를 전했다.
장 교수는 “다락손라십의 알려진 약가는 30일에 4만 달러(약 5500만원) 정도다. 단순 계산하면 1년에 6억원 이상의 약값을 지불해야 하는데, 의료자원 투입의 관점에서 보면 약제비 부담도 잘 조절해야 할 것”며 현실적인 한계를 지적하기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