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08월 05일 (수)

꽃과 봄바람이 잠을 부른다…치유의 도시로 변신한 ‘마약왕’의 고향

[세계를 걷다, 웰빙을 만나다] 콜롬비아 메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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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데진의 7, 8월은 꽃으로 가득 찬다. 사진은 1층 바닥 전체가 꽃으로 장식된 부촌인 엘포블라도의 한 대형쇼핑몰. 사진=김승근 기자

랭보가 찾던 ‘가장 좋은 잠’, 안데스 계곡에서 찾다

프랑스 상징주의의 대표적 시인 아르튀르 랭보(Arthur Rimbaud)는 그의 시 ‘나쁜 혈통’에서 “가장 좋은 건 잔뜩 취해 해변 모래판에서 자는 잠”이라고 했다.

지독한 방랑벽과 그로 인한 신체적 혹사가 병세를 악화시켜, 결국 골육종으로 30대에 세상을 등진 랭보다운 문장이다.

물론 해변에서 술에 취한다고 해서 누구나 ‘가장 좋은 잠’을 잘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황금의 땅 엘도라도의 나라, 콜롬비아 제2의 도시 메데진(Medellín)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곳은 외지인에게도 완벽한 ‘잠의 질’을 보증하는 훌륭한 안식처다.

메데진 호세 마리아 코르도바(José María Córdova) 국제공항에 착륙하기 직전, 비행기 기장의 안내 방송이 기내에 울려 퍼진다.

“영원한 봄의 도시(La Ciudad de la Eterna Primavera), 메데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천혜의 지형이 만들어낸 기가 막힌 기후와 연중 푸르른 풍경은 메데진에 ‘영원한 봄’이라는 선명한 도장을 찍어주었다.

메데진은 북위 6도, 적도 바로 아래에 자리 잡고 있다. 지리적 위치만 보면 지옥처럼 덥고 습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안데스산맥 계곡, 해발 1500m 높이가 선사하는 신비로운 기후 반전이 기다린다.

적도의 뜨거운 열기를 고지대의 서늘함이 상쇄해 주는 덕분이다.

연평균 기온은 22.5°C. 1년 365일 내내 한국의 따스한 5월 날씨가 흐트러짐 없이 유지된다.

낮에 살짝 선명한 햇살이 내리쬐다가도 그늘 아래로 발을 들여놓는 순간 서늘한 바람이 몸을 감싸 안는다.

창문만 열어둬도 산맥을 타고 내리는 산들바람이 콧등을 간지럽히니 장소를 불문하고 스르르 단잠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하물며 바다가 없는 산악 도시 메데진에 내년 완공을 목표로 추진 중인 ‘바다 프로젝트’까지 더해지면 어떻게 될까.

랭보가 읊조렸던 ‘해변에서의 가장 좋은 잠’을 위한 필요충분조건마저 완성되는 셈이다.

이것이 바로 수많은 여행자가 메데진을 한 번 빠져들면 헤어 나오기 힘든 ‘블랙홀’이라 부르는 이유다.

안데스산맥 자락에 둘러싸인 분지인 메데진의 낮 풍경. 사진=메데진 시청(Alcaldía de Medellín)

눈과 뇌를 씻어내는 자연주의 시각·후각 테라피

이 축복받은 날씨는 메데진 최고의 관광 상품을 만들어낸다.

바로 ‘꽃’이다.

메데진은 콜롬비아 최대의 화훼 생산지이자 네덜란드에 이어 세계 2위의 꽃 수출국인 콜롬비아를 떠받치는 핵심 배경이다.

매년 7월 말에서 8월 초, 열흘 동안 도시 전체가 다채로운 꽃과 음악, 전통문화로 물드는 카니발인 '꽃 축제(Feria de las Flores)'가 열릴 정도로 꽃과의 인연이 깊다.

이 축제는 단순히 꽃을 전시하는 단계를 넘어선다.

가파른 산악지대에서 꽃지게를 짊어지고 나르던 농부인 ‘시제테로(Silletero)’의 노동과 삶의 역사를 기리는 국가적 문화유산 행사로 자리 잡았다.

엘포블라도에서 바라다 본 건너편 라스팔마스 모습. 엘포블라도를 제외하면 메데진에서 야경이 아름답다는 건 가난하다는 단어와 매치된다. 사진=김승근 기자

축제 기간에는 시제테로 퍼레이드를 비롯해 반려동물 퍼레이드, 대형 연 날리기, 클래식 카 퍼레이드 등 남녀노소가 참여하는 다채로운 프로그램이 펼쳐진다.

이때가 되면 세계 각국에서 방문객이 구름처럼 몰려든다.

호텔비는 치솟고 예약은 하늘의 별 따기이며 공항 입국장에서는 최대 4시간씩 줄을 서서 심사를 받아야 할 정도다.

이러한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메데진으로 향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도시 전체를 덮은 천연의 꽃물결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심신이 정화되는 강력한 테라피 효과를 누릴 수 있기 때문일 테다.

식물성 녹색과 천연 아로마가 만드는 힐링 메커니즘

스마트폰과 모니터의 차가운 블루라이트에 노출된 현대인의 눈은 늘 과부하 상태다.

이런 점에서 메데진의 꽃 축제는 안구 건조와 시각적 피로를 씻어내는 훌륭한 ‘자연주의 시각 테라피(Visual Therapy)’의 현장이 돼준다.

전문적인 시각에서 자연의 다채로운 원색과 식물성 녹색(Greenery)을 주시하는 행위는 눈의 긴장 근육을 이완시키고 부교감 신경을 활성화한다.

수천 송이의 생화가 만들어내는 파스텔톤과 강렬한 원색의 조화는 뇌의 세로토닌 분비를 촉진해 정신적 스트레스를 완화해 준다.

나아가 수만 송이 생화가 바람을 타고 내뿜는 천연 향기는 후각 신경을 통해 감정과 기억을 담당하는 뇌의 변연계(Limbic System)에 즉각 전달된다.

장미, 라벤더, 백합 등에 풍부한 테르펜(Terpene) 성분은 혈압을 안정시키고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Cortisol) 분비를 억제한다.

눈으로는 색채의 안식을 얻고, 들숨으로는 천연 아로마를 받아들이는 메데진의 꽃물결.

현대인의 지친 뇌와 몸을 회복시키는 가장 완벽한 '생체 리셋(Reset) 테라피'다.

메데진 꽃축제 중 열리는 퍼레이드. 사진=메데진 시청(Alcaldía de Medellín)

‘낙인’에서 ‘다크 투어리즘’으로 변모한 카르텔의 유산

하지만 꽃 축제가 선사하는 화려함 뒤편에는 메데진 시민들에게 지워지지 않을 것 같던 깊은 ‘낙인’이 숨어있다.

‘봄의 도시’가 메데진의 밝은 도장이라면 지우기 힘든 주홍글씨 역시 이 도시의 역사에 깊게 남아있는 탓이다.

메데진은 악명 높은 마약 카르텔의 발상지이자 1980년대 후반 포브스(Forbes) 선정 세계 10대 부자 반열에 올랐던 마약왕 파블로 에스코바르(Pablo Escobar)의 고향이다.

에스코바르의 서사는 넷플릭스 드라마 ‘나르코스’를 비롯해 영화 ‘에스코바르: 파라다이스 로스트’, ‘러빙 파블로’ 등 수많은 미디어에서 다뤄졌다.

꼬무나 13의 담벼락을 장식한 화려한 그라피티. 사진=김승근 기자

하지만 영화 ‘파라다이스 로스트’에서 꼬무나 13 구역을 콜롬비아 현지가 아닌 파나마 시내로 대체해 촬영해야 했을 만큼 한때 메데진은 카메라조차 마음 놓고 들일 수 없는 치안의 사각지대였다.

실제 꼬무나 13(Comuna 13)은 마약 카르텔과 무장 단체의 충돌로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빈민가로 불리던 곳이다.

그러나 현재는 도시 재생 사업을 통해 메트로케이블과 야외 에스컬레이터, 화려한 그라피티와 거리 공연이 가득한 세계적 관광 명소로 완벽히 탈바꿈했다.

나아가 메데진의 옛 낙인은 마약왕의 흔적을 밟아가는 ‘다크 투어리즘(Dark Tourism)’ 상품으로 변모했다.

범죄자의 잔혹한 스토리텔링이 산 자들의 관광 자원으로 승화(?)했다는 역사의 아이러니가 씁쓸하게 다가온다.

다크 투어 중 가장 충격적이었던 장소는 암살자들이 찾던 성모상 앞이었다.

어린 시카리오(Sicario, 암살자)들이 살인 명령을 수행하기 전, 총에 성수를 묻히고 무사히 돌아오기를 기도하던 곳이다. 신성함과 잔혹함이 공존하는 그 끔찍한 기이함에 절로 소름이 돋는다.

시카리오를 체계적인 암살 조직으로 키운 인물 역시 에스코바르였다.

그는 갈 곳 없는 10대 소년들을 차출해 전직 KGB 출신 교관들에게 교전 전술 훈련을 받게 한 뒤 오토바이 암살에 동원했다.

수많은 이들이 이 소년병들에게 목숨을 잃었고 한때 메데진 전역에 오토바이 통행 금지령이 내리기도 했다.

어린 시카리오들이 암살에 나서기 전 기도를 올렸던 로사 마리아상. 사진=김승근 기자

막대한 마약 자금으로 국회의원 자리에 오르며 ‘가난한 자들의 로빈 후드’ 행세를 했던 에스코바르.

그러나 대선 후보 암살과 107명의 목숨을 앗아간 민항기 폭파 테러 등 선을 넘은 범죄는 결국 미국 정부의 개입을 불렀다.

미국 델타포스와 네이비씰 자문단, 콜롬비아 정부군 그리고 경쟁 카르텔까지 합세해 천문학적 비용을 들여 추적한 끝에 1993년 12월 2일 아들과의 통화 신호를 포착한 특수부대의 총탄에 에스코바르는 도주 중 사살된다.

당시 미국 특수부대가 메데진의 험준한 산악 지대에서 에스코바르를 쫓으며 쌓은 첨단 신호 감청과 정보 추적 노하우는 훗날 미국 안보 역사에 대단히 귀중한 자산이 됐다.

그리고 20여 년 뒤인 2011년, 메데진에서 완성된 이 은밀한 추적 기술은 또 한 명의 인류 역사상 가장 악명 높은 테러리스트를 사살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된다.

그가 바로 오사마 빈 라덴이었다.

국내에도 몇 차례 전시회를 가진 바 있는 보테로의 작품 23점이 설치돼 있는 보테로공원. 보테로미술관은 수도인 보고타에 있지만 야외 공원은 메데진에 있다. 그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사진=김승근 기자

어두운 잔재를 딛고 피어나는 진짜 평화를 기대하며

메데진의 ‘낙인’은 에스코바르 사살 이후 얼마나 지워졌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엄청나게 지워졌지만,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지워가는 중’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

지금의 메데진 시민 중 어느 누구도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 하지 않는다. 결코 반복돼서는 안 될 잔혹한 시절이었음을 모두가 뼈저리게 인식하고 있다.

그럼에도 비극의 유전은 집요하다.

유명 앵커였던 어머니(디아나 투르바이)가 1991년 에스코바르 카르텔에 납치·살해당했던 아픔을 가슴에 품은 유력 정치인 미겔 우리베가 2025년 6월, 15살의 시카리오의 총탄에 목숨을 잃는 비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대를 이은 이 비극은 에스코바르가 이 땅에 남긴 ‘범죄의 둔감함’이야말로 가장 악질적인 주홍글씨임을 씁쓸하게 일깨워준다.

메데진 시 정부가 추진 중인 ‘바다’프로젝트의 공사 모습. 파도풀과 인공 해변이 설치된다. 내년 완공이 목표다. 사진=메데진 시청(Alcaldía de Medellín)

그럼에도 메데진은 결코 과거의 굴레에 멈춰 서 있지 않는다.

매년 도시를 뒤덮는 만발한 꽃물결과 영원한 봄의 산들바람은 그 깊은 어둠의 잔재를 온 힘을 다해 정화하고 있다.

잔혹한 피의 역사를 딛고 성찰과 치유를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는 도시의 의지는 그 자체로 강력한 삶의 에너지를 내뿜는다.

그 결과, 차가운 세상에 지친 여행자에게 이곳은 마침내 영혼의 시름을 내려놓고 스르르 단잠에 빠져들게 만드는 가장 따스하고 완벽한 안식처로 탈바꿈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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