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젠가 TV 광고에서 보았다. 당신의 걱정을 대신 해주겠다는 한 보험회사의 ‘걱정인형’ 캐릭터. 보험이 그런 존재라면, 나는 병동에서 그런 의사이고 싶다.
입원전담전문의로 일하다 보면 자주 마주치는 모습이 있다. 병원에 오면 오히려 더 위축되는 사람들. 집에서는 아무렇지 않게 먹던 것도 병원에 오면 왠지 죄가 되는 것 같고, 평소엔 편히 자던 사람도 병원 침대에서는 밤새 뒤척인다. 아프기 전보다 더 많은 것을 참고, 더 많은 것을 걱정한다. 그중에는 꼭 필요한 걱정도 있지만, 내려놓아도 되는 걱정도 적지 않다. 그 불필요한 걱정이 오히려 몸을 더 힘들게 만드는 줄도 모르면서.
특히 먹는 것이 그렇다. 당뇨가 있는 환자는 혈당이 오를까 봐 밥도 조금씩만 먹는다. 좋아하던 것들은 아예 손도 대지 않는다. 평생 즐겨 마시던 믹스커피 한 잔도 병원에 오면 그게 그렇게 죄스러울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 환자 곁에 나는 슬쩍 다가가 말한다.
“병원 로비에 가시면 호떡집도 있고 햄버거 집도 있어요. 믹스커피 좋아하시면 한 잔 하셔도 돼요. 주치의가 허락한 거니까요. 눈치 보지 마시고 마음껏 드세요. 혈당 조절은 제가 해드릴 테니까요. 그런데 내분비내과 선생님들한테는 비밀이에요.”
그리고 소곤소곤.
그래도 여전히 조심스러워하는 환자에게는 한마디 더 건넨다.
“혈당 조절 잘해서 150살까지 사시려고 그러세요? 그냥 적당히 잘 드시고 120살까지만 사시면 되죠.”
그러면 어김없이 “늙은이가 뭘 그렇게 오래 살아요” 하면서도 표정이 스르르 풀린다. 그리고 잘 먹겠다고 약속한다. 좋아하는 믹스커피 한 잔, 따끈한 호떡 한 장, 달콤한 빵 한 조각. 이것이 때로는 약보다 나을 수 있다.
사실 이건 단순한 너스레가 아니다. 의학계에는 ‘비만의 역설(obesity paradox)’이라는 개념이 있다. 일반적으로 비만은 건강에 좋지 않다고 알려져 있지만, 만성질환자나 중증 환자에서는 오히려 체중이 어느 정도 있는 편이 예후가 좋다는 것이다. 중증 환자에서 저체중은 사망률을 크게 높이고, 적정 체중 이상을 유지하는 것이 생존에 유리하다는 연구 결과들이 이를 뒷받침한다. 우리 과에 입원하는 환자들은 중증도가 높은 만성질환자 비율이 높다. 많이 먹으라고 해도 잘 못 먹는 환자가 대부분이다. 그러니 좋아하는 음식 한 입이 진짜 약이 되는 것이다.
비슷한 풍경이 보호자와의 사이에서 펼쳐지기도 한다. 할아버지 환자가 입원해 있으면 대부분 할머니가 옆을 지킨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할아버지가 뭔가를 먹으려 할 때마다 할머니의 눈빛이 달라진다. 군것질은 안 된다, 짠 건 안 된다, 조금만 먹어야 한다. 걱정이 잔소리가 되고, 잔소리가 어느새 감시가 된다.
그럴 때 나는 슬쩍 환자 편을 든다.
“입원해 계시는 동안만큼은 드시고 싶은 거 드셔도 돼요. 제가 옆에 있잖아요.”
할아버지 얼굴이 환해진다. 할머니는 철없는 아이를 바라보듯 할아버지를 흘겨본다. 수십 년을 함께 살아온 눈빛이다. 하지만 퇴원할 때는 꼭 이 말을 건넨다.
“병원에서는 제 말 들으셨죠? 이제 집에 가시면 무조건 사모님 말씀 들으셔야 해요. 여왕님처럼 모시고 따르셔야 다시 입원 안 하세요.”
그러면 할머니가 그제야 흐뭇하게 웃는다. 할아버지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걱정이 많아서 잔소리가 된 것이고, 그 잔소리 뒤에는 평생의 사랑이 담겨 있다는 것을 나는 안다.
암이 의심되어 검사를 받으러 오는 환자도 있다. 암 의심 증상 중 하나가 특별한 이유 없이 6개월 이내에 체중의 10% 이상이 감소하는 것이다. 이미 많이 여위고 기력이 떨어진 상태로 오는 환자가 대부분이다. 그들의 눈빛은 뭔가 다르다. 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시간은 환자에게도 보호자에게도 말 그대로 피를 말리는 시간이다. 밥도 넘어가지 않고, 밤에는 눈이 말똥말똥하다. 머릿속은 온통 ‘혹시 암이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으로 가득하다.
걱정과 불안이 극심해지면 몸속에서는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이 과도하게 분비된다. 코르티솔은 단기적으로는 위기 대응에 도움이 되지만, 지속되면 면역 기능을 억제하고 근육을 분해하며 수면을 방해한다. 이미 체력이 떨어진 상태에서 걱정까지 더해지면 몸은 더 빠르게 소진된다. 결과를 알기도 전에, 지금 이 순간의 불안이 먼저 몸을 갉아먹고 있는 것이다.

그런 환자에게 나는 이렇게 말한다.
“결과가 나오고 나서 걱정하셔도 늦지 않아요. 지금은 그냥 잘 드시고 잘 쉬고 계세요. 그래야 결과가 뭐가 나오든 헤쳐나갈 힘이 생깁니다.”
나쁜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을 이겨내려면 지금 이 순간 몸을 아끼고 힘을 비축해야 한다. 미리 밤을 지새우고 끼니를 거른다고 해서 결과가 더 좋게 나오는 것은 아니다.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은 잘 먹고 잘 자는 것이다. 싸움은 그다음에 해도 늦지 않는다.
아침 회진을 돌 때 나는 전날 밤사이 나온 피검사 결과를 환자와 보호자에게 빠짐없이 설명한다. 수치 하나하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제보다 나아졌는지 나빠졌는지. 설명을 마칠 때마다 나는 꼭 이 말을 덧붙인다.
“제가 검사 결과를 설명드리는 건 돈을 내셨으니까 말씀드리는 거예요. 걱정을 더 키우시라고 드리는 말씀이 아니에요. 그냥 푹 쉬시고, 잘 드시고, 잘 주무시고, 불편한 거 있으시면 바로 말씀해 주시면 돼요.”
그리고 그 말은 항상 웃음과 함께다. 설령 뒤로 살짝 보호자를 불러 안 좋은 예후를 설명하더라도, 환자 앞에서만큼은 늘 밝고 자신감 있는 태도를 유지한다. 환자가 의사의 표정에서 희망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입원해 계신 동안만큼은 걱정은 잠시 내게 맡겨두셔도 된다. 환자분은 잘 드시고, 잘 쉬고, 잘 회복하시면 된다. 그게 내 일이니까. 나는 오늘도 병동을 돌며, 환자들이 미처 내려놓지 못한 걱정들을 조용히 받아 든다. 작고 엉뚱한 ‘걱정인형’처럼.

<편집자주>입원전담전문의(호스피탈리스트)는 병동에 상주하며 가장 가까이에서 입원환자를 돌보는 의사를 말한다. 2016년 시범사업으로 시작된 입원전담의 제도는 2021년 본사업으로 전환되어 올해 꼭 10년을 맞는다. ‘호스피탈리스트 다이어리’는 이들이 병동에서 환자들을 만나고 치료하고 퇴원시키며 하루하루 쌓아가는 작은 순간들의 기록이다. 환자와 보호자, 다른 의료진, 그리고 입원전담의 자신에 대한 고백까지, 이 연재(주1회)를 통해 병원 안에서 겪는 ‘사람 사는 이야기’를 독자들과 나누고자 한다. 대한입원의학회 도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