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07월 31일 (금)

보건의료 등 국가기능 마비 상태에서 강진 덮친 베네수엘라의 비극

지진으로 2200명 이상 사망, 수만 명 실종
전 세계 2000명 수색·구조·의료팀 파견
인구 1000명당 의사 숫자 1.8명 불과
정부 마비와 경제난으로 의사 절반 국외탈출
2000년부터 쿠바와 석유-의사 교환했지만
초인플레 등으로 쿠바 의사 귀국해 공백
보건의료 붕괴상태…전염병 등 2차타격 우려

구글 검색 선호 출처로 추가
베네수엘라 중부도시 카라발레다의 무너진 건물더미에서 6월 30일 구조대가 생존자를 수색하고 있다. 사진= AFP연합

남미 국가 베네수엘라는 6월 24일 오후 6시쯤(현지 시간) 발생한 강진으로 막심한 고난을 겪고 있다. 수많은 사망자와 부상자가 발생한 것은 물론 사후 수습도 여의치 않아 보건의료를 비롯한 재해 관련 전 분야의 혼란이 장기화할 것으로 전망된다. 특히 의사를 비롯한 보건의료 전문인력의 부족으로 보건의료 대란이 우려된다.

미국 공영라디오 NPR에 따르면 2일까지 사망자 약 2295명, 부상자 1만1267명이 발생한 것으로 집계됐으며, 그 숫자는 계속 늘고 있다. 실종자는 지진 첫날에만 6만 4만6628명 이상이 신고됐다. BBC방송에 따르면 주민들과 세계 각국에서 달려온 수색대는 구조 골든타임인 72시간을 넘기면서도 약 5만8000채의 붕괴 건물을 대상으로 필사적인 수색을 진행 중이다. 미국·멕시코·스페인·콜롬비아·독일·스위스 등 24개국에서 1000명 규모의 전문 수색·구조대와 비슷한 규모의 의료지원대를 현지에 파견해 주민들을 돕고 있다.

문제는 베네수엘라 정부다. CNN 방송 등에 따르면 지진이 발생한 지 1주일이 지난 7월 1일에야 7일간의 국가 애도 기간을 선포했을 정도도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고 있다. 24일 지진이 발생하자 국가비상사태는 선언했지만 연료가 부족해 실종자 수색을 위한 중장비도 제대로 가동하지 못하고 곡괭이와 삽을 이용한 수작업으로 수색에 나서고 있다고 알자지라 방송 등이 보도했다. 한반도의 4.8배에 이르는 국토에 철도망은 682㎞에 불과해 수도나 항구에서 떨어진 농촌과 오지에는 구호품 전달을 걱정할 정도다. 한마디로 국가 기능이 마비된 셈이다.

걱정되는 점은 베네수엘라가 지진 전에도 인프라 붕괴와 인력 부족으로 의료 공백 사태를 겪어왔다는 사실이다. 2018년 최대 100만%에 이른 초인플레이션으로 경제가 사실상 붕괴된 데다 기초 인프라 부족으로 전력 공급이 불안정하고 단수는 수시로 벌어졌다. 의료기관에는 응급환자용 의료용품은 물론 기본 검사에 필요한 시약조차 부족해 사실상 의료 마비 상태였다. 

베네수엘라 중부도시 카라발레다에서 7월 1일 자원봉사자들이 구호품을 분배하고 있다. 사진= AFP연합

국외 유출과 전직으로 의료진도 부족하다. 세계은행(WB)에 따르면 베네수엘라는 인구 1000명당 의사 숫자가 1.8명(2017)에 불과하다. 조사 시기는 다르지만, 라틴아메리카와 카리브해 연안국 평균인 2.6명(2022)에 한참 못 미친다. 참고로 한국은 3.8명이다.

1999년부터 우고 차베스 대통령이, 2013년부터는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이 포퓰리즘 정권을 유지하고 있는 베네수엘라는 석유-의사 교환 프로그램으로 의사를 보충해왔다. 자국 의사들이 농촌·격오지·빈민 지역 근무를 꺼려하면서 보건의료의 지역적 불균형이 심화하자 차베스는 의사 수입을 결정했다. 2000년 일당독재 국가 쿠바와 석유-의사 교환 프로그램에 합의했다. 베네수엘라는 시장가보다 낮은 우호 가격으로 쿠바에 석유를 제공하고, 쿠바는 의사를 파견해 기초의료센터나 농촌, 오지 등에 근무시키는 제도다.

2003년 차베스 지지자인 수도 카라카스의 시장이 이 프로그램을 가장 먼저 가동했다. ‘미시온 바리오 아덴트로(Misión Barrio Adentro:이웃으로 가는 임무)’라는 명칭의 이 프로그램을 통해 베네수엘라는 최대 연 3만2000명의 쿠바 의사를 받아들였다. 연인원으로는 수십만 명에 이른다. 무상교육으로 양성된 쿠바 의사들은 본국에 근무할 때는 월급이 2000년대 초반까지 약 16달러(현재는 40~70달러라는 보고도 있다) 수준에 지나지 않았지만 해외에 파견되면 200~300달러를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2018년 초인플레이션 이후 경제적인 불안이 가속화하자 이 제도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경제난으로 300만 명 이상의 국민이 해외로 떠났고 여기에는 의사도 상당수 포함됐다. 

베네수엘라 의사연맹 등에 따르면 지난 10년 동안 전체 의사의 절반 정도인 4만7000명이 다른 나라로 떠났다. 그 결과 현재 남아있는 자국의사는 1만5000~2만 명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해외에 파견된 쿠바 의사들. 사진=퍼블릭 도메인

한때 3만 명이 넘었던 쿠바 출신 의사도 경제난으로 임금을 지급받지 못하면서 급격히 줄어들었고 올해 초 베네수엘라가 쿠바에 대한 석유 공급을 중단하자 모두 떠났다. 1월 3일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이 미국에 납치되고, 임시 정부가 친미 성향으로 전환하면서다.

강진 전부터 이미 국가로서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고 있었던 셈이다. 유엔인도주의업무조정국(OCHA)의 ‘2026년 세계 인도주의 개요’는 베네수엘라가 폭우·홍수 등 빈번한 자연재해와 극단적 인플레이션 등 정치·경제적 불안정 때문에 이미 전체 인구의 25%가 넘는 790만 명이 인도적 지원을 필요로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런 가운데 강진이라는 자연재해를 당하면서 더욱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된 셈이다. 이에 따라 다른 국가와 국제기구, 인도주의 단체의 지원이 이어지고 있다. 한국도 외교부가 국제기구를 통해 500만 달러(약 77억 원) 규모의 인도적 지원을 제공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의사를 비롯한 보건의료인력이 태부족인 상황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걱정이다.

베네수엘라 중부도시 카라발레다의 임시 진료소 앞에서 6월 30일 주민들이 의사 진료를 기다리고 있다. 사진= AFP연합

유엔난민기구(UNHCR)는 베네수엘라가 낙후된 의료 시설과 백신 물량 부족으로 기본 예방 접종 등 기초 방역 체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이에 따라 전염병 대응 역량이 크게 떨어져 예방 가능한 질병들도 제대로 통제되지 않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번 지진으로 전염병이 창궐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이유다.

베네수엘라는 세계 최대 석유 매장량을 자랑하는 산유국이다. 석유수출국기구(OPEC) 자료를 보면 2025년 기준 확인 원유 매장량은 3032억 배럴로 세계 1위다. 하지만 미국 에너지 관리청(EIA) 데이터에 따르면 베네수엘라의 2025년 생산량은 하루 96만8000배럴로 세계 20위에 불과하며, 2024년 기준 수출액은 98억4500만 달러로 세계 23위다.

있는 석유도 제대로 캐거나 팔지 못하니 나라와 국민은 가난할 수밖에 없다. 국제통화기금(IMF)은 2026년 베네수엘라의 국내총생산(GDP)를 세계 74위인 1113억 달러로, 1인당 GDP를 세계 131위인 4140달러로 각각 전망했다. 세계은행(WB)는 1인당 GDP에 따라 세계 각국을 고소득국가(1만4375달러 이상), 중상위 소득국가(4636~1만4375달러), 중하위 소득국가(1176~4636달러), 저소득국가(1175달러)로 나누는데, 이에 따르면 베네수엘라는 중하위 소득국가에 해당한다.

베네수엘라와 쿠바가 2000년 협력계약을 맺고 진행한 석유-의사 교환 프로그램인 ‘미시온 바리오 아덴트로(Misión Barrio Adentro:이웃으로 가는 임무)’의 로고. 사진=퍼블릭 도메인

이 나라가 석유자원을 깔고 앉았음에도 가난에 빠진 이유는 다양하다. 일부에선 ‘극단적인 석유의존 경제’에서 이유를 찾는다. 석유에 모든 투자와 자원, 인력이 몰리는 바람에 농업이나 제조업 등 다른 산업이 몰락하거나 침체했다는 설명이다.

또 다른 이유로 권력층이 오일달러를 바탕으로 벌인 포퓰리즘 정치도 꼽힌다. 베네수엘라는 1999년 집권한 우고 차베스 대통령과 2013년 사망한 차베스를 이은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이 막대한 오일달러를 이용해 20년 이상 벌인 좌파 포퓰리즘 정책을 펼쳤다. 무상 의료·교육과 각종 보조금 지급 등을 기반으로 하는 포퓰리즘 정치는 스페인어로 ‘차베스모(차베스주의)’로 불리며 전 세계의 연구 대상이었다. 차베스모는 반제국주의·반자본주의·볼리바르주의(중남미통합주의)가 핵심이다.

포퓰리즘으로 탄탄한 지지층을 확보한 채베스는 사법부와 언론 등 반대세력을 ‘국가의 적’ 또는 ‘제국주의와 결탁한 자본주의 세력’이라며 탄압했다. 법과 제도를 유리하게 뜯어 고쳐 임기를 계속 연장하고 권력을 강화했다. ‘석유사회주의’를 내세워 석유와 오일머니로 중남미 좌파 정권 등을 지원하고 연대를 꾀했다.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보건의료체계, 가난의 수령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국가경제체계는 그런 화려한 이상주의의 그늘에 가려 있다. 이번 강진으로 이런 이면이 새롭게 부각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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