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모두 소라게를 닮아 있다. 소라게는 스스로 단단한 껍데기를 만들지 못한다. 대신 다른 조개의 빈 껍데기를 빌려 살아간다. 부드럽고 연약한 배를 보호하기 위해서다.
부러울 것 없어 보이는 대기업 총수도, 금세 병을 고쳐줄 것 같은 명의도, 아이들의 전부인 부모도, 드러나는 순간 금방이라도 무너질 수 있는 소라게의 배처럼 연약한 부분이 있다. 다만 다른 사람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저마다 부지런히 껍데기를 갈아 끼울 뿐이다.
2025년 가을, 나는 병실에서 껍데기를 빼앗긴 소라게 같은 한 남자를 만났다. 60대 후반의 그는 췌장암 환자였다. 2024년에 진단받고 소화기내과에서 항암치료를 받는 중이었는데, 기존 마약성 진통제로는 복통이 더 이상 조절되지 않아 응급실에 내원하였다.
CT에서는 그새 더 커진 종양이 복강신경을 침범한 것이 보였다. 통증이 심해진 이유였다. 응급의학과, 소화기내과 등 여러 과가 상의한 끝에, 우선 종합내과에 입원하여 모르핀을 정맥으로 지속 투여하며 방사선 치료, 신경차단술 등으로 통증을 조절한 뒤 소화기내과로 전과하여 항암제를 변경하기로 계획했다.
환자가 퇴근 시간 무렵 입실한 터라 나는 곧바로 병실로 향했다. 그리고 눈앞의 광경에 순간 말을 잃었다. 바짝 마른 환자가 굳은 표정으로 침대에 누워 있었고, 중년 여성 한 명이 환자 위에 엎드려 있었다.
환자를 진찰해야 하니 침대에서 내려와 달라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러자 환자의 부인인 그 여성이 난처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내려오고 싶어도 내려올 수가 없어요.”
그제야 보였다. 환자가 부인의 양 손목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부부끼리 이러고 있는 게 뭐가 어때서요?”
환자는 매섭게 쏘아붙였다. 진찰을 위해 부인의 손을 놓아달라고 요청했다. 부인도 놓아달라며 남편에게 간곡히 부탁했지만 그는 막무가내였다. 그러고는 부인에게 절규하듯 말했다.

“내가 이렇게 아프니까 나 버리고 도망가려는 거지?”
부인이 아니라고 연신 달랬지만 환자는 움켜쥔 손목을 놓지 않았다. 이어 의료진을 향한 분노도 쏟아냈다.
“내가 이렇게 큰 병원에서 항암치료를 몇 번이나 했는데 하나도 좋아진 게 없어! 뭐라도 낫게 해줘야 할 거 아니야! 나 치료한 그 XX 당장 데려와!”
차마 옮기기 어려운 욕설이 이어졌다. 환자는 모든 치료를 거부한 채 이틀 내내 췌장암에 걸린 분노와 억울함, 두려움을 토해냈다. 돌이켜보면 그것은 의료진을 향한 공격이라기보다, 무너져가는 자기 삶을 붙들려는 절박한 몸부림에 가까웠다. 당시 우리 병동 수간호사는 분노로 가득 찬 환자의 가장 큰 대나무 숲이 되어 주었다.
입원 3일째 되던 날, 환자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다시 치료를 받아볼게요.”
나는 모르핀 지속 주입 치료를 시작하였고 마취통증의학과와 방사선종양학과에 의뢰해서 통증을 줄이기 위한 치료들을 하나씩 진행했다. 이후 환자는 소화기내과로 전과되었다. 나는 그가 다음 항암치료를 잘 받을 수 있기를 기도했다.
병동에서 다양한 환자를 만나다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을 마주칠 때가 많다.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버거운 순간이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환자는 결국 약자일 수밖에 없다’고 스스로를 다독이곤 했다.
그런데 이 환자를 진료하면서 이전과는 조금 다른 생각이 들었다. 환자는 단순히 약자가 아니라, 때로는 강제로 껍데기를 빼앗긴 소라게와 같다. 건강이 무너지고 죽음의 공포가 밀려오는 순간, 남편·아버지·사회인으로서의 역할과 체면도 함께 무너져 내린다.
앞으로도 나는 병동에서 유쾌하지 않은 상황들을 계속 만나게 될 것이다. 그럴 때마다 지난가을, 퇴근시간 무렵 병실에서 만난 그 췌장암 환자를 떠올릴 것 같다.
‘이 환자는 지금 껍데기를 빼앗겨서 너무 두렵고 당황스러운 상태구나.’
어쩌면 우리는 환자들이 잠시 몸을 숨길 수 있도록 내어주는, 소독약 냄새가 밴 새 껍데기일지도 모른다.

<편집자주>
입원전담전문의(호스피탈리스트)는 병동에 상주하며 가장 가까이에서 입원환자를 돌보는 의사를 말한다. 2016년 시범사업으로 시작된 입원전담의 제도는 2021년 본사업으로 전환되어 올해 꼭 10년을 맞는다.
'호스피탈리스트 다이어리'는 이들이 병동에서 환자들을 만나고 치료하고 퇴원시키며 하루하루 쌓아가는 작은 순간들의 기록이다. 환자와 보호자, 다른 의료진, 그리고 입원전담의 자신에 대한 고백까지, 이 연재(주1회)를 통해 병원 안에서 겪는 '사람 사는 이야기'를 독자들과 나누고자 한다. 대한입원의학회 도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