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직장 생활과 육아, 사회 활동이 한창인 30, 40대에 뇌종양 진단을 받는다면 삶은 크게 흔들릴 수밖에 없다. 저등급 신경교종은 비교적 천천히 자라는 뇌종양으로 알려져 있지만, 완치가 쉽지 않고 시간이 지나며 더 악성도가 높은 고등급 신경교종으로 진행될 수 있다. 환자 상당수는 발작을 겪고, 치료 이후에도 재발과 악화에 대한 불안을 안고 살아간다.
그동안 저등급 신경교종 치료는 주로 수술, 방사선 치료, 항암화학요법에 의존해왔다. 하지만 뇌 안에 생긴 종양을 완전히 제거하기 어렵고, 방사선·항암 치료는 인지기능 저하 등 삶의 질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한계가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뇌종양 신경교종 분야에서 약 20년 만에 새로운 표적치료제가 등장하면서 치료 패러다임이 바뀔 수 있다는 기대가 커지고 있다.
글로벌 제약사 세르비에는 12일 신경교종 최초의 IDH 변이 표적치료제 ‘보라니고’(성분명 보라시데닙)의 국내 출시 기자간담회를 열었다. 이날 간담회에는 장종희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신경외과 교수와 김재용 분당서울대병원 신경외과 교수가 참석해 저등급 신경교종 치료의 현황과 새 치료제의 임상적 의미를 설명했다.
보라니고는 2026년 1월 식품의약품안전처로부터 허가를 받았다. 허가 대상은 생검, 대부분 절제 또는 완전 절제를 포함한 수술 후 치료가 필요한 40kg 이상의 12세 이상 소아와 성인 환자다. 구체적으로는 IDH1 또는 IDH2 변이가 있는 2등급 성상세포종 또는 희돌기교종 환자가 대상이다. 보라니고는 미국, 캐나다, 영국, 일본 등 전 세계 40개국 이상에서도 허가돼 실제 진료 현장에서 사용되고 있다.
“IDH 변이, 종양 성장의 초기 핵심 인자”
저등급 신경교종은 35∼42세에서 발생률이 가장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회생활과 가정생활의 중심에 있는 시기에 발병하는 만큼 환자 개인뿐 아니라 가족과 사회가 함께 부담을 떠안게 된다. 특히 환자의 최대 74%가 발작을 경험하고, 수술 후에도 절반 이상인 56%에서 발작이 지속되는 것으로 보고된다. 단순히 종양의 크기만 문제가 아니라 일상생활, 운전, 직업 유지, 사회 복귀 등 삶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질환인 셈이다.
장종희 교수는 저등급 신경교종 환자들이 겪는 질병 부담과 조기 표적치료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장 교수는 “저등급 신경교종은 완치가 어렵고 결국 재발하거나 고등급 신경교종으로 진행될 수 있어 환자들은 삶의 중요한 시기에 질환 악화와 재발에 대한 심리적 불안을 크게 느낀다”고 말했다. 이어 “표준 치료인 수술적 절제는 종양을 완전히 제거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고, 수술 후 시행하는 방사선 치료와 항암화학요법은 인지기능 장애 등 이상반응으로 삶의 질과 사회 복귀에 영향을 줄 수 있어 치료에 한계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저등급 신경교종 치료에서 최근 중요하게 다뤄지는 표적은 ‘IDH 변이’다. IDH는 세포 대사에 관여하는 효소인데, 이 유전자에 변이가 생기면 비정상적인 대사물질인 2-HG, 즉 2-하이드록시글루타르산이 만들어진다. 이 물질은 종양의 성장과 악성화를 촉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장 교수는 “2등급 신경교종 환자의 80% 이상에서 IDH 변이가 발견된다”며 “세계보건기구 WHO도 최신 뇌종양 분류 개정에서 IDH 변이를 핵심 진단 기준으로 규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IDH 변이 신경교종은 6개월마다 종양 크기가 약 10% 증가하고, 종양 크기가 10% 증가할 때 사망 위험이 14% 상승하는 것으로 보고된다”며 “암의 진행을 늦추기 위해 조기부터 IDH 변이를 억제하는 치료 전략을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질병 진행·사망 위험 65% 낮춰
김재용 교수는 보라니고의 작용과 글로벌 3상 임상시험 결과를 소개했다. 보라니고는 IDH1과 IDH2 변이를 동시에 억제하는 치료제다. IDH 변이로 인해 만들어지는 2-HG 수치를 90% 이상 낮추고, 뇌-혈관 장벽을 통과해 뇌종양 조직에 직접 도달하도록 개발됐다. 뇌-혈관 장벽은 외부 물질이 뇌로 쉽게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는 보호막 역할을 하는 구조로, 뇌종양 치료제 개발에서 중요한 장벽으로 꼽힌다.
보라니고의 글로벌 3상 임상시험인 INDIGO 연구에서 보라니고는 위약과 비교해 무진행 생존기간을 유의하게 개선했다. 무진행 생존기간은 암이 악화되지 않고 유지되는 기간을 뜻한다. 6개월 추적 관찰 결과, 보라니고는 위약 대비 질병 진행 또는 사망 위험을 65% 낮췄다. 또 다음 치료까지의 개입 시점, 즉 추가 수술이나 방사선·항암 치료가 필요해지는 시점을 늦추는 효과도 확인됐다. 다음 치료까지의 개입 위험은 75% 감소했다. 치료 시작 2년 뒤에도 환자의 80% 이상이 추가 치료 없이 안정적인 상태를 유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김 교수는 “보라니고는 IDH1/2 변이를 이중으로 억제하고 뇌-혈관 장벽을 통과해 종양에 도달하는 신경교종 최초의 IDH 변이 표적치료제”라며 “신경교종을 넘어 뇌종양 영역에서 약 20년 만에 개발된 혁신 신약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다음 치료까지의 개입 시점을 늦춘 점에 주목했다. 김 교수는 “독성이 강한 항암·방사선 치료 시기를 연기할 수 있다는 것은 환자가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이어갈 수 있는 기간을 실질적으로 확보했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보라니고는 종양 성장 억제와 발작 감소 측면에서도 임상적 혜택을 보였다. 종양성장률을 분석한 결과, 보라니고 치료군에서는 종양 용적이 1.3% 감소한 반면 위약군에서는 14.4% 증가했다. 김 교수는 “종양성장률은 질환의 진행 양상과 치료 반응을 보다 정밀하게 평가할 수 있는 지표”라며 “보라니고 치료군에서 뚜렷한 종양 성장 억제 효과가 확인됐다”고 말했다.
또 보라니고는 발작 발생률을 64% 줄이고, 신경인지 기능 보존 가능성도 확인했다. 김 교수는 “이 같은 임상적 가치를 바탕으로 미국 종합암네트워크(NCCN) 가이드라인은 보라니고를 카테고리1이자 선호요법으로 우선 권고하고 있다”며 “이번 국내 출시로 보라니고는 국내 저등급 신경교종 치료의 새로운 표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