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양약품이 12년 가까이 추진해온 백혈병 치료제 ‘슈펙트’의 러시아 진출 시도를 접었다.
2014년 러시아 제약사와 기술수출·공급 계약을 맺었지만 현지 품목허가를 받지 못해 제품을 한 번도 공급하지 못했다.
일양약품은 러시아 제약사 R-pharm과 체결한 라도티닙(제품명 슈펙트) 원료 공급 및 기술수출 계약이 지난 7일 종료됐다고 9일 공시했다.
회사는 러시아 품목허가가 지연되고 R-pharm도 사업 추진을 중단하면서 계약을 더 연장하지 않기로 했다고 밝혔다.
공시 수치 145억원⋯실제로 받은 돈은 100만달러
공시에 적힌 해지금액은 145억2880만원이다. 그러나 일양약품이 이번 계약 종료로 145억원을 손해 봤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 금액은 2014년 계약 당시 정한 계약금과 단계별 기술료를 합친 1300만달러를 당시 환율인 달러당 1117.60원으로 환산한 액수다.
일양약품은 이번 공시에서 1300만달러를 계약금 300만달러와 단계별 기술료인 마일스톤 1000만달러로 설명했다.
실제로 회사가 받은 돈은 계약금 300만달러 가운데 100만달러였다. 나머지 금액은 R-pharm이 현지 허가와 사업화 후속 절차를 밟는 조건으로 지급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이 절차가 진행되지 않아 추가로 받은 돈은 없었다.
제품 공급 실적도 전혀 없다. 일양약품은 “실제 제품 공급이 이뤄지지 않았으므로 이번 계약 종료로 인한 재무적 손실은 없다”고 공시했다.
공시에 표시된 ‘최근 매출액 대비 9.8%’도 현재 일양약품 매출과 단순 비교하면 안 된다. 이 비율은 2014년 최초 계약 공시 당시 매출액을 기준으로 계산한 수치다.
러시아 허가 과정서 추가 임상 요구⋯R-pharm 진행 안 해
일양약품과 R-pharm이 슈펙트의 러시아 계약을 처음 맺은 것은 2014년 12월이다.
계약에 따라 R-pharm이 러시아 품목허가와 상업화를 맡고, 허가를 받은 뒤 일양약품이 라도티닙 원료를 공급하기로 했다. 필요하면 완제품도 공급하는 구조였다.
당시 일양약품은 계약금과 마일스톤뿐 아니라 향후 원료 공급에 따른 추가 매출도 기대했다.
하지만 사업은 품목허가 문턱을 넘지 못했다.
일양약품에 따르면 러시아 품목허가 과정에서 현지 백인 환자를 대상으로 한 추가 임상시험을 요구받았다. 허가와 상업화를 맡은 R-pharm이 이 시험을 진행하지 않으면서 결국 품목허가를 받지 못했다.
허가가 떨어져야만 가능했던 원료와 완제품 공급도 시작되지 않았다. 2014년 계약 이후 약 12년 동안 러시아에서 슈펙트가 실제 판매로 이어지지 못한 이유다.
2024년 이미 “프로젝트 종료”⋯지난해엔 한 차례 자동연장
R-pharm은 계약이 최종 종료되기 2년여 전부터 사업을 접겠다는 뜻을 밝혔다.
공시에 따르면 R-pharm 담당자는 2024년 6월 이메일로 슈펙트 프로젝트를 종료하겠다는 의사를 일양약품에 전달했다.
다만 2025년 9월 7일로 예정된 계약 만료일까지 공식 비연장 통지가 이뤄지지 않아 계약은 한 차례 자동 연장됐다.
일양약품은 이에 따라 지난해 9월 계약 종료일을 2026년 9월 7일로 바꾸는 정정공시를 냈다.
이후 일양약품은 올해 3월 5일 R-pharm에 계약을 더 연장하지 않겠다는 공식 공문을 보냈다. R-pharm 측은 3월 19일 공문을 받았다고 확인했다.
이후 계약 종료일까지 별다른 이의가 나오지 않으면서 계약은 지난 7일 끝났다.
국산 18호 신약 슈펙트⋯러시아는 종료, 중국 허가는 추진
슈펙트는 일양약품이 개발한 만성골수성백혈병 치료제로 성분명은 라도티닙이다.
2012년 1월 식품의약품안전처로부터 국산 18호 신약으로 허가받았다. 처음에는 기존 치료에 실패했거나 약을 견디기 어려운 환자 등에 사용할 수 있도록 허가됐고, 2015년 10월에는 만성골수성백혈병 1차 치료제로 허가 범위가 넓어졌다. 2016년 2월부터 1차 치료제로 판매됐다.
러시아 사업은 끝났지만 슈펙트의 해외 진출이 모두 중단된 것은 아니다.
일양약품은 중국에서도 슈펙트의 품목허가를 추진하고 있다. 회사는 지난 3월 발표한 ‘2026년 기업가치 제고 계획’에서 올해 안에 중국에서 슈펙트의 품목허가를 받는 것을 목표로 제시했다.
이번 사례는 신약 기술수출 계약이 실제 매출로 이어지려면 현지 품목허가라는 별도의 문턱을 넘어야 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계약을 맺었더라도 필요한 임상과 허가 절차가 멈추면 제품 공급과 판매로 이어지지 않을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