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가 먹은 음식의 일부는 포도당으로 바뀌어 혈액을 타고 온몸으로 이동한다. 이때 인슐린은 포도당이 근육이나 지방세포 안으로 들어가 에너지원으로 쓰이도록 ‘문을 열어주는 열쇠’처럼 작용한다. 남는 포도당이 간 등에 저장되도록 돕는다.
혈당이 떨어지면 상황이 바뀐다. 인슐린 분비가 줄고, 간은 저장해둔 포도당을 다시 혈액으로 내보내 혈당을 유지한다.
그런데 ‘선천성 고인슐린증’에서는 혈당이 이미 낮은데도 인슐린 분비가 제대로 멈추지 않는다. 포도당은 계속 세포에서 쓰이는 반면 간에서 혈액으로 공급되는 포도당은 줄어 저혈당이 반복된다. 게다가 뇌가 비상시에 쓸 수 있는 대체 연료인 케톤체 생성까지 억제된다.
이 때문에 심한 저혈당이 오래 지속되거나 반복되면 경련은 물론 뇌 손상까지 이어질 수 있지만, 치료 선택지는 많지 않다.
한미약품이 이런 희귀질환을 겨냥해 개발 중인 주 1회 투여 신약 ‘에페거글루카곤(HM15136)’의 글로벌 임상 2상 핵심투여기간을 마쳤다.
한미약품은 오는 8일부터 10일까지 프랑스 마르세유에서 열리는 제64회 유럽소아내분비학회(ESPE 2026)에서 에페거글루카곤 임상 2상 연구 내용을 발표한다고 4일 밝혔다.
구연 발표는 9일 진행된다. 이번에는 임상 2상에 참여한 환자들의 연령 등 기본 특성과 치료 시작 전 상태를 공개한다. 한미약품은 현재 핵심투여기간을 마치고 전체 임상 데이터를 분석하고 있다.
혈당 낮은데도 인슐린 계속 분비⋯반복되면 뇌 손상 위험
선천성 고인슐린증은 혈당이 떨어졌는데도 췌장에서 인슐린 분비가 제대로 멈추지 않는 질환이다. 인슐린은 혈액 속 포도당을 세포 안으로 보내 혈당을 낮춘다. 필요 이상으로 계속 나오면 심한 저혈당이 되풀이될 수 있다.
특히 영유아의 뇌는 포도당 공급에 민감하다. 저혈당을 제때 바로잡지 못하면 경련이나 의식 저하가 생길 수 있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면 신경계에 영구적인 손상이 남을 위험도 있다.
치료 선택지도 제한적이다. 현재 미국에서 고인슐린증에 따른 저혈당 치료에 승인된 약은 디아족사이드(diazoxide)가 사실상 유일하다. 췌장에서 인슐린 분비를 줄이는 약이지만 환자마다 반응이 다르고, 일부 유전적 원인에서는 충분한 효과를 얻지 못한다.
부작용도 있다. 몸에 털이 많이 자라는 다모증이나 수분이 쌓이는 체액 저류가 알려져 있다. 영아와 신생아에서는 폐혈관의 압력이 높아지는 폐고혈압도 보고됐다.
약으로 저혈당을 충분히 조절하지 못하면 허가 범위를 벗어난 다른 약을 쓰기도 한다. 일부 환자는 췌장을 절제하는 수술까지 받아야 한다.
혈당 올리는 ‘글루카곤’ 오래 작용하도록 만들어
에페거글루카곤은 인슐린 분비를 직접 줄이는 기존 약과 다른 방향에서 저혈당을 막는다. 혈당을 올리는 호르몬인 ‘글루카곤’이 몸에서 오래 작용하도록 만든 장기지속형 치료제다.
글루카곤은 혈당을 낮추는 인슐린과 반대로 움직인다. 간에 저장된 포도당을 혈액으로 내보내 떨어진 혈당을 끌어올린다. 인슐린이 지나치게 분비되는 환자에게 반대 작용을 하는 호르몬을 이용해 저혈당을 줄이는 셈이다.
글루카곤은 심한 저혈당을 바로잡는 데 오래전부터 사용돼 왔다. 다만 기존 제형은 장기간 계속 투여하기 어렵다. 물에 녹인 상태에서 불안정해 침전물이 생기거나 주입관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한미약품은 장기지속형 기술을 적용, 에페거글루카곤이 오래 작용하도록 설계했다. 주 1회 피하주사로 혈당을 조절하는 치료제로 개발 중이다. 선천성 고인슐린증에서 세계 최초의 주 1회 글루카곤 계열 치료제를 목표로 한다.
지난해 8명 중간결과⋯주당 저혈당 10.1회→2.8회
에페거글루카곤의 글로벌 임상 2상은 2세 이상 선천성 고인슐린증 환자를 대상으로 진행됐다. 기존 치료를 받고도 저혈당이 반복되는 환자에게 에페거글루카곤을 추가해 안전성과 저혈당 감소 효과 등을 살폈다. 약이 몸에 들어간 뒤 얼마나 흡수되고, 얼마나 오래 머물다가 빠져나가는지를 보는 ‘약동학’도 함께 평가했다.
지난해 유럽소아내분비학회와 유럽내분비학회 공동학술대회에서 공개한 첫 번째 투여군 8명의 중간결과에서는 저혈당 발생이 크게 줄었다.
하루 7차례 손끝 혈당을 재는 자가혈당측정을 기준으로 주당 저혈당 발생 횟수는 치료 전 평균 10.1회에서 8주 뒤 2.8회로 72.3% 감소했다. 환자가 가정에서 별도로 측정한 자료에서도 주당 저혈당은 평균 16.0회에서 3.6회로 77.5% 줄었다.
가장 흔하게 보고된 이상반응은 복통과 설사, 구토, 메스꺼움 등 위장관 증상과 고혈당, 식욕 감소 등이었다. 대부분 가볍거나 중간 정도였다. 이들 8명 가운데 이상반응 때문에 치료를 중단하거나 사망한 사례는 없었다.
다만 8명을 대상으로 한 임상 2상 중간결과라는 점은 감안해야 한다. 에페거글루카곤의 효과와 안전성을 판단하려면 전체 2상 데이터와 이후 임상 결과를 더 확인해야 한다.
FDA 혁신치료제 지정
에페거글루카곤은 올해 2월 미국 식품의약국(FDA)의 혁신치료제(Breakthrough Therapy)로 지정됐다. 중대한 질환에서 기존 치료보다 나은 효과를 기대할 만한 초기 임상 근거가 나온 신약 후보의 개발과 심사를 FDA가 집중적으로 지원하는 제도다.
혁신치료제 지정이 곧 FDA 허가를 뜻하지는 않는다. 앞으로 임상시험에서 효과와 안전성을 충분히 입증한 뒤 정식 허가 심사를 통과해야 실제 치료제로 쓸 수 있다.
에페거글루카곤은 선천성 고인슐린증 치료제로 미국 FDA와 유럽의약품청(EMA), 한국 식품의약품안전처에서 희귀의약품으로 지정됐다. FDA는 소아 희귀질환 치료제로도 지정했다. EMA에서는 인슐린 자가면역증후군 치료를 위한 희귀의약품 지정도 받았다.
이문희 한미약품 임상팀장(상무)은 “에페거글루카곤의 글로벌 임상 2상 시험의 핵심투여기간을 완료했다”며 “이번 구연에서는 임상 2상에 참여한 환자들의 인구통계학 및 임상적 특성에 대한 내용을 발표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