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구개발(R&D)에 일정 수준 이상 투자하지만 기존 혁신형 제약기업의 높은 문턱을 넘기 어려운 중소·벤처 제약사를 위한 ‘준혁신형 제약기업’ 제도 도입이 추진된다. 정부는 이들 기업에 제네릭 의약품 약가 우대와 R&D 사업 가점 등을 제공해 기존 혁신형 제약기업으로 올라갈 수 있는 중간 사다리를 만들겠다는 구상이다.
아울러 정부는 혁신형 제약기업을 ‘선도형’과 ‘도약형’으로 나누고, 기존 혁신형을 선도형, 준혁신형을 도약형으로 운영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오는 11월까지 관련 근거를 마련하고 12월 신규 신청을 받는 것이 목표다.
보건복지부는 제약산업 현안을 논의하고 경쟁력 강화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제약산업 혁신 민·관협의체’를 구성하고 서울 코리아나호텔에서 첫 회의를 열었다고 2일 밝혔다.
협의체는 이형훈 복지부 제2차관과 노연홍 한국제약바이오협회 회장이 공동위원장을 맡는다. 복지부와 식품의약품안전처, 한국보건산업진흥원, 제약 관련 협회, 제약·바이오기업, 전문가 등 21명이 참여한다.
현재 혁신형 문턱을 ‘준혁신형’에⋯상위 단계는 더 높여
정부가 구상하는 준혁신형은 기존 혁신형보다 한 단계 낮은 R&D 투자 기준을 적용받는 중간 단계다.
현재 제시된 안에 따르면 직전 3개년도 평균 의약품 매출액이 1000억원 미만인 기업은 매출의 7% 이상을 R&D에 투자하면서 최소 50억원 이상을 써야 한다. 매출액 1000억원 이상 기업은 5%, 미국·유럽연합(EU) 등의 의약품 제조·품질관리기준 적합 판정을 받은 기업은 3%가 기준이다.
눈여겨볼 부분은 이 7·5·3%가 현재 혁신형 제약기업에 적용되는 R&D 기준과 같다는 점이다.
정부안대로 제도가 만들어지면 현재 혁신형의 R&D 문턱을 준혁신형이 이어받고, 상위 단계인 혁신형에는 더 높은 기준을 적용하는 구조가 된다.
R&D 요건만 충족한다고 준혁신형으로 지정되는 것은 아니다. 리베이트와 임직원의 비윤리적 행위 등 결격사유도 확인한다. 정부가 제시한 안에서는 지정 유효기간을 3년으로 두고, 기간 중 지정기준을 충족하지 못하면 지정을 취소할 수 있도록 했다.
지원에도 차이를 둘 계획이다. 정부 R&D 사업 가점과 약가 우대 규모 등을 선도형과 도약형에 따라 달리 적용할 수 있도록 관련 근거를 마련한다.
복지부가 제시한 성장 경로는 ‘스타트업→준혁신형 제약기업→혁신형 제약기업→글로벌 수준 제약사’이다.

혁신형 R&D 기준 2%p 높여⋯실제 적용은 3년 뒤
준혁신형 신설 추진과 별개로 기존 혁신형 제약기업 인증제는 지난 7월 법령과 고시 개정을 통해 이미 손질됐다.
가장 큰 변화는 R&D 투자 문턱을 높인 것이다. 연간 의약품 매출액 1000억원 미만 기업은 R&D 비중 기준을 현행 7%에서 9%로 높이고, 최소 연구개발비도 50억원에서 70억원으로 올린다. 매출액 1000억원 이상 기업은 5%에서 7%, 미국이나 EU 등의 의약품 제조·품질관리기준 적합 판정을 받은 기업은 3%에서 5%로 각각 2%포인트 상향한다.
다만 강화된 기준이 당장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정부는 기업이 준비할 시간을 주기 위해 시행을 3년 유예했다. 이에 따라 9·7·5%의 새 R&D 기준은 2029년 7월 22일부터 적용된다. 그때까지는 현재의 7·5·3% 기준이 유지된다.
정부는 2%포인트 상향의 근거로 제도 도입 이후 실제 R&D 투자 증가폭을 들었다. 2012년부터 2023년까지 국내 전체 제약사의 연구개발비 비중은 1.4%포인트 높아진 데 비해 혁신형 제약기업은 3%포인트 상승했다는 설명이다.
인증 평가 방식도 바꿨다. 전체 배점은 120점에서 100점으로, 심사항목은 25개에서 17개로 줄이고 R&D 투자, 임상시험 단계별 건수, 수출 규모 등은 수치로 평가한다. 합격 기준은 100점 만점에 65점 이상으로 명문화했다.
평가의 무게중심도 달라졌다. 제휴·협력 활동과 비임상·임상시험 및 후보물질 개발, 해외진출, 혁신의약품 국내 보급, 경영 투명성의 배점은 높였다. 반면 연구인력과 연구·생산시설, 연구개발 전략, 특허·기술이전 성과의 배점은 낮췄다. 공급망 안정화에 기여하는 의약품 생산·보급 등 사회적 책임 활동도 새 평가항목으로 넣었다.

오래된 리베이트 부담은 줄이고⋯인증취소는 더 빨리
리베이트 관련 인증 기준은 단순히 규제를 강화하거나 완화했다고만 보기는 어렵다. 오래된 위반행위가 인증에 영향을 미치는 기간은 줄이는 반면, 실제 행정처분이 내려진 기업에는 인증취소가 더 신속하게 이뤄지도록 손질했다.
기존에는 인증 심사 시점을 기준으로 5년 이전에 내려진 약사법·공정거래법상 행정처분을 결격사유에서 제외했다. 개편된 기준은 행정처분을 받은 때가 아니라 위반행위가 끝난 때를 기준으로 5년을 계산한다.
리베이트 행위가 끝난 뒤 조사와 처분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릴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오래된 위반행위가 혁신형 제약기업 인증에 영향을 주는 기간은 종전보다 짧아질 수 있다.
반대로 인증취소 절차는 빨라진다. 선행 행정처분에 대한 확정판결이 나온 뒤 인증을 취소하도록 한 규정을 없애고, 행정처분 단계에서 인증취소 절차를 진행할 수 있도록 바꿨다.
기업이 행정소송을 제기해 집행정지가 받아들여지는 등 소송 때문에 인증취소가 늦어지는 경우에 대비한 장치도 마련했다. 판결 확정 뒤 1년 이내에 혁신형 제약기업 인증을 취소할 수 있도록 해 소송이 길어지면서 제재가 사실상 무력화되는 것을 막겠다는 취지다.
리베이트 자체를 문제 삼는 기준은 유지한다. 두 차례 이상 행정처분을 받았거나 리베이트 제공액이 500만원 이상인 경우가 해당한다. 같은 위반행위에 대해 식약처와 공정거래위원회가 각각 처분하더라도 하나의 처분으로 계산한다. 2010년 리베이트 쌍벌제 도입 이전의 행위는 제외한다.
외국계는 별도 평가⋯한국 내 시설·협력 더 높게 본다
외국계 제약사 인증 방식도 지난 7월 개편됐다. 외국계 기업은 국내 제약사에 적용하는 기준과 별도의 외국계 제약사 기준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 신청할 수 있다.
외국계 기준에서는 한국에 연구·생산시설을 두거나 국내 기업과 협력하는 활동에 더 높은 점수를 준다. 연구·생산시설 배점은 국내 제약사 기준의 5점에서 8점으로, 제휴·협력 활동은 8점에서 14점으로 높였다.
반면 비임상·임상시험과 후보물질 개발은 12점에서 10점, 의약품 특허·기술이전 성과는 8점에서 3점, 해외진출은 12점에서 10점으로 낮췄다. 기술이나 특허를 해외 본사가 보유하는 경우가 많은 다국적 제약사의 구조를 감안하는 대신, 한국 내 시설 투자와 기업 간 협력을 더 평가하겠다는 의미다.
올해 하반기 혁신형 제약기업 신규 인증 신청은 지난달 18일부터 받고 있으며 오는 18일 마감한다. 심사를 거쳐 12월 제약산업육성·지원위원회에서 최종 확정·고시할 예정이다.
CSO 다단계 위탁도 손본다⋯11월까지 개선안 목표
민·관협의체가 다룰 대상은 혁신형 제약기업 인증제에 그치지 않는다.
의약품 판매위탁사(CSO)의 관리·감독과 이른바 ‘N차 위탁’ 통제를 강화하고, 판매업무를 맡긴 제약사의 책임을 높이는 방안도 논의한다. 제네릭 중심 제약사의 규모화·전문화와 수출기업 전환, 바이오신약·개량신약·천연물신약 개발 촉진도 대상이다.
인공지능(AI)을 활용한 신약개발과 의약품 제조혁신 역시 협의체 의제로 올렸다.
협의체는 원칙적으로 매달 한 차례 열되 필요하면 회의 주기를 단축한다. 복지부는 오는 11월까지 제약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한 종합적인 개선방안을 마련해 제약산업육성·지원위원회에 상정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형훈 복지부 제2차관은 “우리나라의 제약산업 현주소를 공유하고, 치열한 논의를 통해 향후 우리나라의 성장을 이끌어갈 제약산업의 육성·발전 방향이 마련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노연홍 한국제약바이오협회 회장은 “제약바이오 기업들이 제시한 의견이 충분히 반영돼 R&D와 제품 생산 등 제약바이오산업 생태계 전반에 걸쳐 발전하는 계기가 마련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