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09월 07일 (월)

“딸이 입을 오물거리면 먹을 때입니다”…40년 돌본 아버지의 판단

[호스피탈리스트 다이어리] #36 아는 만큼 보이는 것들

구글 검색 선호 출처로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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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 후반 여성, 폐렴. 입원 명단만 얼핏 보았을 때는 특별히 다른 점이 없어 보이는 환자였다. 하지만 30여 년에 걸친 병력을 차트에서 확인하는 순간, 평소 병동에서 만나던 환자와는 조금 다르다는 것을 직감했다.

환자는 드문 선천성 염색체 이상으로 신체적·정신적 발달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고, 의사소통도 거의 불가능했다. 성인이었지만 어린아이와 같은 작은 체구였다. 처음 마주한 순간에는 나도 모르게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지나온 시간이 결코 만만치 않았겠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 곁에는 칠순에 가까운 아버지가 있었다. 거친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인상에, 주변을 경계하듯 살피는 눈빛이었다. 오랜 병원 생활과 반복적인 입퇴원을 거치며 병원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아는 듯했다. 앞으로의 입원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는 딸이 며칠 전부터 밥을 잘 먹지 않아 응급실을 찾았다고 했다. 평소에는 본인이 먹여주면 잘 먹는데 이상하게 식사를 거부한다는 것이었다. 환자의 기저질환과 전신 상태를 고려하면 단순한 폐렴보다는 흡인성 폐렴의 가능성이 높았다. 우선 경구식이를 중단하고 주사 영양제를 투여하면서, 필요하다면 관을 통한 영양 공급도 고려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첫날에는 아버지도 동의했다.

하지만 다음 날 병동에서 마주한 아버지는 달랐다. 주사 영양제를 거부하고, 본인이 직접 딸에게 밥을 먹이겠다고 했다. 흡인성 폐렴이 의심되는 환자라면 일반적으로 연하검사를 통해 삼킴 기능을 평가하고, 그 결과에 따라 식이를 시작할 시점과 방법을 결정한다. 하지만 환자는 검사에 협조하기 어려웠다. 현재의 장애와 과거 병력을 고려하면 앞으로도 흡인이 반복될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비위관과 같은 대체 경로를 통한 영양 공급을 고려해야 했다.

그런데 아버지는 단호했다. 딸이 아기처럼 입을 오물거리며 혀를 움직이면, 그것이 먹을 준비가 되었다는 신호라는 것이었다. 의학적으로 객관화할 수 있는 기준은 아니었다. 솔직히 난감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주사 영양제를 중단하고 직접 먹이겠다고 완강하게 주장했다. 더 이상 설득만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순간이었다.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수십 년 동안 딸에게 밥을 먹이고, 표정을 살피고, 몸의 작은 변화를 알아차리며 살아온 사람이다. 40년 가까이 딸의 곁을 지켜온 아버지에게는, 내가 아직 보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을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딸에게 밥을 먹이기 시작했다. 의외로 식사는 순조롭게 진행됐다. 흡인으로 인한 특별한 문제도 없었고, 환자의 상태도 빠르게 호전되었다. 아버지와 나 사이에도 조금씩 신뢰가 쌓였다. 처음에는 고집스럽고 까다로운 보호자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누구보다 딸의 상태를 세심하게 살피고 작은 변화 하나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몇 년의 시간이 흘렀다. 입원전담전문의로 근무하는 동안 환자는 비슷한 이유로 여러 차례 내 앞에 입원했다.

“OO 씨가 또 식사를 안 하기 시작해서 오셨군요.”

“맞아요. 어디가 불편한지 또 밥을 잘 안 먹어서 데리고 왔어요.”

“그럼 일단 수액을 맞으면서 경구식이는 중단하고 살펴보겠습니다.”

“네. 맞아요. 그러려고 입원했어요.”

첫 만남 때와는 전혀 다른 대화였다. 더 이상 서로를 경계하거나 설득할 필요가 없었다. 이후 회진을 갈 때마다 환자의 얼굴을 살펴보니 아버지가 말하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환자가 입을 작게 오물거리고 있었다. 예전에는 그저 보호자가 말하는 ‘주관적인 신호’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여러 차례 환자를 만나고 지켜보면서, 나에게도 그 움직임이 하나의 신호로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는 오히려 내가 먼저 보호자에게 제안하기도 했다.

“오늘은 OO 씨가 입도 잘 움직이고 활발하시니, 식사를 한번 시작해보는 게 어떨까요?”

아버지는 무척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본인도 같은 생각이었다며 고맙다고 했다. 이번에도 환자는 식사를 잘했고, 무사히 퇴원했다. 10년 가까이 병동에서 입원전담의로 일하며 나는 이 환자와 아버지를 여러 번 만났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의 상태가 다시 나빠졌다. 이번에는 이전처럼 회복해서 퇴원할 수 없었다. 그녀는 병실에서 생을 마쳤다. 수십 년 동안 딸의 표정과 작은 움직임을 살피며 살아온 아버지는 마지막까지 곁을 지켰다. 나도 그 곁에 있었다.

돌이켜보면 처음의 나는 의학적 원칙과 객관적인 검사 결과를 기준으로 환자를 판단하려 했다. 그것이 의사로서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흡인의 위험이 높다면 식이를 중단하고, 연하 기능을 평가하고, 안전한 영양 공급 방법을 찾아야 한다. 하지만 환자를 오래 지켜보면서 알게 된 것이 있다. 의학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것만이 환자의 전부는 아니라는 것.

환자의 몸을 가장 오래 지켜본 사람에게는 검사 결과에는 담기지 않는 정보가 있을 수 있다. 특히 자신의 의사를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환자라면, 그 작은 표정과 움직임 하나가 중요한 의사소통이 되기도 한다. 물론 보호자의 경험이 언제나 의학적 판단보다 옳다는 뜻은 아니다. 의사는 위험을 판단하고, 필요한 검사를 시행하며, 치료의 근거를 지켜야 한다. 다만 그 원칙을 적용하는 과정에서, 환자를 오랜 시간 곁에서 돌본 사람이 알아낸 작은 신호까지 쉽게 배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나는 배웠다.

오늘도 나는 환자를 오래 지켜본 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려고 한다.

<편집자주>
입원전담전문의(호스피탈리스트)는 병동에 상주하며 가장 가까이에서 입원환자를 돌보는 의사를 말한다. 2016년 시범사업으로 시작된 입원전담의 제도는 2021년 본사업으로 전환되어 올해 꼭 10년을 맞는다.
‘호스피탈리스트 다이어리’는 이들이 병동에서 환자들을 만나고 치료하고 퇴원시키며 하루하루 쌓아가는 작은 순간들의 기록이다. 환자와 보호자, 다른 의료진, 그리고 입원전담의 자신에 대한 고백까지, 이 연재(주1회)를 통해 병원 안에서 겪는 ‘사람 사는 이야기’를 독자들과 나누고자 한다. 대한입원의학회 도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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