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의사 출신 수집가가 평생 모은 것은 의학 유물이 아니라 ‘종(鐘)’이었다.
경북대 의대 명예교수이자 대한핵의학회·대한갑상선학회 회장을 지낸 이재태 한국보건의료연구원장이 30여 년 동안 세계 각국에서 수집한 종은 1만여 점. 그 방대한 컬렉션을 바탕으로 펴낸 《세계의 종 이야기》는 종에 담긴 인류 문명의 역사를 들려주는 독특한 인문 교양서다.
평생 환자와 생명을 연구해 온 저자는 이번에는 종을 통해 인간의 삶을 들여다본다. 질병의 흔적을 읽듯 종에 새겨진 문양과 재질, 제작 기법, 시대적 배경을 하나하나 분석하며 그 안에 담긴 역사와 문화, 종교와 예술을 복원해낸다. 오랜 수집가를 넘어 연구자의 치밀함이 책 전체를 관통한다.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은 단순한 ‘종 이야기’가 아니라 ‘세계사’를 읽게 만든다는 점이다. 저자는 1991년부터 모은 컬렉션 가운데 역사·문화적 의미가 깊은 종을 골라 하나하나에 얽힌 시대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작은 탁상종 하나가 산업혁명과 제국주의, 세계대전, 여성 참정권 운동, 홀로코스트, 종교와 예술의 흐름까지 품고 있다.
종은 단순한 생활용품이 아니었다. 고대에는 신의 목소리를 전하는 신성한 매개였고, 왕권과 종교 권위를 상징하는 정치적 도구였다. 중세 유럽에서는 성당 종탑이 시간을 알리는 사회 인프라 역할을 했고, 산업혁명 이후에는 학교 수업과 공장 노동, 소방차와 구급차까지 시민의 일상을 움직이는 신호가 됐다. 인류의 문명 발전이 곧 종의 역사였다는 저자의 설명은 설득력을 얻는다.
종으로 살펴본 세계사
무엇보다 흥미로운 것은 종을 통해 읽는 세계 문화사다. 독일은 기계 기술과 디자인을 접목한 동물 모양 종을 만들었고, 프랑스는 소설 속 인물과 그리스 영웅을 형상화한 도자기 종을 유행시켰다. 1960, 70년대 제작된 저가의 인력 집약형 ‘메이드 인 코리아’ 도자기 종에는 수출 전사로 활약했던 노동자들의 땀과 눈물이 배어 있다. 전쟁터의 금속 파편을 녹이고 부대 문장을 붙여 만든 참호 예술품, 철십자훈장을 손잡이로 단 종, 교황 선출 기념 종 등은 시대가 예술품에 어떻게 새겨지는지 보여준다.
수집가만이 들려줄 수 있는 에피소드도 흥미롭다. 미국 경매에서 단순한 도자기 인형으로 잘못 소개된 독일 옥토버페스트 인물종의 진가를 알아보고 헐값에 낙찰 받은 이야기, 영화 ‘검은 사제들’과 ‘검은 수녀들’의 구마 의식 장면에 등장한 은제 종을 제작진에 협찬한 뒷이야기 등은 읽는 재미를 더한다.
저자는 “종소리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소통”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종은 사람을 불러 모으고, 시간을 공유하게 하며, 위험을 알리고,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게 했다. 종은 소리를 내는 금속이 아니라 공동체를 이어주는 언어였던 셈이다.
의사의 눈은 이 책에서도 빛난다. 저자는 종을 단순한 골동품이 아니라 시대를 진단하는 ‘증거’로 바라본다. 병의 원인을 추적하듯 종 하나하나의 제작 배경과 역사적 맥락을 치밀하게 추적하고, 개별 유물을 인류 문명이라는 큰 흐름 속에 위치시킨다. 그래서 이 책은 단순한 수집기가 아니라 의학자의 관찰력과 역사학자의 탐구심이 만난 인문학적 기록으로 읽힌다.
《세계의 종 이야기》는 《종소리, 세상을 바꾸다》와 《종소리가 좋다》에 이은 저자의 세 번째 종 이야기다. 학이사 출간. 288쪽. 2만8000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