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의대를 마치고 인턴을 거쳐 전공의로 처음 들어가면 ‘100일 당직’이라는 통과의례가 당연하던 시절이 있었다. 불과 10~20년 전의 얘기다. 처음 주치의가 되어 밤낮없이 병동 환자를 지키며 몸으로 일을 익히는 도제식 교육 시스템이었다. 연애도 가정도 포기한 채 ‘병원귀신’이 돼야 수련을 마치고 전문의가 될 수 있었던 의사들은 아직도 ‘라떼는 말이야’식 무용담을 자주 얘기한다.
2017년 ‘전공의의 수련환경 개선 및 지위 향상을 위한 법률(일명 전공의 특별법)’이 시행되면서 전공의 근무는 주당 80시간으로 제한되고, 연속근무도 36시간을 넘을 수 없게 됐다. 휴게시간, 휴일, 교육시간도 보장됐다. 과도한 노동에 시달리지 않고 제대로 교육받고 성장할 수 있게 하자는 것이었다.
제도 시행 8년이 지난 지금, 전공의 수련환경은 나아졌을까.
근무시간은 줄었지만 전공의 한 명이 돌보는 병동환자 수는 오히려 늘었다. 첨단 의료기술이 크게 발전하면서 환자와 보호자의 기대수준도 높아졌다. 배워야 할 의학지식은 산더미처럼 늘어가는데 병동 업무에 치여 형식적인 수련에 그칠 때가 많다. 환자안전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진료 일선에 투입되는 젊은 의사들은 의료사고의 위험 때문에 늘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내과나 외과 등 필수 진료과에 대한 기피 현상이 심해지고 아예 수련 포기를 고민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법은 생겼지만, 의료 현장의 구조는 과거 그대로다. 작년 의정사태 이후 병원을 떠났던 전공의들이 돌아오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다.
최근 새 정부가 전공의 복귀 문제 해결에 적극 나서면서 전공의들도 수련환경 개선, 의료사고에 대한 법적 부담 완화 등을 복귀 조건으로 대화 가능성을 열어두겠다는 소식이 들린다. 무척 다행이지만 현 상황에서 이런 요구 조건을 만족시켜 복귀를 유도하기는 쉽지 않다.
전공의에게 교육의 시간을 되돌려주고, 환자안전과 진료의 질을 함께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전문의 중심병원’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입원환자 만을 돌보는 입원전담 전문의(호스피탈리스트) 제도는 그 핵심 열쇠다.
정부는 이미 2016년 입원전담 전문의 제도를 도입하고 2021년 정규사업으로 전환했다. 제도 도입 당시 ‘입원전담 전문의 = 전공의 대체인력’이라는 비아냥도 있었지만, 이는 사실 과거 ‘교육’이라는 명분 하에 전문의들이 해야 할 일을 과도하게 전공의들에게 떠맡겨 왔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입원전담 전문의가 입원환자를 집중 관리하고 전공의는 필수 환자 증례를 맡아 배움에 매진하도록 하는 ‘전문의 중심병원’이 아니고서는 전공의 수련환경 개선은 요원하다.
미국이나 일본 등 의료선진국에서는 호스피탈리스트가 병동 진료의 질과 안전을 책임지고, 전공의 교육을 이끄는 중간 교사(middle educator)의 역할을 한다. 특히 미국 수련병원에서는 호스피탈리스트가 전공의 지도전문의가 되어 함께 회진을 돌며 입원 환자의 진단과 치료계획을 교육한다. 전공의는 여기서 실질적인 임상 판단력과 의사소통 능력을 배운다. 전공의가 과도한 업무에 시달리지 않도록 조율하는 것도 호스피탈리스트의 중요 업무다.
우리도 입원전담 전문의 제도가 간신히 정착하는가 싶더니 오히려 거꾸로 가고 있다. 보건복지부가 작년 상급종합병원 지정·평가 기준에서 입원전담전문의 배치 여부항목을 뺐기 때문이다. 전문의를 구하기가 어렵다는 이유에서다. 그리고 전공의 빈자리는 전담간호사나 행정지원 인력으로 대체하겠다는 움직임이다.
한국의 대형병원들은 의료기술 면에서 세계적인 수준에 올랐다. 하지만 병동환자 진료나 의료안전, 전공의 양성 면에서도 수준이 높다고 말할 수 있을까? 진정한 의료선진국은 ‘누가 진료하느냐’가 아니라 ‘누가, 어떻게 교육받고 있느냐’로 평가된다.
전공의 수련환경 개선은 단순히 복지 향상의 문제가 아니다. 미래 한국 의료의 지속적인 발전 가능성을 위한 투자다. 전공의들이 안전하고 충실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시스템을 마련하는데 입원전담 전문의들이 힘을 보태고자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