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의 부조리를 뛰어넘는 뜨거운 반항적 행위, 부단한 행동 속에서만 인간은 인간을 찾을 수 있다.” — 알베르 카뮈
어느 겨울, 밤새 혈압이 떨어진 환자의 병실에 들어갔다. 창밖이 조금씩 밝아오고 있었지만 병실 안은 아직 밤에 머물러 있었다. 모니터의 알람은 쉼 없이 울려 댔고, 보호자는 침대 곁에서 환자의 손을 감싸 쥐고 있었다. 나는 청진기를 가슴에 대고 호흡음을 들었다. 할 수 있는 치료와 더는 할 수 없는 치료 사이의 경계가 희미해지는 순간이었다.
“선생님, 좋아질 수 있을까요?”
병동에서 가장 어려운 질문은 의학 지식을 묻는 질문이 아니다. 미래를 약속해 달라는 질문이다. 의사는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모든 환자의 회복을 장담할 수는 없다. 나는 잠시 숨을 고른 뒤 지금의 상태와 가능한 치료, 앞으로 맞닥뜨릴 수 있는 상황을 설명했다. 마지막에는 이렇게 덧붙였다.
“어떤 순간에도 환자분을 혼자 두지는 않겠습니다.”
병동은 만남과 이별이 쉬지 않고 교차하는 곳이다. 누군가는 치료를 마치고 밝은 인사와 함께 퇴원하고, 누군가는 더 집중적인 치료를 위해 중환자실로 옮겨가며, 누군가는 생의 마지막을 맞이한다. 결과는 서로 다르지만 모든 만남의 끝에는 이별이 있다. 병동의 의사는 헤어질 것을 알면서도 관계를 시작하는 사람이다.
이 사실은 때때로 의사를 허무하게 만든다. 최선의 약을 투여하고 밤새 환자 상태를 지켜도 생명은 기대를 저버릴 때가 있다. 같은 병을 앓아도 어떤 사람은 회복하고 어떤 사람은 떠난다. 선하게 살아온 사람에게도 병은 찾아오고, 때로는 가족에게 작별할 시간조차 충분히 주어지지 않을 때가 있다. 인간은 세계에서 질서와 이유를 찾으려 하지만, 세계는 종종 침묵한다. 카뮈가 말한 부조리는 바로 그 간극에서 생겨난다.
알베르 카뮈의 소설 『페스트』에서 의사 리외는 전염병이 휩쓴 도시 오랑을 떠나지 않고 환자들을 돌본다. 누군가 그의 행동에서 영웅주의를 보려 하자 그는 거창한 희생으로 포장하기를 거부한다.
“페스트와 싸우는 유일한 방법은 성실성이다.”
그리고 그 성실성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리외는 자신의 직분을 다하는 것이라고 답한다. 번역본에 따라 이 말은 ‘성실성’, ‘정직함’, 또는 ‘인간으로서의 상식적인 도리’로 옮겨진다. 표현은 달라도 뜻은 같다. 세상을 구하겠다는 영웅적 선언보다, 눈앞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오늘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 먼저라는 뜻이다.
『페스트』는 부조리를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현실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묻는 소설이다. 리외는 전염병을 막을 수 없고 결국 많은 환자가 죽는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는 의사로서 자신의 직분을 묵묵히 수행한다. 죽음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보다 중요한 것은, 부조리 앞에서도 책임을 포기하지 않는 태도이기 때문이다.
그 문구를 읽을 때마다 병동의 아침이 떠오른다. 간밤의 열을 확인하고, 바뀐 검사 수치를 살피고, 통증이 조절되는지 다시 묻는 일. 불안한 보호자에게 같은 설명을 여러 번 반복하고, 치료의 목표가 달라져야 할 때는 그 사실을 피하지 않고 말하는 일. 죽음을 완전히 물리칠 수는 없더라도 고통을 덜고, 두려움 속에 있는 사람 곁에 머무는 일. 병동에서 부조리에 맞서는 방식은 대개 이처럼 작고 반복적이다.
그런 점에서 입원전담전문의의 하루는 끊임없이 산 위로 바위를 밀어 올리는 시지프의 노동을 닮았다. 한 환자의 상태가 겨우 안정되면 다른 환자의 혈압이 떨어지고, 한 사람을 퇴원시키면 새로운 환자가 빈 침대를 채운다. 바위는 정상에 머물지 않고 다시 굴러 내려온다.
그러나 카뮈는 시지프에게서 단순한 절망만을 보지 않았다. 피할 수 없는 운명을 똑바로 바라보면서도 다시 바위를 밀어 올리는 태도, 결과가 보장되지 않아도 굴복하지 않는 의식에서 인간의 존엄을 보았다.
의료에서 그 반항은 죽음을 부정하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마지막까지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는 일이다. 환자의 이름을 불러주고, 통증을 덜어주고, 가족과 작별할 시간을 마련하고, 더 이상의 치료가 도움이 되지 않을 때는 편안함을 새로운 목표로 삼는 일이다. 반드시 병을 이겨야만 의사와 환자의 만남이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때로 치료의 의미는 생명을 얼마나 연장했는지가 아니라, 남은 시간을 얼마나 덜 외롭고 덜 고통스럽게 만들었는지에 있다.
그날 아침, 환자는 끝내 회복하지 못했다. 가족들은 침대 곁에 모여 손을 잡았고, 의료진은 환자가 고통스럽지 않도록 약을 조절했다. 모니터의 숫자가 멈춘 뒤 병실에는 긴 침묵이 찾아왔다. 나는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문밖으로 나왔다. 곧 다른 병실에서 호출이 울렸다.
죽음은 우리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오만을 무너뜨린다. 그러나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체념까지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삶이 유한하다고 해서 삶이 무의미하지 않듯, 이별이 예정되어 있다고 해서 만남이 헛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끝이 있기 때문에 지금 곁에 있는 사람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가 더 중요해진다. 실존의 의미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유한한 조건 속에서 우리가 선택하고 책임지는 태도를 통해 만들어진다.
오늘도 병동에는 새로운 환자가 들어오고 누군가는 짐을 싼다. 나는 또 하나의 이별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면서 병실 문을 연다. 기적을 약속할 수는 없지만, 성실함은 약속할 수 있다. 완벽한 회복을 보장할 수는 없지만, 고통을 외면하지 않겠다고 말할 수 있다. 어쩌면 그것이 끝을 알면서도 다시 병실 문을 여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인간적인 반항일 것이다.

<편집자주>
입원전담전문의(호스피탈리스트)는 병동에 상주하며 가장 가까이에서 입원환자를 돌보는 의사를 말한다. 2016년 시범사업으로 시작된 입원전담의 제도는 2021년 본사업으로 전환되어 올해 꼭 10년을 맞는다.
‘호스피탈리스트 다이어리’는 이들이 병동에서 환자들을 만나고 치료하고 퇴원시키며 하루하루 쌓아가는 작은 순간들의 기록이다. 환자와 보호자, 다른 의료진, 그리고 입원전담의 자신에 대한 고백까지, 이 연재(주1회)를 통해 병원 안에서 겪는 ‘사람 사는 이야기’를 독자들과 나누고자 한다. 대한입원의학회 도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