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이성 췌장암 환자의 생존기간을 기존 항암제보다 크게 늘린 먹는 신약이 미국에서 허가됐다.
미국 식품의약국(FDA)은 26일(현지시간) 미국 바이오기업 레볼루션 메디슨이 개발한 ‘라손크(RASONQUE·성분명 다락손라십)’를 전이성 췌장선암 치료제로 승인했다. 하루 한 번 먹는 표적항암제이다.
이 약이 겨냥하는 것은 ‘RAS’다. RSA는 세포의 성장 신호를 조절하는 단백질 계열로, 암을 일으키는 변이가 생기면 성장 신호가 계속 켜진 상태가 될 수 있다.
RAS 표적치료제는 이렇게 비정상적으로 이어지는 신호를 차단해 암세포 증식을 막는다.
FDA에 따르면 전이성 췌장암에서 새로운 계열의 RAS 표적치료제가 허가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전에 한 차례 이상 전신 항암치료를 받은 성인 환자가 사용할 수 있다. 여러 항암제를 함께 쓰는 치료를 받기 어려운 환자도 대상이다. 권장 용량은 하루 300㎎이다.
전이성 췌장암 500명 3상서 효과 확인
FDA는 글로벌 임상 3상 ‘RASolute 302’ 결과를 토대로 허가를 결정했다. 전이성 췌장암 환자에게 다락손라십과 기존 항암화학요법을 각각 투여해 치료 효과를 비교한 연구다.
참가자는 이전 치료 뒤 암이 진행한 환자 500명이다. 248명은 다락손라십을, 252명은 기존 항암화학요법을 받았다.
차이는 컸다. 전체생존기간 중앙값은 다락손라십군 13.2개월, 기존 항암제군 6.7개월이었다. 중앙값은 환자의 절반이 그 시점까지 살아 있었다는 뜻이다.
사망위험은 다락손라십군이 기존 항암제군보다 60% 낮았다. 위험비(HR)는 0.40이었다.
암이 악화되지 않고 버틴 기간도 두 배 수준이었다. 무진행생존기간 중앙값은 다락손라십군 7.2개월, 기존 항암제군 3.6개월이었다. 종양 크기가 일정 기준 이상 줄어든 환자 비율도 각각 30%와 11%를 기록했다.
연구 결과는 지난 5월 미국임상종양학회(ASCO) 연례학술대회에서 공개됐고, 국제학술지 《뉴잉글랜드저널오브메디슨(The New England Journal of Medicine)》에도 발표됐다.
췌장암 10명 중 9명서 변이⋯RAS가 뭐길래
RAS는 하나의 단백질이 아니다. KRAS·NRAS·HRAS 등 여러 단백질을 묶어 부르는 이름이다.
췌장암에서는 이 가운데 KRAS 변이가 가장 흔하다. KRAS 유전자에 변이가 생기면 세포에 보내는 성장 신호가 잘 꺼지지 않는다. 세포가 계속 증식하면서 암이 자랄 수 있다.
췌장관선암에서는 RAS 변이가 90%가 넘는 환자에게서 발견된다. 이번 RASolute 302 임상에서도 참가자의 91.8%가 RAS G12 변이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RAS는 오랫동안 약으로 잡기 어려운 표적으로 꼽혀왔다.
일반적인 표적항암제는 단백질의 특정 부위에 달라붙어 기능을 막는다. 그런데 RAS에는 약물이 안정적으로 붙을 만한 자리가 마땅치 않다.

이를 고려해 다락손라십은 다른 단백질의 도움을 받는다.
먼저 세포 안에 있는 ‘사이클로필린 A’와 결합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결합체가 활성화된 RAS에 달라붙는다. 그 결과 암 성장을 촉진하는 신호가 다음 단계로 이어지는 것을 막는다.
한 종류의 RAS 변이만 겨냥하지 않는 것도 특징이다. 여러 형태의 활성화된 RAS를 폭넓게 억제하도록 개발됐다.
특정 RAS 변이 없어도 사용할 수 있어
이번 FDA 허가에서 또 눈에 띄는 점이 있다. 특정 RAS 변이가 확인된 환자로 사용 대상을 좁히지 않았다는 것이다.
FDA는 허가 조건에 특정 RAS 변이 확인을 넣지 않았다. 이전 치료 여부 등 다른 기준을 충족하면 RAS 변이 검사 결과와 관계없이 사용할 수 있다.
특정 유전자 변이를 미리 확인하는 별도의 동반진단검사도 필요하지 않다. 특정 KRAS 변이가 있는 환자에게만 사용하는 일부 RAS 표적치료제와 다른 점이다.
물론 이번 승인이 췌장암을 완치할 수 있는 치료법이 나왔다는 뜻은 아니다.
13.2개월은 모든 환자가 그만큼 산다는 의미가 아니라 전체생존기간의 중앙값이다. 치료 뒤 시간이 지나 암이 다시 진행한 환자도 있었다.
'KRAS G12D' 겨냥 후속 신약도 3상
다락손라십에 이어 다른 RAS 표적 신약들도 췌장암 3상에 들어갔다.
주목받는 표적은 ‘KRAS G12D’다. KRAS 변이 가운데 췌장암에서 특히 흔한 유형으로, 췌장관선암 환자의 약 40%에서 발견된다. 아직 이 변이를 직접 겨냥해 허가받은 치료제는 없다.
레볼루션 메디슨이 개발 중인 졸돈라십(zoldonrasib)은 KRAS G12D를 선택적으로 겨냥하는 먹는 표적치료제다.
현재 치료를 시작하지 않은 전이성 KRAS G12D 췌장암 환자 670명을 대상으로 글로벌 3상 ‘RASolute 305’를 진행하고 있다. 졸돈라십에 기존 항암화학요법을 함께 쓴 환자와 항암화학요법만 받은 환자의 치료 결과를 비교한다.
앞선 1·2상에서는 졸돈라십을 변형 폴피리녹스(mFOLFIRINOX)와 함께 썼을 때 객관적반응률이 82%에 달했다. 젬시타빈·냅파클리탁셀과 병용한 환자에서는 61%를 기록했다.
객관적반응률은 종양 크기가 일정 기준 이상 줄어든 환자의 비율을 말한다. 다만 아직 환자 수가 적은 초기 임상 결과다. 실제 생존기간을 얼마나 늘릴지는 3상에서 확인해야 한다.
일본 아스텔라스제약의 세티데그라십(setidegrasib·ASP3082)도 KRAS G12D를 노린다.
아스텔라스는 지난 4월 전이성 췌장암 3상에서 첫 환자 투약을 시작했다고 밝혔다. 총 614명을 대상으로 기존 항암화학요법에 세티데그라십을 더했을 때 생존기간이 더 늘어나는지 살핀다.
졸돈라십과는 작용 방식이 다르다. 세티데그라십은 KRAS G12D 단백질의 기능만 막지 않는다. 세포 안의 단백질 처리 장치를 이용해 변이 단백질 자체가 분해되도록 유도한다.
초기 임상에서는 세티데그라십과 변형 폴피리녹스를 함께 투여한 평가 가능 환자 12명 가운데 7명(58.3%)의 종양 크기가 일정 기준 이상 줄었다.
역시 아직 소규모 초기 결과다. 3상에서 같은 효과가 재현되는지를 지켜봐야 한다.
세 약의 개발 단계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다락손라십은 이미 3상에서 생존기간 연장을 확인하고 FDA 허가까지 받았다. 졸돈라십과 세티데그라십은 아직 효과와 안전성을 확인하는 임상시험 단계다.
효과만큼 부작용도 살펴야
물론 다락손라십은 부작용도 적지 않았다.
3상에서 3등급 이상 이상반응은 다락손라십군의 61.8%, 기존 항암제군의 69.6%에서 나타났다. 치료 관련 부작용 때문에 약을 완전히 끊은 비율은 각각 1.2%와 11.2%였다.
흔한 부작용으로는 발진, 설사, 구내염, 메스꺼움, 피로, 구토, 복통, 부종, 식욕 감소 등이 보고됐다.
FDA 허가정보에는 피부·연조직 이상, 구강질환, 설사, 위장관 천공, 간질성 폐질환·폐렴 등에 대한 경고와 주의사항도 담겼다.
한국에서도 췌장암은 대표적 난치암
한국에서도 췌장암은 치료 성적이 좋지 않은 암이다.
중앙암등록본부에 따르면 2023년 새로 발생한 췌장암은 9748건으로 전체 암 가운데 8번째로 많았다. 2019~2023년 5년 상대생존율은 17.0%였다.
더 큰 문제는 늦게 발견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진단 당시 이미 다른 장기로 멀리 퍼진 환자가 43.3%에 달했다. 이 단계의 5년 상대생존율은 2.4%에 그쳤다.
전이성 췌장암은 쓸 수 있는 치료법이 제한적이다. 이런 상황에서 다락손라십이 3상에서 생존기간을 크게 늘리고 FDA 허가까지 받았다. 뒤이어 KRAS G12D를 더 정밀하게 겨냥한 신약들도 3상 시험에 들어갔다.
수십 년 동안 ‘약으로 잡기 어렵다’던 RAS가 췌장암 치료의 실제 표적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이다. 다만 한국에서 실제 치료제로 쓰려면 식품의약품안전처의 별도 허가를 받아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