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술이 잘 끝났다. 항암치료도 무사히 마쳤다. 그런데 몇 년이 흐른 뒤 암이 다시 나타난다. 왜 한참 지나서 찾아올까.
재발을 설명하는 요인 중 하나가 '잠든 암세포'다. 일부 암세포는 치료 과정에서 분열을 거의 멈춘 채 살아남는다. 이같은 휴면 상태를 조절할 새로운 실마리가 나왔다. 스위스 취리히연방공대(ETH Zurich) 연구팀은 일부 폐암세포의 휴면 신호를 조절하는 분자 스위치를 개발했다. 이 스위치는 빛의 파장에 따라 켜지고 꺼진다.
휴면 암세포는 어떻게 치료를 피할까
몸이 스트레스를 받으면 그 신호는 일부 암세포에도 전달된다. 일부 폐암세포는 스트레스호르몬의 영향을 받아 분열을 거의 멈춘 휴면 상태에 들어갈 수 있다.
세포 안에서 이 호르몬 신호를 받아들이는 단백질이 당질코르티코이드 수용체이다. 코르티솔 같은 스트레스호르몬을 감지해 염증 반응을 조절하는 단백질로, 몸살이나 알레르기로 처방받는 스테로이드제도 이 수용체를 통해 작용한다.
세포 분열이 느려지면 빠르게 나뉘는 세포를 겨냥한 일부 항암치료의 효과가 떨어질 수 있다. 치료를 견디고 살아남은 세포가 나중에 다시 증식하면 재발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다. 휴면 암세포가 치료 저항성과 재발을 일으키는 요인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이유다.
그렇다면 간단한 해법이 하나 떠오른다. 이 수용체부터 아예 없애버리면 되지 않을까.
말처럼 쉽지 않다. 당질코르티코이드 수용체는 몸속 여러 조직에 널리 분포하며, 염증을 가라앉히고 면역을 조절하는 데도 관여한다. 전신에서 이 수용체를 분해하면 정상조직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 따라서 종양 안에서는 수용체를 분해하고, 주변 정상조직에서는 작용을 멈추게 할 방법이 필요했다.

빛의 파장 따라 켜지고 꺼지는 스위치
연구팀은 세포가 원래 갖고 있는 단백질 처리 장치를 이용했다. 세포 안에는 필요 없거나 손상된 단백질에 '폐기 표지'를 붙인 뒤 분해하는 시스템이 있다.
연구팀이 만든 물질은 세 부분으로 이뤄진다. 한쪽은 당질코르티코이드 수용체를 붙잡는다. 다른 한쪽은 단백질에 폐기 표지를 붙이는 효소를 불러온다. 두 부분의 가운데에는 빛을 받으면 모양이 바뀌는 연결 고리가 놓인다.
연결 고리가 펴진 활성형에서는 수용체와 효소가 알맞은 거리에 놓인다. 효소가 수용체에 폐기 표지를 붙이면 세포가 이를 분해한다. 특정 파장의 빛을 비추면 연결 고리가 접힌 비활성형으로 바뀐다. 이리 되면 두 부분의 거리가 벌어져 수용체를 분해하지 못한다. 빛의 파장을 바꾸면 다시 활성형으로 되돌릴 수도 있다.
연구팀이 제시한 종양 적용 구상은 이렇다. 활성형 물질을 종양에 주사한 뒤 종양 주변 정상조직에 특정 파장의 빛을 비춘다. 종양 밖으로 퍼지는 물질은 꺼지고, 종양 안에 남은 물질은 수용체를 계속 분해하게 한다.
아직 동물이나 사람에게 시험한 방법은 아니다. 공동 제1저자인 로빈 슈오이플라인 취리히연방공대 박사과정 연구원은 "기존 의료기술을 바탕으로 한 만큼 국소치료로 발전할 현실적인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세포실험서 확인…다음 관문은 동물실험
그렇다면 실제로 통했을까. 연구팀은 실험실에서 배양한 폐암세포에 이 물질을 넣어봤다. 수용체가 빠르게 사라졌다. 유전자 활동도 들여다봤다. GR이 유도해온 휴면 관련 유전자 발현 프로그램마저 흐트러졌다.
물론 아직 넘어야 할 산이 있다. 지금은 배양세포 실험 단계일 뿐이다. 동물의 종양에서도 같은 효과가 나타나는지는 확인하지 않았다. 슈오이플라인 연구원도 "이제 살아있는 생물체에서 검증할 차례"라고 밝혔다.
현재 사용한 빛이 조직을 몇 밀리미터 정도만 통과한다는 한계도 있다. 연구팀은 폐암처럼 내시경으로 광원을 종양 가까이 가져갈 수 있는 부위에 적용할 가능성을 제시했다. 앞으로 근적외선에 반응하는 스위치도 개발할 계획이다.
연구팀은 표적을 바꾸면 다른 암으로도 넓힐 수 있다고 내다봤다. 유방암의 에스트로겐 수용체나 전립선암의 안드로겐 수용체에도 같은 원리를 적용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한편 이번 연구 결과는 지난 5월 21일 국제학술지 《미국국립과학원회보(PNAS)》 온라인판에 실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