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뇌전증은 발작만 조절하면 되는 병이라고 흔히들 생각한다. 그런데 발작을 다스리는 동안 뇌 속에서는 다른 신호가 감지되고 있었다.
치매 진단을 받은 적 없고 스스로 느끼는 기억력 저하도 없는 환자들인데, 뇌를 들여다보니 치매와 관련된 타우 단백질의 신호가 남들보다 높게 나타났다. 서울대병원은 뇌전증 환자를 대상으로 실시한 이같은 연구 결과를 3일 발표했다.
서울대병원 신경과 이상건·주건 교수, 핵의학과 최홍윤 교수 연구팀(제1저자 임상유전체의학과 홍상빈 임상강사, 중환자의학과 신용원 교수)은 치매 진단이나 주관적 기억 저하가 없는 뇌전증 환자 75명과 건강한 대조군 47명을 대상으로 혈액·뇌파 등을 분석했다.
이 가운데 일부 참가자에게는 PET(양전자방출단층촬영)를 시행해 뇌의 타우 관련 추적자 신호를 살펴봤다. PET는 방사성 추적자가 뇌의 어느 부위에 얼마나 분포하는지를 영상으로 보여줘 특정 단백질과 관련된 변화를 추정하는 검사다. 이번 연구에 쓰인 방사성 추적자는 '플로르타우시피르(flortaucipir)'로, 타우 단백질에 달라붙는 성질을 이용해 신호를 포착한다.
발작만 있고 기억은 멀쩡한데, 뇌에선 무슨 일이
타우는 원래 뇌세포 안에서 뼈대처럼 세포 모양을 잡아주는 단백질이다. 인산이 붙었다 떨어지는 과정도 정상적인 생리 현상 중 하나다.
그런데 타우에 인산이 지나치게 많이 붙어 비정상적으로 엉기면 실뭉치처럼 꼬인 '신경섬유 매듭'을 만든다. 이는 신경세포의 기능을 떨어뜨리고 손상을 일으키는 데 관여한다. 타우의 비정상적 인산화는 알츠하이머병을 비롯한 여러 신경퇴행질환에서 공통으로 나타나는 주요 병리 변화로 꼽힌다.
뇌전증과 치매, 지금까지는 서로 다른 질환으로 여겨져 왔다. 그런데 최근 동물 실험과 환자 뇌 조직 분석에서 심상찮은 단서가 나왔다. 뇌전증이 타우 축적을 촉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치매가 없는 뇌전증 환자에게도 실제로 타우 신호가 높아지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이번 조사 결과 뇌전증 환자군은 대뇌 피질(뇌 표면을 감싸는 주름진 부위) 전반에서 타우 PET 신호가 대조군보다 뚜렷하게 높았다. 혈액 검사에서도 비슷한 흐름이 나타났다. 타우 단백질의 217번 아미노산 부위가 인산화된 형태를 측정하는 혈장 'p-tau217(인산화 타우217)' 수치를 살펴본 결과, 연구팀이 적용한 기준치를 넘은 비율은 대조군 5%, 뇌전증 환자군 24%였다.
그렇다면 이건 그냥 초기 알츠하이머병 아닐까. 연구팀이 확인한 결과는 이를 단순하게 뒷받침하지 않았다. 알츠하이머병은 타우와 함께 '아밀로이드'라는 단백질도 쌓이는 게 특징인데, 이 아밀로이드 PET 신호는 두 그룹 사이에 유의한 차이가 없었다. 타우 PET 신호가 나타난 뇌 부위의 분포도 전형적인 알츠하이머병과는 달랐다.
연구팀은 이번 타우 신호가 알츠하이머병 때문이라기보다 뇌전증과 관련된 별개의 변화일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다만 이번 연구만으로 알츠하이머병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거나, 뇌전증이 타우 축적을 직접 일으켰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연구 결과는 국제 학술지 《브레인(Brain)》 온라인판에 게재됐다.
타우 신호, 어떤 뇌전증 환자에서 더 높았나
연구팀이 추가로 살펴본 결과에서는 뇌파 이상이나 지속적인 발작 활동 등 질병 부담이 큰 임상 특징을 보인 환자에게서 타우 신호가 높은 경향이 나타났다.
뇌파 검사를 하면 발작과 관련된 비정상 전기 신호가 잡힌다. 이 신호가 뇌 여러 부위에서 각각 독립적으로 나타나는 경우를 '다초점 뇌전증모양 방전'이라 부른다. 이런 환자에서 타우 신호가 가장 높은 경향을 보였다. 다른 변수를 걸러내고 봐도 이 경향은 유지됐다. 뇌파가 전반적으로 느려진 환자나 청소년기에도 발작이 지속된 환자에게서 타우 신호가 높은 경향이 나타났다.
한쪽 뇌에서만 발작이 시작되는 환자는 그쪽 뇌에서 타우 신호가 더 높은 경향을 보였다. 뇌염을 앓은 뒤 뇌전증이 생긴 환자는 타우 신호가 가장 높았다. 염증이 타우 축적을 부추기는 요인일 수 있다는 뜻으로 연구팀은 풀이했다.
뇌 밖에서도 나타난 '전신 노화' 관련 신호
연구팀은 혈액 속 수많은 단백질을 한꺼번에 분석해 'OrganAge'라는 알고리즘으로 장기별 생물학적 나이(실제 나이와 별개로, 혈액 속 단백질 패턴을 기준으로 추정한 나이)도 계산해봤다. 그 결과 뇌전증 환자는 뇌·심장·근육·췌장 등 여러 장기에서 생물학적 노화 가속 추정치가 확인됐다. 이 가운데 추정된 뇌 나이와 실제 나이의 차이인 '뇌 나이 격차'가 타우 신호와 가장 강하게 연관됐다.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세포 안에서 에너지를 만드는 소기관인 미토콘드리아와 관련된 단백질이 타우 신호가 높은 환자일수록 늘어나 있었다. 세포를 공격하는 활성산소가 늘어나는 상태인 '산화 스트레스' 관련 단백질도 함께 늘었다. 반면 손상 물질을 처리하고 염증 반응을 조절하는 소교세포와 관련된 일부 단백질, 면역세포 동원에 관여하는 일부 단백질은 타우 신호와 반대 방향의 연관성을 보였다. 뇌전증 환자에게서 나타난 타우 신호는 에너지 대사·산화 스트레스뿐 아니라, 뇌를 청소하고 지키는 면역 시스템의 변화와도 함께 나타난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이상건 교수(신경과)는 "치매 증상이 없는 뇌전증 환자에서 타우 관련 PET 신호가 예상보다 뚜렷하게 나타난 점이 인상적이었다"며 "타우 PET이 향후 뇌전증 환자의 치매 위험과 뇌 퇴행성 변화를 평가하는 도구로 활용될 수 있을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주건 교수(신경과)는 "뇌전증이 단순한 발작 질환을 넘어 뇌 단백질 변화, 나아가 전신 노화와도 연결되어 있음을 실제 환자의 뇌 영상과 혈액 분석으로 확인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고 말했다.
연구팀은 이번 결과가 타우 PET이나 혈액 검사를 뇌전증 환자의 뇌 건강 연구에 활용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했다고 봤다. 다만 이런 검사를 뇌전증 환자의 일상 진료에 바로 적용할 단계는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알츠하이머병을 겨냥해 개발 중인 항타우 치료제 역시, 뇌전증에도 적용할 수 있을지는 앞으로 연구해볼 만한 치료 표적으로 제시된 수준이다. 뇌전증이 있다고 해서 곧 알츠하이머병으로 이어진다는 뜻은 아니라는 점도 연구팀은 언급했다. 정확한 인과관계를 밝히려면 여러 병원이 함께 참여하는 대규모 장기 추적 연구가 필요하다는 설명이다.
앞으로는 이러한 타우 신호가 장기적으로 인지기능 저하나 치매 위험과 연결되는지 확인하는 추적 연구가 필요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