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인은 외국에 나가면 애국자가 된다는 말이 있다. 미국, 유럽 등 선진국에서 보이는 삼성전자, LG전자, 현대자동차의 광고판을 보면 ’한국이 최고’라는 자부심이 넘친다. 미국의 유명 방송에서도 한국산 제품 광고가 자주 나온다. K뮤직, K드라마에 이어 K가전으로 부를 정도다. 미국에서 오래 거주한 동포들도 이제 가슴을 펴고 다닌다. 세계 10대 경제 강국이라는 말을 실감한다. 한국 기업 입사를 위해 열심히 공부하는 미국 학생들도 적지 않다.
삼성, LG 등 한국 기업들이 올 상반기(1∼6월) 미국 주방가전 합산 점유율에서 34.9%를 기록, 미국의 GE와 월풀을 합한 33.7%를 제치고 1위에 올랐다는 조사 결과(트랙라인 자료)가 나왔다. 현대자동차그룹은 미국 시장에서 포드(미국)를 제치고 3분기 판매 기준으로 제너럴모터스(GM)와 도요타자동차에 이어 3위에 오를 것이라는 전망도 나왔다. 이는 CNBC 방송과 블룸버그 통신이 24일 보도한 것으로 현대차와 기아, 제네시스 인도분을 모두 합산한 것이다.
삼성, LG, 현대자동차 뿐만 아니라 SK 등 한국 제조 업체들의 성장이 눈부시다. 이들 기업의 재도약에는 이공계 인재들이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공대와 기초과학 출신 사원들이 기획-설계, 제조한 제품들이 세계인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이다. 장기간 지속된 ‘이공계 위기’를 보란 듯이 돌파한 것이 더욱 놀랍다. 고교 이과 우등생들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인 의대 열풍에도 불구, ‘공돌이’들이 똘똘 뭉쳐 글로벌 기업을 이끌어 간 것이다. 공돌이는 공대를 다니는 남자 학생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지만, 공대생의 자부심도 녹아 있다.
공대, 기초과학 입학 성적 의대 앞섰는데…
1998년 IMF 외환위기 이전까진 공대, 기초과학 학과의 입학 커트라인이 의대를 앞서기도 했다. 고교 전교 1등이 전자공학과, 컴퓨터공학과, 기계공학과, 물리학과 등으로 몰려갔다. 높은 연봉과 정년 보장은 물론 대기업 임원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1등 신랑감은 의대생보다 전자공학과 학생이었다. 하지만 IMF 외환위기가 분수령이었다. 기업들이 구조조정에 맛을 들이면서 이공계 사원들이 40대 중반에도 잘려 나갔다. 이런 선배들을 보면서 젊은 사원들이 ‘평생 면허’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30대 엘리트 직원이 뒤늦게 의대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치대, 한의대, 약대, 수의대 등 평생 일할 수 있는 직종이 각광받기 시작했다. 오랜 이공계 위기의 출발점이다.
공대 나온 아버지가 아들의 공대 진학 말리는 이유?
의사 과학자 양성을 목적으로 설립된 의전원(의학전문대학원)은 동네 의사 양성소가 됐다가 좌초하고 말았다. 이공계 위기는 20년 이상 지속되고 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대로 가면 대한민국의 과학기술이 위험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된 지 오래다. 하지만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보이지 않는다. 고교 우등생들은 지금도 의대 열풍에 휩싸여 있다. 공대 나온 아버지가 아들의 공대 진학을 말린다. 본인이 대기업에서 일찍 나왔기 때문이다. 70대에도 일할 수 있는 직업이 최고라는 인식이 있다. 국민연금으론 부족해 생활비 마련이 시급하기 때문이다.
반도체 열풍에 영재-과학고 의대 진학 급감
최근 이공계 인기가 되살아나고 있다는 보도가 나왔다. 반도체 열풍에 영재-과학고 졸업생의 의대 진학이 급격히 감소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영재학교의 의·약학계열 지원율이 3년 만에 20%에서 2.3%로 뚝 떨어졌다는 것이다. 반면에 이공계열 학과 진학 비중은 81.3%서 92.4%로 늘어났다. 이공계 분야 우수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설립된 영재학교와 과학고 학생이 그동안 의대와 약대에 진학하는 사례가 많아 문제로 지목되어 왔다. 반도체 열풍에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이다. 인공지능(AI)의 발전에 따라 공대, 기초과학 등 이공계의 인기가 되살아나면서 의대 쏠림 현상에도 변화가 일고 있다.
하지만 반도체 열풍이 잦아들면 이공계 인기도 다시 주춤할 수 있다. 그때 되면 의사 등 평생 면허에 대한 후회가 밀려올 수 있다. 오랜 이공계 위기의 시발점도 고용 불안정에서 비롯됐다. 공대 우등 졸업생이 40대 중반에 잘려 힘들게 식당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글로벌 기업에서 회계-인사 등 문과 출신이 주도권을 쥐고 이해하기 쉬운 사내 보고서 제출을 요구하는 등 이공계 출신을 힘들게 한 적도 있었다. 기술 위주 기업은 사내 소통이 더욱 중요하다. 리스크 큰 첨단 기술 투자를 위해선 이공계 출신의 전략가가 필요하다.
반도체 열풍에만 기댄 이공계 인기는 오래가지 못할 수도
이제 이공계는 오랜 위기에서 탈출할 수 있을까? 반도체 열풍에만 기댄 이공계 인기는 오래가지 못할 수도 있다. 반도체 관련 등 특정 과에만 집중된 인기도 불안하다. 모처럼 살아나기 시작한 공대, 기초과학 인기의 불꽃이 더 활활 타게 키워야 한다. 지금의 글로벌 제조 기업 리더들은 이공계 위기의 출발점을 지켜본 세대다. 매출 신장 못지 않게 사내 이공계 출신의 성장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정부, 의회도 책임감을 갖고 기업을 지원해야 한다. 정부의 정책 실패로 이공계 위기가 오래 지속된 측면도 있다.
언제까지 고교 전교 1등이 의대로 몰려가게 할 것인가. 의대 1등은 성형, 피부과로 몰려가고 … 70, 80, 90년대처럼 고교 전교 1등이 공대, 기초과학을 선택해야 한다. 그래야 해외 여행에서 한국 기업들의 광고를 오래 볼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인이라는 자부심이 사그라들게 해선 안 된다. 이공계 위기라는 말이 아예 사라지게 만들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