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국의 경로당은 사실상 고스톱이 점령했다. ‘화투가 치매를 예방한다’는 속설 덕에 어르신들은 화투판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코메디닷컴은 <치매 극복의 날>을 맞아 화투를 대신하면서도 의학적 근거를 토대로 진행 중인 색다른 치매 예방 프로그램을 살펴봤다. 그 시도는 현재진행형이었다. 이제 화투판에 작별을 고할 때다. 편집자주
“우리 준우 덕분에 게임에서 이겼네.”
“할머니, 이 게임은 이렇게 해야 점수를 많이 따요.”
지난 16일 오후 1시, 인천 미추홀구의 한 경로당 분위기는 평소와 사뭇 달랐다. 어르신들이 모여 시간을 보내던 공간에 유치원생 15명가량이 들어서면서다. 아이와 어르신이 짝을 이뤄 보드게임을 시작하자 조용하던 경로당은 금세 웃음소리와 응원으로 가득 찼다.
아이들은 어르신에게 게임 방법을 알려주고, 어르신들은 아이가 문제를 풀 때마다 박수를 쳤다. 게임이 끝난 뒤에는 공을 주머니에 넣거나 리본을 빼앗는 놀이를 하며 함께 몸을 움직였다.
“수요일이 되면 옷도 더 신경 써서 입어요. 아이들 만나는 시간이 기다려지니까요.”
아이들과 게임을 하던 김정희 씨(71)의 말이다. 그는 “조용하던 경로당에 웃음과 활기가 돈다”며 “괜히 수요일이면 일찍 일어나 하루를 준비하게 된다. 10월이면 프로그램이 끝난다는 게 벌써 아쉽다”고 말했다.
보드게임으로 시작한 '세대공감'⋯올해는 신체활동 추가
21일 제19회 ‘치매 극복의 날’을 앞두고 찾은 이곳에서는 어린이 캐릭터 사업 전문기업 웃소와 한국시니어케어연구회가 공동 운영하는 ‘세대공감 프로그램’이 한창이었다.
이 프로그램은 아이와 노인이 짝을 이뤄 수리력과 기억력을 활용하는 보드게임 2종을 하고, 인지훈련과 간단한 운동을 결합한 신체활동에 참여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지난해 처음 운영한 프로그램이 좋은 반응을 얻으면서 올해도 이어졌다. 지난달 26일 시작해 오는 10월 28일까지 매주 수요일 오후 1시에 총 10회 진행된다.
프로그램의 출발점은 단순했다. 노인끼리 또는 혼자 하던 인지훈련에서 벗어나 어린이와 함께하는 놀이로 바꿔보자는 것이다.
프로그램 설계에 참여한 김종세 웃소 대표는 “기존 치매 예방 인지자극 프로그램은 개인 단위로 진행되거나 노인만을 대상으로 한 경우가 많다”며 “아이들에게는 요즘 경험하기 어려운 조부모 세대와의 소통 기회를, 어르신들에게는 즐거움과 학습 능력을 높일 기회를 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고 전했다.
기억력 개선 유의한 효과⋯논문, 보드게임 역할 확인
자체 분석을 통해 효과도 확인했다. 웃소와 한국시니어케어연구회는 지난해 이 경로당의 노인 24명을 대상으로 프로그램 효과를 측정했다. 보건복지부와 중앙치매센터가 개발한 한국형 인지선별검사인 ‘CIST(Cognitive Impairment Screening Test)’를 프로그램 참여 전후 응시하도록 하고 변화를 살폈다.
그 결과 프로그램을 통해 인지기능이 통계적으로 유의한 개선 효과를 봤다는 걸 알게 됐다. 특히 기억력 영역에서 뚜렷한 변화가 관찰됐다는 게 주최 측 설명이다.
보드게임은 실제로 의료 현장에서 그 효과를 인정받은 치료 도구다.
2024년 백석대 보건학부 작업치료학과 연구팀이 보드게임의 효과를 다룬 논문 8편을 메타분석한 바에 따르면 정기적인 보드게임을 통한 치매 환자 치료는 주의력·작업기억·작업 전환 능력·자아존중감 등을 높이고 우울감은 줄이는 효과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논문마다 인지 기능 효과의 정도는 조금씩 다르지만 전반적으로 일관된 개선 경향을 보이고 있다.
김종세 대표는 “보드게임을 하다 보면 규칙을 이해하고 선택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을 자연스럽게 반복하게 된다”며 “다른 세대와 정서적으로 교감하면서 꾸준히 인지훈련을 한 것이 긍정적인 효과로 이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고 강조했다.

올해는 신체활동도 추가했다. 팀을 이뤄 주머니에 공을 넣거나 리본을 빼앗는 등 신체에 큰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 머리와 몸을 함께 움직이는 방식이다.
한국시니어케어연구회 소속 김성은 강사는 “노인 대상 인지훈련은 자발적으로, 적극적으로 참여할수록 효과가 크게 나타난다”며 “아이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경험 자체가 어르신들로 하여금 교육 시간을 기다리고 열심히 참여하게 만드는 요인이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프로그램에 참여한 노인들의 만족도도 높았다. 남미혜 씨(67)는 “요즘은 어디를 가도 아이를 보기 어려운데 매주 경로당에 찾아오는 것 자체가 어여쁘고 감사하다”며 “더 연로한 어르신들도 아이들이 오는 날이면 확실히 수업에 참여하는 태도가 달라진다”고 말했다.
“걱정했던 만남, 아이들이 먼저 뛰어와 안겼다”
처음부터 이런 모습이 자연스러웠던 것은 아니다. 프로그램 현장에서 만난 유치원 교사 김혜인 씨(31·가명)는 “처음 경로당과 유치원의 협업을 제안받았을 때만 해도 걱정이 앞섰다”며 지난해를 떠올렸다.
어르신들이 반가운 마음에 아이의 손을 잡거나 쓰다듬는 행동을 학부모들이 불편하게 받아들이지는 않을지 우려됐기 때문이다.
실제 모습은 예상과 달랐다.
“요즘 어르신들은 신체 접촉을 상당히 조심하세요. 오히려 프로그램이 2~3회 진행되면 아이들이 먼저 어르신들에게 뛰어가 안기거나 볼을 비벼요. 집에서도 어르신들에게 배운 옛날 동요를 부르고 손놀이를 한다면서 학부모들도 긍정적인 변화를 이야기합니다.”
김혜인 씨는 “한 아이를 키우려면 마을 전체가 필요하다는 옛말이 있는데 이번 프로그램을 보면서 그 의미를 체감했다”며 “전혀 인연이 없던 아이와 어르신이 수요일을 기다리고 친구처럼 어울리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세대 통합 돌봄’ 해외에선 이미 시작된 실험
노인과 어린이가 한 공간에서 교류하도록 하는 시도는 한국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해외에서는 이미 ‘세대 통합 돌봄’의 하나로 다양한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다.
일본에서는 1980년대 후반부터 노인 요양시설과 어린이집을 결합한 ‘노유복합시설’이 등장했다. 대표적인 곳이 도쿄 에도가와구의 고토엔(江東園)이다. 이곳에서는 어린이와 노인이 같은 공간에서 생활하며 산책이나 식사 등 일상의 일부를 함께한다.
미국에서도 비슷한 시도가 이어졌다. 워싱턴주 시애틀의 마운트 세인트 빈센트 요양원은 1991년부터 시설 안에서 유아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해 왔다. 노인과 어린이가 미술과 음악 등 다양한 활동을 함께하는 방식이다.
저출생과 고령화를 동시에 겪는 중국에서는 노인과 어린이 돌봄을 함께 다루는 이른바 ‘일로일소(一老一小)’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지역에 따라 노인 돌봄시설과 어린이 시설을 같은 건물이나 생활권에 배치해 두 세대가 공간을 공유하도록 하는 사례도 나타나고 있다.
형태는 다르지만 지향점은 비슷하다. 노인에게는 다른 세대와 교류하며 사회활동에 참여할 기회를 제공하고, 어린이에게는 조부모 세대와 교감하며 타인을 배려하는 경험을 쌓도록 하는 것이다. 가족에게 집중됐던 돌봄 부담을 지역사회가 함께 나눈다는 의미도 있다.
인천의 작은 경로당에서 매주 수요일 펼쳐지는 풍경도 이런 변화와 맞닿아 있다. 처음에는 서로 낯설었던 아이와 어르신들이 이제는 다음 수요일을 기다린다.

김정희 씨는 “아이들을 만나는 날이면 경로당에 오는 것부터 즐겁다”고 말했다.
2회에서는 전국 치매안심센터와 복지관에서 운영하는 다양한 인지 프로그램을 살펴보고, 최근 치매 예방·극복 프로그램이 어떻게 달라지고 있는지 짚는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