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대 여성은 미백크림을 매일 아침저녁으로 정성스럽게 발랐다. 뺨의 거뭇거뭇한 기미를 없애고 젊었을 때처럼 잡티 없는 ‘물광 피부’를 되찾겠다는 일념에서다. 하지만 오히려 얼굴 전체가 잿빛과 청흑색으로 물들고 말았다. 단순 기미로 믿고 미백 치료에 관심을 쏟다가 색소 덩어리가 피부 깊숙한 곳까지 쌓여 회복하기 힘든 상황이 됐다.
미국 텍사스 테크대 엘패소 의대, 뉴욕주립대 다운스테이트 의대 등 공동 연구팀에 의하면 이 66세 미국 여성은 약 3년 전, 양쪽 뺨에 짙은 갈색 얼룩이 도드라지기 시작하자 동네병원 피부과를 찾았다. 진단명은 흔한 만성 색소질환인 기미였다. 의사는 멜라닌 생성을 억제하는 표준 치료제인 4% 하이드로퀴논 크림을 환부에 하루 두 번씩 바르도록 처방했다.
처음 몇 달 동안에는 효과가 있는 것 같았다. 갈색 얼룩이 다소 옅어지는 변화를 본 환자는 큰 기대감에 부풀었다. 미백 효과를 한층 더 높이고 싶은 욕심까지 들었다. 환자는 일반의약품인 미백 크림과 기능성 화장품까지 직접 구해 이를 매일 바르기 시작했다.
약 1년 지나면서 이상한 징후가 나타났다. 기미가 옅어지기는커녕 오히려 점점 더 짙어지기 시작했다. 단순히 약효가 좀 떨어졌거나 기미가 다시 도진 것으로 여겼다. 조급해진 마음에 크림 바르는 횟수를 더 늘리고, 거뭇한 부위가 조금이라도 보이면 약을 덧바르곤 했다. 약 3년에 걸쳐 이런 일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그 결과는 참담했다. 약을 바를수록 얼굴의 색조는 갈색을 넘어 푸르스름한 잿빛(슬레이트 회색)으로 물들어갔다. 병변은 뺨을 넘어 관자놀이 아래와 귀 앞쪽까지 번져나갔다. 불규칙한 그물망 형태를 띠었다. 가까이서 들여다본 피부 표면에는 철가루나 캐비어가 뿌려진 듯했다. 바늘 끝만 한 미세한 흑점이 촘촘히 돋아나 있었다. 더 이상 일반 기미가 아니라 심각한 피부 변색이었다.
이 여성 환자는 결국 대학병원 문을 두드렸다. 의료진은 탈색제를 발랐는데도 색소가 더 짙어지는 데 주목했다. 의료진은 정확한 확진을 위해 피부 생검(조직 검사)을 제안했지만 환자는 이를 거부했다. 의료진은 환자가 3년에 걸쳐 지속적으로 미백크림을 발랐다는 점과 특유의 청회색 그물망 병변을 근거로 ‘외인성 갈색증’(외인성 조직흑변증, Exogenous Ochronosis)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의료진은 이 병이 되돌리기 어려운 만성 피부병으로 진행될 수 있음을 환자에게 차근히 설명하고, 하이드로퀴논 크림을 모두 즉시 버리게 했다. 특히 피부 재생을 돕는 바르는 비타민 A 유도체(레티노이드) 치료와 함께 1년 365일 자외선 차단 수칙을 철저히 지키게 했다. 3개월 뒤 추적 관찰에서 환자의 색소 침착은 더 이상 번지지 않고 멈췄다. 하지만 이미 피부 깊은 곳까지 내려앉은 잿빛 침착물은 완전히 지워지지 않은 채 깊은 상흔으로 남았다.
이 사례 연구 결과(Exogenous Ochronosis Masquerading As Melasma in Skin of Color: Indications for Early Detection and Updated Clinical Review of Diagnosis, Pathomechanism, and Management)는 최근 국제 학술지 《큐레우스(Cureus)》에 실렸다.
외인성 갈색증은 하이드로퀴논 성분이 든 미백 크림을 수년 이상 장기간 오남용했을 때, 피부 진피층에 황갈색 색소가 침착돼 청흑색 반점이 부작용으로 나타나는 피부병인 색소이상증이다. 기미와 외인성 갈색증은 겉보기에는 비슷해 보이지만 병의 뿌리부터 완전히 다르다. 기미는 자외선이나 호르몬 불균형, 유전적 영향으로 인해 피부 가장 바깥층인 표피에서 멜라닌 세포가 지나치게 많이 활성화해 생긴다. 반면 외인성 갈색증은 미백 성분인 하이드로퀴논이나 페놀 화합물을 지나치게 많이 사용했을 때 생기는 합병증이다.
임상 지침상 하이드로퀴논 크림의 안전한 사용 기간은 통상 8~12주(약 2~3개월)이다. 길어도 4~6개월을 넘기지 않고 반드시 휴지기를 가져야 한다. 이 환자는 3년간이나 약을 발라 의학적 허용 기준을 몇 배 이상 훌쩍 넘겼다. 이는 명백한 초장기 오남용에 해당한다. 이 크림을 사용한 지 3개월이나 1년 반 만에 외인성 갈색증이 발병한 사례도 학계에 보고된 바 있다.
하이드로퀴논이 피부 내 산화 효소에 의해 분해되는 과정에서 특정 중간 대사물질이 만들어지며, 이 물질이 표피를 뚫고 진피층 결합조직으로 퍼지고 밑으로 가라앉아 들러붙는다.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진피층의 탄력 섬유와 콜라겐 사이에 황토색 바나나 모양의 단단한 색소 덩어리가 박혀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표피의 색소는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탈락하거나 레이저로 깰 수 있지만, 진피 깊숙이 박힌 갈색증 색소는 레이저나 박피 등 어떤 현대 의학적 처치로도 쉽게 없애기 힘들다.
피부병에 속하는 외인성 갈색증의 진행은 대개 3단계를 거친다. 1단계에서는 가벼운 붉은 기와 경미한 갈색 침착(가라앉아 달라붙음)으로 시작해 기미와 구별이 어렵다. 그러나 2단계에 접어들면 피부가 위축되면서 검은 점 모양의 병변(콜로이드 밀리아)이 나타나고, 3단계에 이르면 단단한 혹(결절)이 만져진다.
국내외 통계에 따르면 기미는 성인 여성 인구의 10~40%가 평생 한 번 이상 겪을 만큼 흔한 피부병이다. 반면 외인성 갈색증은 전체 인구 대상 발병률은 낮지만, 멜라닌 색소 반응성이 높은 유색인종에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한국인을 포함한 동양인의 피부가 고위험군에 속한다.
보고된 환자 총 126명의 사례를 분석한 문헌고찰 연구 결과를 보면 환자의 50% 이상이 어두운 피부 유형인 것으로 나타났다. 또 다른 코호트(동일집단) 연구에서는 외인성 갈색증 환자 25명 전원이 의사의 처방과 감독 없이 미백크림을 임의로 구해 장기간 사용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들의 평균 약물 노출 기간은 9.2년이었다.
특히 약국에서 쉽게 구입할 수 있는 일반의약품이나 인터넷 직구를 통한 해외 미백크림이 큰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해외 직구 화장품에는 성분 표기조차 제대로 돼 있지 않거나 기준치를 훌쩍 넘는 고농도 하이드로퀴논이 몰래 첨가된 경우가 많다. 오랜 기간에 걸쳐 피부에 바르면 부작용 위험이 크게 높아지게 마련이다.
기미를 없애려다 오히려 지울 수 없는 얼룩을 남기지 않으려면 다음 수칙을 기억해야 한다.
첫째, 미백크림은 영양크림처럼 매일 바르는 제품이 아니므로 전문의 상담을 통해 정해진 기간만 발라야 한다. 미백크림은 피부 치료제나 기능성 화장품인 반면, 영양크림은 일반 화장품이다.
둘째, 하이드로퀴논 크림의 권장 치료 기간은 8~12주(약 2~3개월)이다. 이 기간 동안 규칙적으로 사용했는데도 병변이 나아지지 않는다면 효과가 없다고 보고 즉시 중단해야 한다. 계속 바르면 증상이 악화되거나 외인성 갈색증으로 이어질 수 있다.
셋째, 미백크림을 바르는 과정에서 피부가 옅어지기는커녕 푸르스름하거나 잿빛으로 변하고, 피부 결이 거칠어지며 모공 주위로 깨알 같은 흑점이 돋는다면 그 즉시 사용을 전면 중단해야 한다.
넷째, 기미가 만성적이거나 피부가 민감해 하이드로퀴논 크림의 사용이 부담스럽다면 트라넥사믹산(TXA), 아젤라산, 코직산 등 부작용 위험이 상대적으로 적은 대체 치료법을 의사와 상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자주 묻는 질문]
Q1. 하이드로퀴논 크림을 바르다가 피부가 거뭇거뭇해지면 약효가 나타나는 과정인가요?
A1. 아닙니다. 하이드로퀴논 크림으로 치료하던 중 피부가 잿빛이나 청회색으로 변하는 것은 약효가 아니라 진피층에 색소 물질이 쌓이는 부작용(외인성 갈색증)의 대표적인 초기 신호입니다. 피부 변색이 나타나면 즉시 사용을 중단하고 전문의의 진료를 받아야 합니다.
Q2. 외인성 갈색증을 일반 기미 레이저로 완전히 없앨 수 있나요?
A2. 완전한 제거는 매우 어렵습니다. 기미와 달리 색소가 진피 결합조직 깊숙이 단단히 침착되기 때문에 피코 레이저나 박피술 등을 해도 증상이 좋아지는 속도가 느리고 불완전한 경우가 많습니다. 가장 중요한 치료법은 의심 즉시 원인 약물을 완전히 끊어 진행을 막는 것입니다.
Q3. 약국이나 해외 직구로 산 미백크림은 매일 영양크림처럼 오래 발라도 괜찮은가요?
A3. 절대 안 됩니다. 처방전 없이 구한 2% 저농도 제품이라도 수개월에서 수년간 휴식기 없이 바르면 외인성 갈색증에 걸릴 수 있습니다. 반드시 2~3개월 사용 후 휴지기를 가져야 하며, 자외선 차단제를 엄격히 함께 사용해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