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1월 05일 (목)

“흉기 휘둘러도 피할 틈 없다”…‘임세원법’ 8년, 의사들은 여전히 위험하다

진료현장 의료진 “비상벨·보안요원 배치 등 큰 효과 없어” 지적

구글 검색 선호 출처로 추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들이 병원 안에서 위협이나 폭행을 당하는 사고가 반복되고 있지만, 현장 의료진은 이를 100% 방지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봤다. 사진=AI 생성 이미지

정신건강의학과 의사가 진료 현장에서 흉기에 다치는 사건이 또 발생했다. 2018년 임세원 강북삼성병원 교수 피살 사건을 계기로 의료진 보호를 위한 법적 장치가 마련됐지만, 비슷한 사건이 반복되고 있다. 의료현장에서는 갑작스러운 공격을 제도만으로 완벽하게 막기는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5일 경찰 등에 따르면 서울 서대문경찰서는 전날 세브란스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에게 흉기를 휘두른 50대 여성 A씨를 특수상해 혐의로 체포했다.

A씨는 4일 오후 4시 30분쯤 세브란스병원에서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를 흉기로 공격한 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에 현행범으로 체포됐다. 피해 교수는 얼굴과 손 인대, 뒤통수 등에 상처를 입고 응급실에서 치료받았다. 생명에는 지장이 없지만 중상을 입은 것으로 파악됐다.

A씨는 경찰 조사에서 "최근까지 다른 대학병원에서 진료받았고, 해당 병원 의료진에게 불만을 품고 있었다"며 "범행 당일에는 그 병원 진료가 없어 세브란스병원으로 대신 찾아갔다"는 취지로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A씨에게 살인미수 혐의를 적용해 구속영장을 신청할 방침이다.

8년 전의 악몽⋯‘임세원법’ 만들어졌지만 피습 사건 반복

이번 사건은 2018년 12월 31일 발생한 임세원 강북삼성병원 교수 피살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였던 임 교수는 예약 없이 찾아온 담당 환자를 진료하던 중 흉기 공격을 받았다. 이후 응급실로 옮겨졌지만 끝내 숨졌다. 당시 임 교수가 간호사 등 주변 의료진을 대피시키려다 미처 피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안타까움을 더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의료진과 의료기관 종사자의 안전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국회는 의료법을 일부 개정해 100병상 이상 병원에 보안인력 배치와 비상벨 설치를 의무화했다.

응급실에 적용되던 '의료인 폭행 가중처벌' 규정도 일반 진료실까지 확대됐다. 해당 의료법 일부개정안은 고인의 이름을 따 ‘임세원법’이라고 불리게 됐다.

그러나 법적 장치가 마련된 이후에도 유사한 사건은 끊이지 않았다. 2020년 6월 전주의 한 정신과 병원에서는 20대 남성이 진료실에 들어와 휴대전화로 의사의 머리를 반복해서 가격했다. 당시 외래 진료 공간에 안전요원이 배치돼 있었지만 공격을 막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같은 해 8월에는 부산의 한 의원에서 입원 환자가 퇴원 요구 등에 불만을 품고 정신건강의학과 원장을 공격해 숨지게 했다. 2024년 5월에는 대구의 한 정신병원에서 환자가 의사의 얼굴에 호신용 가스총을 쏘는 사건이 발생했다. 올해 8월에는 경기 고양시에서 향정신성의약품 추가 처방을 거절당한 환자가 의사를 폭행하기도 했다.

이처럼 의료진을 겨냥한 공격이 반복되면서 현행 제도가 진료실의 안전을 충분히 보장할 수 있는지를 둘러싼 논란도 이어지고 있다.

'임세원법’, 의료진 폭행 100% 막을 수 없어

현장 의료진은 “이런 사건은 특정한 법이나 규정으로 완벽히 막을 수 없다”며 비상벨이나 보안인력을 갖추더라도 돌발적인 공격까지 완벽하게 차단하기는 어렵다고 입을 모은다. 애초에 법이 없어서 생긴 문제가 아니라는 얘기다.

조현병과 강박장애 치료 분야의 권위자로 꼽히는 권준수 한양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석좌교수는 5일 코메디닷컴에 "법으로 의무화된 비상벨이나 보안인력 배치만으로 의료진 폭행을 100% 막을 수는 없다"고 단언했다.

권 교수는 "정신과 의사를 공격하는 사건은 주로 진료실 안에서 발생한다"며 "좁은 공간에서 갑자기 흉기를 꺼내 공격하면 의사가 즉각 대응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설명했다.

정기적으로 내원하는 환자는 의료진이 평소 성향이나 증상의 중증도를 파악할 수 있지만, 초진 환자나 진료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환자, 비정기적으로 방문하는 환자는 상태를 충분히 파악하기 어려워 돌발 상황에 대비하기가 쉽지 않다는 분석이다.

권 교수는 "진료실 안에서는 결국 의료진이 개인적으로 대비책을 마련할 수밖에 없다"며 "환자와 거리를 두고 상담하거나 진료실에 뒷문을 만들고, 출입문에 가까운 쪽에 앉아 진료하는 방식 등이 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호신용 스프레이를 구비해 둔 후배 의사도 봤다"고 덧붙였다.

“금속탐지기라도 설치해야 하나”⋯환자 낙인 우려도

이번 세브란스병원 사건 이후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정신과 외래 공간에 한정해서 금속탐지기나 보안검색대라도 구비해야 되는 것 아니냐’는 의견까지 나왔다.

그러나 권 교수는 이 같은 방안을 두고도 신중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는 "상급종합병원에서는 절대로 고려하기 어려운 대책"이라며 "증상이 위중하고 심각해 3차 병원까지 찾아온 환자들인데, 마지막으로 찾은 병원에서조차 범죄자 취급을 받는다고 느끼면 오히려 더 큰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의료진의 안전을 강화해야 하지만, 모든 정신건강의학과 환자를 잠재적 가해자로 취급하는 방식은 또 다른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는 얘기다.

그렇다고 현장에서 뚜렷한 대안을 제시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수도권에서 100병상 이상 규모의 정신병원을 운영하는 B 원장은 이날 코메디닷컴에 "현행 법의 실효성이 크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그렇다고 법을 더 강화해 달라고 요구하기도 쉽지 않다"고 털어놨다.

대학병원이 아닌 일반 병·의원급 의료기관에선 비상벨을 설치하고 보안요원을 배치하는 현행 기준만 따라가도 비용 부담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B 원장은 "임세원법의 취지는 일정한 자격을 갖춘 전문 보안인력을 배치하는 것이지만, 동네병원 규모에서 그런 인력을 운영하기는 쉽지 않다"고 짚었다.

특히 입원 환자를 받는 의료기관은 24시간 보안인력을 운영해야 하는데, 인건비뿐 아니라 인력 관리에도 상당한 부담이 따른다는 설명이다. 반대로 전문성이나 자격을 충분히 갖추지 않은 인력을 배치하면 폭행이나 난동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어렵다는 문제도 있다.

권 교수 역시 "명확한 제도적 해결책이 있는 게 아니라 답답하다. 지금도 많은 후배 의사들이 '정신과 의사의 숙명이겠거니' 하며 진료를 이어가고 있다"면서 “현재로서는 의료진이 조금 더 경계하되, 이번 사건이 전체 환자에게 낙인을 찍는 결과로 이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현재로서는 의료진이 조금 더 경계할 수밖에 없지만, 이번 사건이 정신건강의학과 환자 전체에 대한 낙인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고 다시 한번 강조했다.

의료계 “진료실은 목숨 걸고 일하는 곳 아냐”…국가 차원 대책 촉구

의료계도 정부와 국회에 실효성 있는 의료진 보호 대책을 요구하고 나섰다.

대한병원협회는 이날 성명을 내고 정부와 사법당국에 △병원 내 흉기 반입과 폭력 행위를 막기 위한 실효성 있는 안전대책 마련 △의료진 폭행과 위협에 대한 무관용 원칙 적용 △개별 병원에 안전관리 책임을 전가하지 않는 국가 차원의 지원체계 구축 등을 촉구했다.

병협은 "진료 현장의 안전은 의료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국민 모두의 생명과 건강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전제 조건"이라며 "안전한 환경 조성을 위해 필요한 모든 노력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서울특별시의사회도 "진료실은 생명을 살리는 공간이지, 의료진이 자신의 생명을 걸어야 하는 공간이 아니다"라며 정부와 국회에 의료기관 내 폭력 예방을 위한 법적·제도적 장치 마련과 국가 차원의 의료진 보호 종합대책 수립을 요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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