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날 퇴근길 지하철에서는, 방금 치료를 마친 출혈 환자 피부 아래에서 벌어지고 있는 지혈 과정과 환자가 복용하는 혈액 응고 방지제 생각으로 머리가 꽉 찼다.
진료 시간이 지나 가방을 메고 나가는데 한 환자가 접수대 직원에게 “응급조치라도 부탁한다”고 간청하였다. 진료실로 돌아가 가운을 걸쳤다. 진료실로 들어온 환자가 손을 내밀었다. 손등 표피가 명함 크기만큼 벗겨져 있고 상처 부위에는 피가 고여 있었다. 환자의 손등과 팔 곳곳에서는 자주색 멍(자반)이 관찰되었다. 벗겨진 부위도 커다란 자반 부위였다. 심장 스텐트 시술 후 이런 일이 잦다고 했다. 아스피린과 클로피도그렐 복용으로 작은 충격에도 피하 혈관에서는 출혈이 잦을 수 있다.
상처를 씻고 항생 연고를 얇게 발랐다. 메디폼을 가볍게 덮고 압박은 최소화했다. 감염이 없기를 바라며 다음 날 다시 오시라 했다.
피가 멈추는 정교한 설계
몸은 여러 상황에서 피를 흘린다. 그리고 우리 몸에서 피는 적당한 시간이 지나면 멈추도록 설계되어 있다.
우리 몸의 지혈 설계도는 정교하다. 충격을 받아 피가 혈관 밖으로 흐르면, 혈소판이 즉각 반응하고 손상된 내피 아래 콜라겐에 달라붙는다. 그 위에 응고 인자들이 단계적으로 활성화되며 프로트롬빈이 트롬빈으로 전환되고, 피브리노겐이 피브린으로 변해 그물망을 형성한다.
외인성 경로와 내인성 경로가 서로 얽혀 하나의 응고 폭포를 이룬다. 이 연쇄 반응은 놀라울 정도로 빠르다.
지혈에는 역작용도 있다. 지혈 반응이 과하면 혈관 안에서 피가 굳는다. 의학은 오랫동안 이 응고를 어떻게 다룰지 고민해왔다.
19세기에는 거머리에서 자연 항응고 물질인 히루딘이 발견되었고 20세기 초에는 헤파린이 발견되었다. 그러나 경구로 복용할 수 있는 항응고제 개발은 더뎠다. 응고를 조절하는 약을 먹는다는 발상은 오랫동안 실현되지 않았다.

히루딘과 헤파린...그리고 디쿠마롤의 발견
1920년대 북미 농가에서 소들이 원인 모를 출혈로 죽어가기 시작했다. 작은 상처에도 피가 멈추지 않았고, 내부 출혈로 쓰러졌다. 농부들은 처음 전염병을 의심했으나 아니었다. 공통점이 있었다. 부패한 스위트 클로버 사료였다. 이에 주목한 위스콘신대 생화학자 칼 폴 링크 연구팀은 썩은 클로버에서 디쿠마롤을 분리했다.
자연 상태에서 존재하는 쿠마린이 곰팡이 작용을 거쳐 부패한 결과물이 디쿠마롤이다. 디쿠마롤은 간에서 비타민 K 의존성 응고 인자의 γ-카복실화를 억제해 프로트롬빈과 제VII, IX, X 인자의 합성을 방해해서 혈액 응고를 방해했다. 소의 피가 멈추지 않은 이유가 밝혀졌다.
이 발견은 곧 합성 연구로 이어졌다. 디쿠마롤의 구조를 바탕으로 더 강력하고 안정적인 4-하이드록시쿠마린 유도체가 합성되었고, 그것이 '와파린'이었다. 이름은 Wisconsin Alumni Research Foundation의 약자에서 유래했다.
처음에는 쥐약으로 판매되었다. 1950년대 한 군인이 대량의 쥐약을 복용한 뒤 비타민 K 투여로 회복하였다. 이 사건은 항응고제 사용에서 전환점이 되었다. 와파린 용량을 조절하면 인간에게도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고 와파린은 항응고제로 승인되었다. 와파린은 심방세동과 기계 판막 환자의 혈전을 예방하는 표준 치료제가 되었다.
와파린 개발의 출발점이 된 쿠마린은 계피를 포함한 여러 식물에서 발견되는 방향족 화합물이다. 달콤한 건초 향을 내는 향기 성분이다. 쿠마린은 자연 상태에서는 항응고 작용이 없다. 쿠마린이 부패하여 디쿠마롤로 변형되지 않았으면 인류는 와파린이라는 항응고제를 가지지 못하였을지도 모른다.
진료실 ‘오늘의 차’를 ‘육계’로 바꾼 것은
다음 날 방문한 환자의 상처에서는 출혈이 멈췄고 감염 소견도 없었다. 내 진료실 한 켠에 작은 차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매일 차종을 바꾸어 ‘오늘의 차’를 대접하고, 작은 알림판에 차에 대한 설명을 깃들여 병실의 분위기를 특별히 가꾼다. 병원에서 차를 대접받는 환자들은 의외의 서비스에 감동하고 차 맛에 감동한다.
나는 이 지혈 이상 환자를 위하여 급히 ‘오늘의 차’ 차종을 바꾸었다. 선택한 차는 ‘육계’. ‘육계’는 계피 냄새가 난다는 우롱차의 일종이다. ‘육계’를 선택한 이유는 항응고제 개발을 촉발시킨 쿠마린이라는 물질이 계피의 주요 향기 성분이기 때문이다.
‘육계(肉桂, Rougui)’는 계피 향과 톡 쏘는 맛, 그리고 차 마신 후 목 깊은 곳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구감이 특징인 대표적인 우롱차다. 이름은 중국 계피나무인 육계나무에서 따 왔다. 차 이름이 ‘육계’가 된 이유는 향기 특성 때문이다.
중국과 한국에서 사용되는 계피는 육계나무(C. cassia)의 껍질이다. 껍질은 두껍고 살이 많이 붙어서 살을 뜻하는 ‘육’자가 붙었다. 강한 향과 특유의 매운맛 때문에 생약이나 벌레 기피제에도 쓰였고, 한국에서 수정과 제조에 널리 쓰였다. 서양 요리에 쓰이는 계피인 실론 시나몬보다 알싸한 향이 훨씬 강해서 커피나 케이크 등 다과 위에 뿌리면 본연의 맛을 가려버린다. 카시아(C. cassia) 계피 맛에 익숙한 사람에겐 서양 시나몬을 싱겁다고 느낄 수 있다. 실론 시나몬에 빗대어 육계나무는 중국 시나몬으로도 불린다.
속칭 서양 계피라 불리는 실론계 계피나무는 흔히 시나몬으로 불린다. 시나몬의 대표주자라서 일명 참 시나몬(True Cinnamon)이다. 스리랑카와 말라바르 해안이 원산지이고 현재 서남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재배한다. 시나몬 종류 중에선 제일 비싼 축에 속한다. 냉장고가 발명되기 전에 그리스와 튀르키예에서 육류를 장기간 보관하기 위하여 사용하였고 현재도 다양한 음식과 음료수에 향기 성분으로 사용된다. 시나몬 가루는 특유의 향 때문에 여러 음료수에 첨가한다. 커피와 홍차에도 첨가한다.
두 계피나무 모두 녹나무 속(Cinnamomum)에 속하는 나무인데, 두 계피나무의 가장 큰 차이점은 쿠마린 함량이다. 쿠마린은 카시아 계피에 훨씬 많이 들어 있다.
계피 향은 나는데, 계피는 없다
우롱차 ‘육계’에서 계피 향이 나니 ‘육계’에도 쿠마린을 포함한 계피의 향 성분들이 포함되어있다고 유추하면 착각이다. ‘육계’는 계피를 넣어 만든 차가 아닐 뿐 아니라 ‘육계’에서 나는 계피 향은 계피 성분과는 관계가 없는 향이다.
계피의 향기 성분은 시네말데하이드와 쿠마린이다. 그러나 ‘육계’ 우롱차에서는 이들이 검출되지 않는다. ‘육계’에서 나는 계피 같은 향은 육계 원료가 되는 차나무의 유전적 특성, 암지(岩地) 테루아, 중강도 산화, 강한 로스팅의 조합에서 나온다. 이 조합의 결과로 ‘육계’에는 복합적인 방향족 화합물이 생성된다.
‘육계’의 향기는 발효·산화·열 처리 과정에서 만들어진 2차 대사물들의 조합 결과다. ‘육계’의 향기에 관여하는 물질들은 다양하다.
차나무 잎에는 카테킨, 아미노산, 당류, 지질이 존재한다. 산화 과정에서 카테킨은 테아플라빈과 테아루비긴으로 전환되고, 로스팅 시 Maillard 반응과 열분해가 일어나 퓨란, 피라진, 피롤, 알데하이드류가 생성된다. 페닐알라닌 경로에서 유래한 페닐아세트알데하이드, 벤즈알데하이드, 메틸살리실레이트, 유제놀 같은 분자가 어우러진다. 테르펜계 화합물인 리날룰, 제라니올, 네롤리돌도 기여한다. 이 수십 가지 휘발성 분자가 특정 비율로 결합해 ‘육계’의 따뜻하고 달콤하며 약간 매운 향의 조합을 만든다.
살펴본 대로 ‘육계’ 향은 실제 계피 화합물이 들어 있어서 나는 향은 아니다. 차의 생합성 경로와 로스팅의 화학 반응이 만들어낸 새로운 조합 때문이다. 우리는 그 조합을 “계피와 같다”고 해석할 뿐이다. 후각은 “단일 분자” 인식이 아니다. 후각은 향기 패턴의 인식이다. 계피 향도 따뜻함, 약간의 단맛, 매운 느낌의 복합 감각이다.
‘육계’ 우롱은 로스팅과 산화 과정에서 이와 비슷한 방향족 패턴을 만들어내었다. 실제 계피 성분이 아니라 “계피와 닮은 후각 코드”가 생성되었을 뿐이다.
우리가 향이라 경험하는 것은 성분이 아니라 성분들이 모여 만들어내는 향기의 인상(印象)이다. 그러니 우리가 “육계에서 계피 향이 난다”고 말하지만, 이는 “‘육계’에서 계피 향기 인상이 난다”의 줄임 표현이다.
유영현 티클리닉 디렉터(오디오칼럼 1+1이야기 https://www.youtube.com/@yhyoo09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