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08월 03일 (월)

숨은 진단명 찾기

[호스피탈리스트 다이어리]#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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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인 정지수 교수가 환자를 돌보는 모습을 수채화로 표현했다. 그림=이영이 교수(강릉아산병원)

혈액내과 병동은 매일이 긴장의 연속이다. 이곳에서 만나는 환자들은 질환 자체의 중증도도 높지만, 항암 치료로 인해 면역체계가 무너진 상태라 아주 사소한 징후가 순식간에 치명적인 결과로 이어지곤 한다.

최근 응급실을 통해 입원한 70대 여성 환자 A씨의 사례는 그 긴장이 얼마나 촘촘해야 하는지를 다시 일깨워 주었다. 그녀는 다발성 골수종으로 장기간 항암 치료를 받아온 환자였다. 내원 당시 극심한 전신 통증과 함께 의사소통이 불가능할 정도의 기면 상태를 보이고 있었다. 응급실에서 시행한 CT 결과는 불길했다. 경추 부위에 골수종 침범을 시사하는 소견이 관찰된 것이다.

통상적인 흐름대로라면 척추 전체 MRI를 시행하고, 마약성 진통제로 통증을 조절하며, 혈액내과 주치의와 항암제 변경 혹은 방사선 치료 여부를 논의하는 순서였을 것이다. 그런데 차트를 복기하는 중에 묘한 이질감이 들었다. CT 소견대로 골수종이 급격히 악화되어 척추를 침범하고 의식까지 떨어뜨릴 정도라면, 그에 따른 생화학적 지표 변화가 있어야 했다.

그런데 M단백(M-protein)과 유리경쇄(free light chain) 수치는 최근 검사와 비교해 유의미한 변동이 없었다. 암세포가 뼈를 침범할 때 증가하는 칼슘과 LDH 역시 정상 범위 안에서 조용했다. 데이터는 암의 재발이 아니라 전신 상태를 급격히 무너뜨린 제3의 원인이 있음을 가리키고 있었다. CT 소견이 만들어낸 프레임을 그대로 따랐다면, 그 신호는 쉽게 묻혀버렸을 것이다.

나는 컴퓨터 앞에서 일어나 다시 환자에게 다가갔다. 환자는 여전히 통증으로 신음하며 내 질문에 제대로 답하지 못했다. ‘암 환자’라는 프레임을 내려놓고 백지 상태에서 신체 진찰을 시작했다. 사지의 운동 능력과 감각을 살피던 중, 한쪽 무릎 주위에서 부종과 열감이 느껴졌다. 단순한 연부조직 부종이 아니었다. 관절강 내에 염증액이 가득 차 있는 특유의 팽창감이 손끝에 느껴졌다. 환자의 몸이 처음부터 신호를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보호자에게 추가적인 과거력을 물었다. 해당 부위는 수년 전 인공관절 수술을 받은 이력이 있었다. 최근 환자는 항암 부작용으로 심한 설사를 겪으며 중등도 이상의 탈수 상태에 빠져 있었다.

퍼즐 조각이 맞춰졌다. 항암 치료로 면역 기능이 저하된 상태에서, 탈수로 인한 전신 쇠약이 기회감염의 방아쇠가 된 것이다. 문제는 척추가 아니라 무릎이었다. 인공관절 주위에 발생한 감염성 관절염과 이로 인한 패혈증이 환자를 사선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판단은 빨라야 했다. 척추 MRI를 진행함과 동시에 결과와 무관하게 광범위 항생제 투여를 시작했다. 그리고 정형외과와 감염내과에 긴급 협진을 요청했다.

“다발성 골수종 환자로, 인공관절 감염으로 인한 패혈증이 의심됩니다. 빠른 관절강 내 배농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이후 척추 MRI 판독은 이 판단을 뒷받침했다. 척추의 골수종 침범 소견은 없었으며, CT에서 보였던 소견은 암의 진행이 아닌 퇴행성 변화나 비특이적 소견일 가능성이 높았다. 환자는 정형외과에서 관절 초음파와 활액 검사를 받은 뒤 다음 날 관절강 내 염증 제거 수술을 받았다. 항생제 치료를 병행하며 환자는 기적처럼 의식을 회복했다. 반나절만 늦었어도 환자는 중환자실에서 인공호흡기에 의지한 채 사투를 벌여야 했을 것이다.

며칠 뒤 회진 길에 복도에서 익숙한 뒷모습을 보았다. 불과 열흘 전만 해도 기면 상태로 실려 왔던 A씨가 워커에 의지해 한 발 한 발 걸음을 떼고 있었다. 수술한 무릎의 통증이 아직 가시지 않았을 텐데도 재활 훈련에 매진하는 그녀의 얼굴에는 삶에 대한 의지가 가득했다.

“선생님, 이제 다리에 힘이 좀 들어가요. 곧 집에 갈 수 있겠죠?”

그 미소를 마주하며 생각했다. 진단명은 때로 의사의 시야를 좁힌다. 확증 편향은 특정 의사만의 문제가 아니라, 임상 현장에서 누구나 빠질 수 있는 함정이다. 그 함정을 피하게 해준 것은 나의 ‘촉’이 아니라, 환자가 몸으로 보내온 신호였다. 그 신호를 놓치지 않으려면 환자를 자주, 그리고 가까이에서 보는 사람이 필요하다. 그것이 우리가 병동을 지키는 이유다.

<편집자주>입원전담전문의(호스피탈리스트)는 병동에 상주하며 가장 가까이에서 입원환자를 돌보는 의사를 말한다. 2016년 시범사업으로 시작된 입원전담의 제도는 2021년 본사업으로 전환되어 올해 꼭 10년을 맞는다. ‘호스피탈리스트 다이어리’는 이들이 병동에서 환자들을 만나고 치료하고 퇴원시키며 하루하루 쌓아가는 작은 순간들의 기록이다. 환자와 보호자, 다른 의료진, 그리고 입원전담의 자신에 대한 고백까지, 이 연재(주1회)를 통해 병원 안에서 겪는 ‘사람 사는 이야기’를 독자들과 나누고자 한다. 대한입원의학회 도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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