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07월 26일 (일)

곁을 지키는 시간의 힘

[호스피탈리스트 다이어리]#26

구글 검색 선호 출처로 추가
사진=AI 생성

입원전담전문의로 8년 동안 암 환자를 보며 수많은 삶의 마디를 마주해왔다. 병원은 언제나 저마다의 사연으로 가득하지만, 최근 내 마음 한구석을 유독 환하게 밝혀준 환자가 있었다. 70대 여성 환자 A씨. 지역의 한 병원에서 장천공으로 응급수술을 받은 뒤 뒤늦게 림프종 진단을 받고 서울까지 올라온 분이었다.

환자가 입원하던 날, 환자 곁을 지키던 보호자에게 시선이 머물렀다. 앳된 얼굴에 커다란 백팩을 메고 있어 고등학생인가 싶어 나이를 물었더니 이제 막 스무 살이 되었다고 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녀는 대학에 합격하고도 할머니가 위중한 병을 진단받으셨다는 소식에 입학을 포기했다. 그리고 스스로 할머니의 ‘전담 보호자’가 되어 자기 몸통만한 짐 가방을 들고 서울행 기차를 탔다.

큰 병 앞에서 기다림은 언제나 길다. 검사는 연일 이어지고, 결과를 기다리는 시간은 환자와 보호자의 피를 천천히 말린다. 새로 촬영한 CT에서는 수술 직후 CT에 비해 암이 많이 진행해 있었다. 손녀는 검사 결과를 설명할 때마다 한 글자라도 놓치고 싶지 않은듯이 수첩에 빼곡히 받아 적었고, 작은 수치 변화에도 불안한 얼굴로 내 눈을 바라보았다. 반대로 결과가 조금이라도 좋게 나오는 날이면 얼굴 가득 화색이 돌며 기뻐했다. 환자의 거친 손을 잡으며 “할머니, 거봐. 잘될 거야”라고 다독였다.

암 환자와 가족에게 병원은 거대한 미로와도 같다. 검사와 처치, 설명과 결정이 반복되는 동안 사람들은 쉽게 지친다. 손녀는 질문이 생길 때마다 찾아왔다. 설명을 듣고도 불안하면 다시 질문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한 번 더 설명하고, 함께 결과를 확인했다.

병동에 상주하며 시시각각 변하는 환자의 상태를 살피는 우리의 존재는, 단순히 의학적 처치를 넘어 환자와 보호자에게 심리적인 안전망이 되어준다. 외래와 수술 일정에 쫓겨 찰나의 회진만 가능한 구조였다면, 나는 손녀가 기뻐하며 웃던 표정도, 그녀가 스무 살에 기꺼이 포기한 것들의 무게도 결코 알지 못했을 것이다.

조심스럽게 가족 이야기를 묻자 손녀는 다리가 불편한 할머니가 자신을 어떻게 키워왔는지 들려주었다. 젊은 시절 사고로 다리를 다친 할머니는 걷는 것조차 쉽지 않은 몸으로 일을 하며 손녀를 돌봤다고 했다. 손녀는 할머니의 굽은 등과 절뚝이는 뒷모습을 보며 자랐다. 그 걸음걸이에 맺힌 사랑이 얼마나 무거운지 알기에 인생의 가장 화려한 시절을 병실의 간이 침대에서 보내기로 한 것이었다.

항암치료가 시작된 뒤에는 혹시라도 큰 합병증이 생기지 않을까 매일 긴장하며 상태를 살폈다. 다행히 환자는 꿋꿋이 견뎌냈다. 그 곁에서 간호사를 꿈꾸며 틈틈이 책을 펼쳐 공부하던 손녀의 모습은 그 자체로 내게도 큰 위로였다.

회진 시간이 아니어도 복도에서 마주치면 자연스럽게 말을 건넸다. “할머니 오늘은 좀 어떠세요?” 검사 결과가 나오면 손녀는 곧장 스테이션으로 달려왔다. 그럴 때마다 “걱정 마세요 이 부분은 괜찮아요”라고 바로 설명해 줄 수 있는 여유. 이 ‘시간의 공유’가 환자와 의사 사이에 단단한 신뢰의 다리를 놓는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다행히 환자는 큰 합병증 없이 첫 치료를 마치고 퇴원했다. 누군가는 극적인 반전이 없는 밋밋한 이야기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죽음 가까이에서 하루를 버텨내는 병동에서 ‘무사히 퇴원하는 평범한 일상’이야말로 가장 소중한 결과일 것이다.

퇴원하던 날, 커다란 가방을 메고 할머니 곁을 지키는 손녀의 뒷모습을 보았다. 평생 절뚝이는 다리로 손녀를 키워 온 할머니의 사랑이, 이제는 손녀의 단단한 부축이 되어 돌아오고 있었다.

병동에서 우리는 질병을 관리하지만 때로는 누군가의 가장 절박한 시간을 곁에서 함께 걷기도 한다. 환자의 통증과 검사 결과만이 아니라, 그 곁을 지키는 가족들의 사랑과 기다림까지 마주하게 된다.

그 곁을 지키는 일. 그것이 오늘도 내가 병동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이자 입원전담전문의로서 느끼는 가장 큰 보람이다.

<편집자주>
입원전담전문의(호스피탈리스트)는 병동에 상주하며 가장 가까이에서 입원환자를 돌보는 의사를 말한다. 2016년 시범사업으로 시작된 입원전담의 제도는 2021년 본사업으로 전환되어 올해 꼭 10년을 맞는다.
‘호스피탈리스트 다이어리’는 이들이 병동에서 환자들을 만나고 치료하고 퇴원시키며 하루하루 쌓아가는 작은 순간들의 기록이다. 환자와 보호자, 다른 의료진, 그리고 입원전담의 자신에 대한 고백까지, 이 연재(주1회)를 통해 병원 안에서 겪는 ‘사람 사는 이야기’를 독자들과 나누고자 한다. 대한입원의학회 도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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