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러시아의 한 전염병 연구소에서 일하던 직원이 원인 불명의 폐렴으로 사망한 뒤 ‘폐렴형 페스트에 감염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러시아발 ‘페스트 공포’가 확산하고 있다.
러시아 보건당국은 검사에서 페스트균이 검출되지 않았다며 '원인 불명의 폐렴'으로 발표했지만, 미국과 유럽연합(EU), 세계보건기구(WHO) 등은 관련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국제사회는 치사율이 100%로 알려진 폐렴형 흑사병이 유출됐을 가능성도 검토하고 있다.
러시아 현지 주요 매체 타스통신·모스크바타임스과 미국의 CNN 방송 등은 러시아 이르쿠츠크주 셸레호프에 위치한 방역 연구소의 연구원 다리야 시필로바(28)가 폐렴 증세로 인근 병원에 입원한 뒤 2일(현지시간) 사망했다고 5일 전했다.
러시아 현지 ‘페스트 감염설’⋯미국·EU·WHO도 촉각
논란은 러시아 독립언론 류디 바이칼라의 보도로 시작됐다. 이 매체는 지역 소식통을 인용해 “시필로바가 지난 9월 폐렴형 페스트 병원균이 담긴 시험관을 깨뜨렸다”며 이 과정에서 감염됐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러시아 연방 소비자권리보호·복지감독청은 4일 성명을 내고 즉각 반박했다. 시필로바가 원인을 알 수 없는 폐렴 진단을 받았고 업무상 페스트균을 다뤘던 것은 사실이지만, 검체에서는 페스트균이 검출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감독청은 “시필로바와 접촉한 것으로 추정된 200여 명을 검사한 결과 2명은 감기 바이러스, 2명은 코로나19 바이러스 양성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음성으로 확인됐다”며 페스트 유출설을 부인했다.
다만 예방 차원의 방역 조치는 이뤄졌다. 시필로바가 입원했던 병원은 입·퇴원과 검사를 일시 중단했고 접촉자 200여 명도 격리됐다. 인근 산업 현장에서도 노동자들에게 마스크 착용을 의무화했다.
미국과 유럽도 상황을 주시하고 있다.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는 6일 엑스(X·옛 트위터)를 통해 "러시아에서 발생한 사건을 지켜보고 있으며 추가 정보가 들어오는 대로 상황을 평가하겠다"고 밝혔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역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관련 내용을 논의하기 위해 이르면 7일 통화 예정이라고 전했다.
EU 집행위원회도 5일 대변인을 통해 유럽질병예방통제센터(ECDC)와 관련 상황을 긴밀하게 논의하고 있다고 밝혔다.
WHO는 일반 대중에게 미칠 위험은 크지 않다고 보면서도 정확하고 투명한 정보 공개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테워드로스 아드하놈 거브러여수스 WHO 총장은 자신의 X 계정에 “소셜미디어를 중심으로 두 번째 사망자가 나왔다는 확인되지 않은 주장이 확산 중인 만큼, 러시아 보건당국에 투명한 정보 공유를 요청한 상황”이라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영국 일간 데일리메일 등 일부 매체도 “현지 매체들은 추가 사망자가 나왔다고 보도 중”이라고 전하면서도 구체적으로 어떤 매체가 해당 소식을 보도했는지에 대한 언급은 없는 상황이다.
14세기 유럽 휩쓴 최악의 전염병 '흑사병'
국제사회가 이번 사안을 주시하는 이유는 페스트가 과거 대규모 유행을 일으킨 감염병인 데다, 의혹이 제기된 폐렴형 페스트는 사람 간 전파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흑사병’이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한 페스트는 페스트균(Yersinia pestis)에 감염돼 발생한다. 주로 감염된 설치류에 기생하는 벼룩을 통해 사람에게 전파되며 갑작스러운 발열과 오한 등이 나타난다.
페스트는 14세기 유럽을 휩쓸며 막대한 인명 피해를 냈다. 1340년대 시작된 대유행으로 당시 유럽 인구의 3분의 1 가량이 페스트로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된다. 학자에 따라서는 페스트에 따른 직·간접적 사망자를 최대 2억 명으로 집계하기도 한다.
페스트는 발병 형태에 따라 림프절형, 패혈증형, 폐렴형으로 나뉜다. 림프절 페스트는 감염된 벼룩에 물린 뒤 림프절이 붓고 통증과 발열 등이 나타나는 형태다. 치료가 늦어져 균이 혈액을 통해 퍼지면 패혈증형으로 진행해 쇼크와 출혈, 조직 괴사 등을 일으킬 수 있다.
폐렴형은 페스트균이 폐를 감염시키는 형태로 진행 속도가 빠르고 중증으로 이어질 위험이 크다. 특히 감염자의 호흡기 비말을 통해 사람 간 전파가 가능하며 호흡곤란과 기침, 흉통 등 폐렴과 비슷한 증상을 보인다. 다만 시필로바가 폐렴형 페스트에 감염됐다는 사실은 현재까지 확인되지 않았다.
치료 늦으면 치명적⋯항생제 조기 투여하면 쉽게 치료
WHO는 “폐렴형 페스트는 감염 초기에 치료를 시작하지 않으면 증상 발현 후 18~24시간 안에 사망할 위험이 거의 100%에 이른다”고 경고하고 있다.
그러나 현대에는 항생제로 치료할 수 있어 조기에 발견해 적절한 치료를 받는 것이 중요하다.
미국 CDC는 “폐렴형 페스트가 옮으려면 감염자와 1.8m 내에서 장시간 접촉해야 한다”며 “감염되더라도 항생제를 사용하면 길어도 2주 안에 완치가 가능하다”고 전했다.
전문가들은 이 때문에 페스트가 14세기와 같은 대유행으로 번질 가능성은 낮다고 보고 있다. 폐렴형 페스트 역시 감염자와 밀접하게 접촉할 때 전파 위험이 커지며, 신속하게 항생제를 투여하면 치료가 가능하다.
영국 런던 위생열대의학대학원(LSHTM)의 브렌든 렌 교수 역시 미국 CNBC와의 인터뷰에서 “페스트균의 전파력이 강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미 항생제 치료가 완전히 자리잡은 것을 고려할 때 코로나19 바이러스 유행만큼 치명적이지는 않다”고 설명했다.
한국은 페스트를 제1급 법정감염병으로 지정해 관리하고 있다. 의심 환자가 발생하면 즉시 방역당국에 신고해야 한다. 현재까지 국내에서 페스트 환자가 발생한 사례는 없으며, 질병관리청은 치료용 항생제를 비축하고 유사시 긴급 공급할 수 있는 체계를 운영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