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이 늦었지만 한 번 도전해 보려구요... 80세까진 일하고 싶어요”
A씨(52)는 최고 명문대 공대를 나와 유망 기업에서 AI(인공지능) 업무를 총괄하는 임원이다. 회사에서 능력을 인정받고 있고 연봉도 두둑해 주위의 부러움을 사고 있다. 그런 그가 뜻밖에 의대 진학을 고민하고 있다. 늦어도 한참 늦은 나이다.
50세가 넘으니 ‘평생 직업’이 간절하다는 것이다. 대학 입학 당시 그는 서울의 유명 의대에도 넉넉하게 입학할 수 있는 성적이었다. 지금처럼 ‘의대 열풍’이 불기 전이었지만 그때도 의대 커트라인은 최상위권이었다. 그는 적성에 맞게 공대 진학을 결정했다. 부모님도 ‘이과 수재’ 아들의 선택을 자랑스러워 했다.
A씨는 중년에도 ‘잘 나가는’ 편이지만 노후를 생각하면 늘 불안하다. 대기업에 재직 중이던 동창들이 하나 둘씩 명퇴를 하고 있고 본인도 압박감이 상당하다. 지금 맡고 있는 업무 성과를 인정받지 못하면 사표를 내야 할지도 모른다. ‘임원은 파리 목숨’이란 말을 실감한다. 자괴감이 밀려올 때마다 고3 때 의대 진학 권유를 뿌리친 게 후회된다. “이 나이에 잘리면 앞으로 30년 이상을 뭘 먹고 살아야 하나”...
50대 중년의 명암... 이공계 출신은 명퇴 걱정 vs 의사는 전성기 시작
최근 의대 정원 확대 문제로 온 나라가 시끄럽다. 의사의 고액 연봉이 늘 도마 위에 오른다. 하지만 고액 연봉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의사의 ‘평생 면허’다. 건강만 허락하면 80세까지 충분히 일할 수 있는 직업이 바로 의사다. 명문대 공대 출신 A씨가 가장 부러워하는 것이 ‘라이센스’(면허)다. 그의 공대 동창 중에는 뒤늦게 의사, 변호사, 변리사, 노무사 등 라이센스를 따낸 친구들이 적지 않다. 모두 평생 할 수 있는 직업을 찾아 뒤늦게 인생 진로를 바꾼 사람들이다.
대입 수험생들 사이에 ‘의치한수약’ 얘기가 나온 지 한참 됐다. 의대·치대·한의대·수의대·약대 입시의 줄임말이다. 모두 라이센스가 있어 평생 일 할 수 있다. 한때 의대보다 우수한 인재들이 몰리던 공대는 ‘의치한수약’을 돌고 난 후 지원한다는 말도 있다. 과장된 말이지만 그만큼 면허가 보장된 안정된 직종을 선호한다는 얘기다. 명문대 이공계 출신 아버지가 공부 잘하는 아들의 이공계 진학을 말리는 세상이다. 대기업에서 일찍 명퇴한 아버지의 전철을 밟지 말라는 당부다.
의대 열풍 뒤의 이공계 위기... 한국 산업 이끌었던 인재들은 어디로?
최근 의대 열풍과 맞물린 게 바로 ‘이공계 위기’다.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의 디딤돌을 다져야 하는 이과 인재들이 너도나도 면허증이 나오는 ‘의치한수약’으로 몰리고 있다. 세계 1위 반도체-가전-조선 강국의 대를 잇는 대신 동네병원의 의사의 길을 찾고 있다. 대기업에서 40~50세에 명퇴당하는 것보다 평생 면허를 따는 게 현명하다는 것이다. 이과에서 문과로 전향해 뒤늦게 변호사를 선택한 사람도 적지 않다.
대학 수석 입학자의 산실이었던 이공계는 1997년 IMF 외환위기를 계기로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IMF(국제통화기금)가 당시 국내에선 드물었던 기업의 구조조정을 유도하면서 월급쟁이들이 타깃이 됐다. 외환위기 이후에도 ‘나이든 직원 내보내기’에 맛을 들인 일부 기업들은 수시로 명퇴 공고를 낸다. 회사 경영 상황이 좋으면 세대교체를 명분으로 평생 회사에 헌신한 40~50대 직원들을 압박한다. 후배들은 무기력하게 떠밀려 나가는 선배들을 보면서 ‘먼허’ ‘자격증’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퇴직 후 최소 30년 동안 무엇을 할 것인가?...
경제 전문가들은 해고가 자유로운 노동 유연성에 주목한다. 경제 선순환에 분명히 순기능이 있다. 하지만 미국, 유럽 등과 달리 한국은 대기업, 중소기업의 수준 차가 너무 심한 게 문제다. 40대에 밀려나면 갈 곳이 없다. 재취업을 해도 이전 직장의 3분의 1 수준의 월급을 받아야 한다. 무엇보다 미래가 암울하다. 2~3년 일하다 다시 나오면 집에 있어야 한다. 식당 등 자영업에 뛰어들었다간 그나마 저축한 돈도 날리기 십상이다.
평균 수명이 급격히 늘어난 것도 의대 열풍의 원인 중 하나다. 과거 선배들은 60~65세 정년 퇴직 후 10년을 살다 세상을 떠났지만 요즘은 90세, 100세 시대다. 퇴직 후 최소 30년 동안 무엇을 할 것인가? 일부 국내 기업들은 나이 든 이공계 출신들을 선호하지 않는 것 같다. 인사 담당자들은 오너에게 잘 보이기 위해 구조조정 카드를 수시로 꺼내든다. 이공계 출신들은 40세 중반만 넘으면 좌불안석이다. 평생 회사에 헌신한 사람을 ‘비용’으로만 간주하는 기업의 풍토가 원망스럽다.
실패 연속 ‘이공계 살리기’... 과학자는 어디로? 대한민국의 미래는?
‘이공계 살리기’ 구호가 나온 지 오래됐다. 정부는 2000년대 초부터 이공계 기피 현상을 타개하기 위해 여러 대책을 내놓았지만 오히려 역주행한 측면이 있다. 상황이 더 악화되어 의대 전성시대를 열었다. 우수 인재들이 AI, 반도체, 가전, 조선 분야를 외면한다면 대한민국의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가. 미국, 유럽 중심가에서 한국 전자 기업의 광고를 보면서 뿌듯해 하던 장면을 더 이상 못 보게 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싹튼다.
이공계 인재들은 어렵게 공부해 박사학위를 받아도 갈 곳이 없다고 하소연한다. 일자리의 폭이 좁고 연구 트렌드가 자주 바뀌어 진로가 막막하다는 것이다. 저출산 등의 영향으로 지방대가 쪼그라들면서 교수 자리도 크게 줄었다. 꿈에 그리던 교수가 돼도 만성 저임금에 시달린다. 동창회에 나가면 의대에 진학했던 동기생과 비교 대상이 된다. 이내 끊었던 담배를 입에 물고 조용히 자리에서 빠져나온다.
인재들이 산업 현장, 연구실 외면... 저출산만큼 심각한 이공계 위기
52세에 의대 진학을 고민하는 A씨는 그동안 모아둔 돈에 아내가 맞벌이를 하고 있어 의대 6년의 재정 공백을 메울 수 있다는 나름의 계산이 있다. 나이가 있으니 전공의(인턴-레지던트)를 건너 뛰고 바로 동네병원을 차리겠다는 생각까지 한다. 최근 수능 문제를 풀어본 후 자신감도 생겼다. 집에서 고교생 자녀의 공부를 도와주면서 수학, 영어가 낯설지 않다. 처음에는 “말도 안 된다”며 펄쩍 뛰던 아내는 거의 포기 상태다. 80세까지 일하겠다는 남편의 열정이 가상하지만 마음은 복잡하다.
남의 일처럼 여겼던 저출산 위기가 이제 발등의 불이 됐다. 모두들 “국가가 소멸되게 생겼다”며 긴장하고 있다. 이공계 위기도 저출산만큼 심각하다. 세계 10위 경제 대국을 떠받치는 공대, 이과대 인재들이 산업 현장, 연구실을 외면하고 있다. 국가의 미래 먹거리인 AI를 연구하는 실력 있는 과학자가 동네병원 의사가 되겠다는 것을 어떻게 봐야 할까?
아주 중요한 정보 입니다.퇴직후 30년동안 어떡해 먹고 살아야할지 공감 합니다.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