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0월 14일 (수)

웃음과 분노, 소리와 침묵의 균형···멕시코시티의 희로애락

[세계를 걷다, 웰빙을 만나다] 멕시코시티 1부 : 희(喜)와 노(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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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시티의 아레나 멕시코(Arena México)에서 열리고 있는 프로레슬링인 루차 리브레 태그매치 모습. 사진=김승근 기자

희(喜·alegría)

욕부터 배워야 했다.

욕을 많이 얻어먹을수록 살아남는다고 하니 말이다. 정확히는 ‘먹고 살 수’ 있단다.

루차 리브레(Lucha Libre).

스페인어로 ‘자유로운 싸움’이라는 뜻으로, 중남미에서는 프로레슬링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다.

스포츠라고는 하지만 웃자고 달려들지, 죽자고 달려들지는 않는 게 루차 리브레다.

그러다 보니 경기력만큼이나 연기력도 높이 평가될 수밖에 없다. 욕이 윤활유처럼 필요한 이유다.

잘 짜인 각본에 따라 움직이지만 악역을 맡은 선수는 막장드라마의 주인공과 같은 운명이다.

본인인들 악역을 맡고 싶겠냐만은 처음부터 좋은 역할을 맡기란 쉽지 않다. 세상 모든 일이 마찬가지니 루차 리브레인들 별수 없다.

악역도 비중 있는 역할을 맡으려면 관객의 ‘욕’이 평가의 기준이 된다. 결국 루차 리브레에서 오래 살아남으려면 관객에게 욕을 많이 먹어야 하는 것이다.

아레나 메히코 공식 부스에서 판매되는 루차 리브레 선수들의 마스크. 400페소(2만9000원)부터 800페소(5만9000원)까지 다양하다.

링 위로 쏟아내는 가상의 분노, ‘합법적 카타르시스’

멕시코시티 독토레스(Col. Doctores) 지역의 아레나 메히코(Arena Mexico)에서는 일주일에 세 차례 루차 리브레 경기가 열린다.

매점에서는 영화 ‘나초 리브레’에서 잭 블랙이 썼던 것과 비슷한 프로레슬러 가면을 판다.

입장 전 짐 검사는 필수다. 카메라로 경기 영상을 촬영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경기에 몰입하면 악역의 반칙에 자연스럽게 욕이 나온다.

외국인이라고 가만히 있을 수 없다. 어느새 주변 관객들과 함께 악역을 향해 소리를 지르고 욕을 한다.

좌석 주변 사람들이 외국인이 내뱉는 욕을 듣고 배를 잡고 웃는다.

가장 심한 욕이 ‘첩의 자식’ 정도다.

욕을 하면서도 그렇게 죄의식을 느끼지는 않는다. 중요한 것은 누군가를 실제로 미워해서가 아니다. 경기장이라는 공간에서 잠시 역할에 몰입해 마음껏 소리를 지르는 것이다.

멕시코시티의 심장인 소칼로 광장. 고풍스러운 건축물로 둘러싸인 이 거대한 광장은 수많은 시민들이 모여 삶의 기쁨을 나누는 축제의 장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사회적 현실에 대한 뜨거운 분노의 목소리를 쏟아내는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사진=김승근 기자

소리 지르고 한바탕 웃는 것도 ‘웰빙’이다

심리학에서는 이처럼 강한 감정을 표현한 뒤 느끼는 해방감을 ‘카타르시스(catharsis)’라고 설명한다. 울거나 욕을 하거나 강한 감정을 표현한 뒤 긴장이나 부정적 감정이 줄어드는 경험을 말한다.

그렇다면 루차 리브레 경기장은 꽤 특별한 카타르시스의 공간이다.

평소라면 체면 때문에, 주변의 시선 때문에 삼켰을 감정을 이곳에서는 선수와 경기라는 안전한 울타리 안에서 마음껏 쏟아낼 수 있다.

소리를 지르고, 야유하고, 웃고 나면 목은 쉬어도 마음은 한결 가벼워진다.

스트레스를 없애는 특별한 치료법이라기보다, 잠시라도 일상의 긴장을 내려놓고 감정을 밖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어쩌면 멕시코시티의 루차 리브레가 주는 웰빙은 바로 여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건강을 위해 조용히 명상하거나 숲을 걷는 것만이 웰빙은 아니다. 때로는 목이 쉴 때까지 소리를 지르고 한바탕 웃는 것도 삶의 무게를 잠시 내려놓는 방법이 될 수 있다.

왜 멕시코시티 투어버스의 광고판에 가면을 쓴 레슬러가 등장하는지, 루차 리브레를 보고 나면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레포르마 거리에 설치된 아요치나파 사범대생 실종자 43명의 추모 천막과 영정 사진들. 천막에는 정부의 조사 결과를 규탄하는 문구가 적혀 있다. 사건 발생 후 10년이 지난 지금도 유가족과 시민들의 진상 규명 요구가 이어지고 있다. 사진=김승근 기자

노(怒·enfado)

루차 리브레 경기장에서 웃고 소리 지르며 가상의 분노를 쏟아냈다면, 멕시코시티의 거리에서는 실제 분노가 터져 나온다.

‘개혁의 길’이라는 뜻의 파세오 데 라 레포르마(Paseo de la Reforma)는 멕시코시티를 대표하는 중심대로다.

길 양쪽으로 상점과 대형 쇼핑몰이 들어서 있어 평소에도 시민과 관광객으로 북적이지만, 각종 시위가 이어지는 곳이기도 하다.

이 도로에서 펼쳐지는 대표적인 분노의 목소리는 여성 표적 살인을 뜻하는 ‘페미사이드(Femicide)’ 처벌 강화 요구다.

매일 평균 10명의 여성이 목숨을 잃지만 가해자 처벌 비율은 2% 남짓에 불과한 현실 앞에, 보라색 옷을 입은 시민들은 레포르마 대로로 나와 정의를 촉구한다.

레포르마 대로 한복판, 콜럼버스 동상이 있던 로터리는 여성폭력과 실종에 항의하는 여성운동의 상징적 공간으로 바뀌었다.

2021년 여성운동 단체들이 이곳을 점거한 뒤 ‘투쟁하는 여성들의 로터리(Glorieta de las Mujeres Que Luchan)’라고 이름 붙이고, 주먹을 치켜든 여성 형상의 상징물을 세우면서다.

멕시코시티 콘데사거리에 있는 길거리 이발소. 남녀공용미용실(Peluqueria unisex)을 뜻하는 일러스트레이션이 재미있다. 가격은 50페소(3500원). 사진=김승근 기자

10년 넘게 이어지는 진실 규명의 목소리

지방에서 발생한 사건의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상경 시위도 끊이지 않는다.

대표적인 사례가 2014년 게레로주에서 발생한 사범대생 43명 실종 사건, 이른바 아요치나파(Ayotzinapa) 사건이다.

사건의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시위가 10년 넘게 이어지고 있다.

2026년 9월 26일에도 사건 12주기를 맞아 레포르마 대로에서 추모와 규탄 집회, 행진이 진행됐다.

사건이 발생한 게레로주는 강력 범죄와 카르텔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미국 국무부는 현재 게레로주를 범죄와 납치 위험 등을 이유로 가장 높은 수준의 여행경보(레벨 4) 지역으로 분류하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독창적인 도서관 중 하나로 알려진 멕시코시티의 바스콘셀로스의 내부. 철골 구조로 만들어진 서가들이 마치 공중에 떠있는 느낌을 준다. 멕시코시티는 이 도서관같은 독특한 건축물의 보고이기도 하다. 사진=김승근 기자

대기오염과 차량 2부제가 불러온 뜻밖의 아이러니

멕시코시티의 대기오염 역시 시민들의 일상을 괴롭혀온 문제다.

2016년 봄 대기오염 비상사태로 강도 높은 차량 운행 제한(2부제)이 시행되자 예상치 못한 현상이 나타났다.

멕시코 자동차딜러협회(AMDA)에 따르면 당시 운행 제한일을 피하려는 수요가 몰리면서 중고차 거래가 단기간에 10% 이상 급증했다.

여기에 신차 구매까지 늘면서 2016년 멕시코 신차 판매량은 역대 최고 수준인 160만 대를 넘어섰다.

차량 운행을 제한했더니 오히려 자동차를 더 사는 아이러니가 벌어진 것이다.

운행 제한을 피하려면 제한일이 다른 차량을 한 대 더 가지면 된다는 우스갯소리까지 나왔다.

자동차를 살 여력이 있는 사람에게는 차량 운행 제한이 오히려 덜 불편한 제도가 될 수 있다는 냉소와 음모론이 힘을 얻기도 했다.

국립인류학박물관의 상징인 거대한 물분수 엘 파라구아스(El Paraguas). 중앙 안뜰을 압도하는 거대한 지붕 위로 시원한 물줄기가 사방으로 쏟아져 장엄한 느낌을 준다. 박물관은 울창한 차풀테펙 공원 부지 안에 있어 함께 둘러보기 좋다. 사진=김승근 기자

매연과 분노의 도시를 치유하는 거대한 도심 허파

시위대의 분노와 매연, 차량 운행 제한으로 상징되는 도시의 진통 속에서도 멕시코시티 시민들이 숨통을 트는 공간은 레포르마 대로 가까이에 펼쳐져 있다.

도시의 거대한 허파라 불리는 차풀테펙 공원(Bosque de Chapultepec)이다.

뉴욕 센트럴파크의 두 배가 넘는 초대형 도심 숲이다.

격렬한 시위와 매연으로 얼룩진 ‘분노(怒)’의 거리에서 잠시 벗어나면 만나는 거대한 휴식의 장이다.

어떤 날은 경기장에서 목이 쉴 때까지 소리를 지르고 웃으며 마음속의 긴장을 털어내고, 또 어떤 날은 도시의 숲을 걸으며 숨을 고른다.

멕시코시티는 그렇게 웃음과 분노, 소리와 침묵 사이에서 삶의 균형을 찾는 또 다른 웰빙의 모습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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