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0월 03일 (토)

뱀파이어는 전설일까, 환자일까⋯달빛 아래서만 살아야 하는 사람들

[차 권하는 의사 유영현의 1+1 이야기] 64. 월광소나타와 월광백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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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파이어는 전설일까, 환자일까⋯달빛 아래서만 살아야 하는 사람들
밤이면 무덤에서 나와 사람의 피를 빤다는 흡혈귀. 햇빛을 피해 살아야 하는 희귀병 환자의 모습이 뱀파이어 전설과 겹쳐지면서, 둘을 연결 짓는 해석이 나오기도 했다. 사진=클립아트코리아

과거에는 월광(月光, moonlight)이란 단어가 나오면 제일 먼저 베토벤 《월광소나타》가 떠올랐다. 그러나 《월광백》(月光白, Moonlight White)이라는 차를 알게 된 이후부턴 월광이란 단어가 나오면 월광백차가 앞서 생각난다.

교과서가 사실로 만든 '월광소나타'의 전설

베토벤의 《월광소나타》는 세계인의 극진한 사랑을 받는 피아노 소나타다. 이 곡의 정식 제목은 《환상곡 풍의 소나타》다. ‘월광’이라는 별명은 베토벤 사후에 시인 루트비히 렐슈타프가 붙인 비유에서 나왔다. 그 비유에는 전설 같은 이야기도 붙여졌다.

학창 시절에는 작곡가 홍난파가 월광곡 유래에 대해 쓴 글이 교과서에 실려 있었다. 그 글에 따르면 《월광소나타》는 ‘눈 먼 소녀의 피아노 소리를 듣고 그 집에 들어간 베토벤이 소녀의 청을 받고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달빛을 바라보면서 즉흥적으로 연주한 곡’이다. 우리는 이를 사실로 알고 배웠다.

하지만 홍난파의 글은 곡이 탄생하고 한참 지나 유럽에서 만들어진 전설 정도 이야기를 옮겨온 글이다. 게다가 교과서의 그 글은 홍난파가 쓴 원문 에세이도 아니다. 홍난파의 원문은 한자 용어와 숙어가 나오는 “하더이다” 스타일의 아주 고풍스런 글이다. 홍난파의 원본 글을 읽으면 곡의 유래가 아득한 전설처럼 읽힌다.

결국 교과서에 수록된 글은 학생들을 위해 각색한 현대문으로 누가 읽어도 사실처럼 읽힌다. 어쨌든 멜로디의 단순함, 친숙함에다 교과서에 실린 글이 더해져 《월광소나타》는 대다수 국민이 기억하는 클래식 명곡이 되었다.

왼쪽 위에서부터 시계방향으로 베토벤 초상(위키피디아), 월광소나타 악보 일부(pixels), Porphyria 환자(Am Derm Nev), XP 환자(DermNet), 월광백 (공부차, 표지), 월광백차병면(공부차). 사진=유영현 제공

햇빛이 독이 되는 두 가지 '달빛병

의학을 공부하면서 달빛병 혹은 월광병(moonlight disease)이라 불리는 두 가지 병을 알게 되었다. 달빛병의 정식 의학 명칭은 포르피리아(porphyria)와 착색성 건피증 (xeroderma pigmentosum, XP).

두 질병은 원인과 발병 기전이 전혀 다르지만, 환자들이 햇빛을 두려워해야 하는 삶을 산다는 점이 같다. 달빛병은 낭만적이기도 하지만 비극적인 뉘앙스도 담았다.

포르피리아는 뱀파이어(vampire, 흡혈귀) 전설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병이다. 포르피리아는 헴(heme) 합성 과정의 효소 결함에서 비롯된다.

헴은 우리 몸이 산소를 운반하고 에너지를 내는 데 필수적이다. 헴은 여덟 단계의 합성 과정을 거치는데, 이 과정 중 특정 효소가 유전적으로 혹은 후천적으로 결함이 생기면 그 중간 산물이 체내에 축적된다.

이 축적된 화합물이 ‘포르피린’이다. 포르피린이 빛에 노출되면 반응해 피부에 손상을 일으키거나, 신경계를 자극하여 복통·신경병증을 유발한다.

포르피리아는 크게 두 가지 형태로 나뉜다. 피부형은 햇빛에 노출된 피부가 붉게 변하고, 심하면 수포와 괴사가 생긴다. 상처가 아물 때 흉터가 남고, 얼굴이나 손이 일그러지기도 한다.

급성 간형은 피부보다는 신경계 증상이 두드러진다. 복통, 구토, 마비, 정신증 같은 증상이 주기적으로 나타난다.

창백한 얼굴, 붉은 소변⋯뱀파이어가 된 환자들

월광병은 피부형 포르피리아를 의미한다. 환자들은 햇빛을 피해야만 증상을 막을 수 있으므로, 낮에는 집 안에 숨어 있고, 밤이 되어서야 움직일 수 있다. 이 때문에 달빛 아래에서만 살아가는 사람의 운명을 담아 “달빛병”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포르피리아는 희귀 질환이다. 완치는 불가능하다. 증상 조절은 가능하다. 햇빛을 피하고, 자외선 차단제를 사용한다. 철분 과다와 관련된 경우는 정기적인 혈액 빼내기를 한다. 급성 발작 시에는 헤민(hemin) 주사를 투여해 헴 합성을 억제한다.

포르피리아는 중세 유럽에서 전해지던 뱀파이어 전설과 연결되었다. 햇빛에 손상되어 낮에는 숨어 있고, 창백한 피부, 치아와 얼굴의 변형, 붉은 소변 등이 뱀파이어의 모습과 닮았기 때문이다.

뱀파이어가 피를 마신다는 이야기도, 포르피리아 환자들이 헴을 얻기 위해 동물의 피를 마셨다는 민간요법과 섞여 생긴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햇빛을 두려워해야 하는 병” 그리고 “전설의 병”이라는 상징성을 갖게 되었다.

DNA 복구가 고장 난 아이들, 착색성 건피증

착색성 건피증(XP)은 포르피리아와 전혀 다른 계열의 질환이다. XP는 DNA 수선 유전자의 결함 때문에 생기는 병이다. 사람 세포는 자외선에 의해 DNA가 손상되면 즉각 복구하는 능력이 있다.

하지만 XP 환자는 이 복구 기능이 고장 나 있어, 햇빛을 조금만 받아도 DNA 돌연변이가 축적된다. 그 결과 어린 나이부터 심한 주근깨, 피부 노화, 그리고 피부암이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눈도 자외선에 손상되어 각막염, 백내장 같은 합병증이 생긴다.

XP 환아의 삶은 극도로 제한적이다. 외출 시 온몸을 두껍게 가려야 하고, 창문에도 자외선 차단 필름을 붙여야 한다. 사실상 달빛 아래에서만 자유로울 수 있는 아이들이기에, 언론은 이 병을 월광병이라 불렀다.

XP는 극도로 희귀하다. 전 세계적으로 100만 명당 1명꼴 정도이고 일본과 북아프리카 일부 지역에서 다소 높다. 아직 근본적 치료는 없다. 관리가 핵심이다. 철저한 햇빛 차단이 중요하며 정기적 피부 검진으로 피부암을 조기 절제하여야 한다. 유전자 치료, 효소대체요법 연구가 진행 중이다.

전혀 다른 두 질병이 같은 별칭을 얻은 이유는 둘 다 결국 햇빛을 피해야만 생존할 수 있다는 공통분모 때문이다. 햇빛에게서 생명을 위협받고 외로움과 격리된 삶을 살아야 하는 사람들에 대한 상상력. 공포, 연민이 담겨 이들이 월광병으로 묶였다.

가을 찻잎을 달빛에 말린 차, 월광백

월광병은 희귀해서 내게 특별한 기억을 남기지 않은 병들이다. 반면 백차의 하나인 《월광백》은 나를 그냥 스쳐 지나가지 않았다.

백차는 중국 푸젠성이 대표 산지다.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맛있는 백차가 생산된다. 주로 봄철 어린싹을 따서 말려 만든다.

반면 《월광백》은 윈난성에서 가을철 찻잎을 사용하여 달빛 아래에서 말려 제작되는 백차다. 달빛 아래에서만 말린 차로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낮에도 통풍 좋은 그늘에 두고 밤에는 달빛을 맞으며 수분을 빼서 건조한다. 윗면은 은백색의 솜털이 그대로 남고, 뒷면은 검게 변해 대비가 선명하다. 이 흑백의 조화가 바로 달빛 아래 빚어진 이미지와 맞아떨어진다.

《월광백》을 처음 맛보고 은은하고 달콤하며 가벼운 꽃향기에 반했다. 묵직하고 깊은 단맛, 때로는 대추나 꿀, 말린 과일 같은 풍미가 두드러진다. 가을 잎 특유의 두터움 때문에, 여러 번 우려내도 맛이 오래 유지되었다. 《월광백》은 내 애호차가 되었다.

과거 《월광백》은 때로는 백차, 때로는 보이차의 한 갈래로 팔았다. 실제로 가공 방식에 따라 발효 정도가 달라서, 어떤 《월광백》에서는 보이차 특성이 강하게 드러나기도 한다. 이 때문에 백차와 보이차의 경계선에 있는 차로 불리기도 한다.

《월광백》은 이름이 매력적인 차다. 서구의 차 애호가들에게도 “Moonlight White”라는 이름 자체가 큰 매력을 주었다. 달빛에 말린 차에는 달의 정기가 깃들어 있다느니 가을 찻잎은 사람을 진정시키고 몸과 마음을 맑게 해준다는 미스터리하고 낭만적인 스토리텔링도 더해졌다.

차를 마신다는 것은 그 차가 자라난 땅과, 차를 빚어낸 사람들의 이야기를 함께 음미하는 일이다. 《월광백》을 우려내는 순간, 한밤중 찻잎에 닿은 달빛부터 달빛 아래 말려진 찻잎의 그림자, 산지의 가을바람까지 찻물에 함께 녹아 나온다.

한 잔의 차가 바꿔 놓은 '월광'의 뜻⋯같은 단어, 달라진 기억

글의 처음으로 돌아간다. 월광이란 단어만 만나면 《월광소나타》가 생각나던 내게서, 이제는 월광백차가 앞서 생각나게 되었다. 그동안 ‘월광’이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변하지 않았다. 변한 것은 나의 주의(attention)가 머무는 자리다. 《월광백》 한 잔이 주는 달큰한 끝맛이 저장된 후 ‘월광’이라는 단어에 대한 나의 주의는 《월광소나타》에서 《월광백》으로 자리를 옮겼다.

단어는 사전적 의미보다는 에피소드를 따른다. ‘월광’이란 단어는 근래 내게서 에피소드를 축적해가는 월광백을 먼저 불러낸다.

“언어의 의미는 사용에서 나온다(The meaning of a word is its use in the language).”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의 통찰이다.

유영현 티클리닉 디렉터(오디오칼럼 1+1이야기 https://www.youtube.com/@yhyoo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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