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0년대 중반부터 ‘홍콩 누아르’라는 이름으로 주윤발, 장국영, 유덕화 등을 주연으로 한 갱 영화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롱코트를 입고 라이터 대신 위조지폐로 빨간 말보로에 불을 붙이며, 의리 앞에서는 죽음도 마다하지 않던 선글라스 낀 사내들은 당시 청춘들의 우상이었다.
그 모습에 매료돼 더운 홍콩에서 왜 롱코트를 입었는지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들의 ‘멋진’ 모습을 따라 하는 것이 스스로도 멋있어 보이는 ‘길’이라고 믿었던 시절이었다.
세월이 흘러 세기가 바뀌었고, 마치 맺힌 한이라도 풀 듯 짬이 생길 때마다 홍콩을 찾았다.
대중교통부터 편의점과 식당 결제까지 손안에서 해결되는 옥토퍼스 카드는 항상 넉넉히 채워뒀다.
지하철 노선을 다 외운 건 기본이고 한국에서 김밥을 사들고 가 다음 날 트레킹할 때 꺼내 먹기도 했다.
그만큼 홍콩은 심리적으로도, 물리적으로도 가까운 여행지였다.
어쩌면 그 가까움의 상당 부분은 마음속에 담아둔 누아르 시절의 애상 때문이었을 것이다.
우리가 기억하는 홍콩, 그리고 그 너머
야경하면 빠지지 않는 도시가 홍콩이다.
그 야경을 대표하는 ‘심포니 오브 라이트(A Symphony of Lights)’는 2004년 시작됐다. 굳이 밤 8시까지 기다려 이 쇼를 보지 않더라도 침사추이나 홍콩섬 어느 쪽에서든 바라보는 야경은 충분히 인상적이다.
1997년 영국에서 중국으로 주권이 반환된 뒤 홍콩의 정치·사회 환경도 크게 달라졌다.
홍콩의 변화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같은 야경이라도 조금 다르게 바라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홍콩은 홍콩이다.
빅토리아 하버를 수놓는 불빛과 빼곡한 고층빌딩, 좁은 골목과 활기찬 시장, 그리고 그 사이로 이어지는 일상의 풍경은 여전히 이 도시의 표정을 만든다.
홍콩은 오랫동안 ‘쇼핑 천국’으로도 유명했다. 대부분의 수입품에 관세가 없는 자유항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홍콩을 쇼핑과 빌딩의 도시로만 기억한다면 정작 이 도시의 중요한 한쪽을 놓치게 된다.

홍콩의 또 다른 얼굴, 산과 숲 그리고 바다
홍콩의 면적은 서울의 두 배에 조금 못 미친다. 인구는 750만 명을 넘어 서울의 80%에 가깝다.
하지만 이 숫자만 놓고 홍콩이 서울보다 덜 빽빽하다고 생각하면 실제 풍경과는 거리가 있다.
홍콩 전체 면적의 약 4분의 3은 여전히 ‘컨트리사이드(countryside)’다. 24개의 컨트리파크를 비롯해 산과 숲, 해안 등 자연이 넓게 남아 있어 실제 도시가 형성된 공간은 전체 면적에 비해 훨씬 좁다.
고층빌딩이 빽빽하게 들어선 홍콩의 도시 풍경은 이런 지리적 조건과도 무관하지 않다. 좁은 도시 공간에 인구와 상업시설이 집중되면서 우리가 익숙하게 보는 홍콩의 모습이 만들어졌다.
그런데 홍콩을 걷다 보면 의외의 장면을 만나게 된다. 빌딩 숲을 조금만 벗어나도 산과 숲, 바다가 펼쳐진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이 선정한 세계 20대 드림 트레일인 맥리호스 트레일(MacLehose Trail)을 포함해 장거리 트레일이 4개나 있다. 총 길이는 298km에 이른다. 이 밖에도 다양한 하이킹 코스가 이어진다.
현재 올트레일스(AllTrails)에는 홍콩의 하이킹을 비롯한 다양한 야외활동 트레일이 577곳이나 등록돼 있다.
쇼핑몰과 고층빌딩으로 가득한 도시의 이미지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빽빽한 도시를 벗어나 능선 위에 서다
홍콩의 트레일 가운데 비교적 쉽게 경험할 수 있는 곳이 ‘드래곤스 백(Dragon’s Back)’이다.
구불구불 이어지는 능선이 용의 등줄기를 닮았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홍콩관광청은 전체 코스를 약 8km로 안내하며, 평균 하이킹 시간은 약 4시간, 난이도는 ‘중간(Moderate)’으로 분류한다.
2004년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Time)은 이 길을 ‘아시아 최고의 도시 하이킹 코스(Best Urban Hike in Asia)’로 선정하기도 했다.
출발점인 토테이완에서 숲길을 따라 올라 능선에 서면 풍경이 확 달라진다. 눈앞에는 남중국해의 푸른 바다가 펼쳐지고, 능선 아래로 해안과 해변이 이어진다.
조금 전까지 지하철과 버스, 쇼핑몰과 빌딩 사이를 지나왔는데 어느 순간 도시의 소음이 희미해지고 바람 소리와 새소리가 들린다.
홍콩 트레킹의 매력은 바로 이 극적인 변화에 있다.

한 걸음마다 비워내는 자극, ‘그린 엑서사이즈’
능선을 따라 걷는 것이 단순한 기분 전환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최근에는 자연 속에서 걷거나 운동하는 이른바 ‘그린 엑서사이즈(Green Exercise)’가 건강과 웰빙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관한 연구도 활발하다.
연구들이 주목하는 것도 결국 걷기와 자연환경의 결합이다.
걷기는 심장과 근육을 움직이는 신체활동이다. 여기에 자연환경이 더해지면 시각과 청각, 촉각 등 여러 감각이 도시와는 다른 방식으로 자극된다.
빌딩과 간판 대신 바다와 숲을 바라보고, 자동차 소리 대신 바람과 새소리를 듣고, 일정한 호흡에 맞춰 한 걸음씩 내딛는다.
어쩌면 트레킹의 웰니스 효과는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몸을 움직이면서 동시에 지나치게 많은 정보와 자극을 받아온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는 것이다.

산길 끝에서 마주한 삶과 죽음의 풍경
능선을 내려오다 보면 케이프 콜린슨(Cape Collinson) 일대의 공동묘지와 화장 시설을 지나게 된다.
푸른 바다와 산을 바라보며 걷던 길에서 갑자기 삶의 마지막을 떠올리게 하는 공간과 마주치는 셈이다.
홍콩에서는 화장이 일반적인 장례 방식이다. 그런데 홍콩의 화장시설은 우리나라에서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외곽에 있는 게 아니다.
다이아몬드힐 화장장의 경우 고층 주거지역과 학교 등이 들어선 도심에 자리하고 있으며, 가장 가까운 주거단지는 약 200m 거리에 있다.
한국에서는 아파트 단지 가까이에 화장장이나 공동묘지가 들어선다고 하면 흔히 ‘님비’부터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홍콩의 풍경은 조금 다르다.
죽은 사람이 가까이 있으면 오히려 가족이나 후손을 지켜준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물론 이것이 홍콩 사람들의 보편적인 믿음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사람마다 죽음이나 풍수를 받아들이는 방식도 다르기 때문이다.
어쩌면 홍콩의 독특한 도시 풍경은 이런 문화와도 무관하지 않은지 모른다. 빌딩 숲 가까이에 묘지와 납골시설이 자리하고, 산길을 걷다 보면 화장시설과 마주친다.
삶과 죽음의 공간이 이처럼 가까이 붙어 있는 풍경은 꽤 낯설었지만 한편으로는 여행의 풍경 속에 죽음도 자연스럽게 자리하고 있음을 새삼 보여줬다.

영화 속 멋에서 내 호흡대로 걷는 삶
화려한 마천루와 쇼핑몰의 소란스러움에서 벗어나 다양한 트레킹 코스를 걷다 보면 홍콩의 또 다른 얼굴을 만나게 된다.
복잡한 도시의 풍경과 사회의 변화는 잠시 뒤로 물러나고, 눈앞에는 푸른 바다와 산등성이, 그리고 그 사이를 걷는 자신의 호흡만 남는다.
어쩌면 웰빙은 거창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잘 먹고 잘 자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걷고 숨 쉬고 바람을 느끼면서 지금 살아 있는 자신의 몸과 주변의 자연을 온전히 느끼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웰빙일 수 있다.
홍콩의 트레킹 코스는 빌딩 숲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도 평범하지만 잊고 살기 쉬운 웰니스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오래전 홍콩에서 찾았던 건 영화 속 주인공들의 멋이었다.
세월이 흐른 지금, 그 멋은 어느새 한 발 한 발 걸어가는 능선으로 바뀌어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