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암 고쳐온 칼잡이, 이젠 “부산을 방사선치료 메카로”

동남권원자력의학원 제7대 이창훈 의학원장 인터뷰

의사들에게 뇌종양 중에서 치료하기 가장 어려운 걸 고르라면 교모세포종(glioblastoma, 膠母細胞腫)을 첫손가락으로 꼽는다. 뇌신경 교(膠)세포에 생긴 종양 중 가장 악성(惡性)이어서다.

전체 뇌종양의 12~15%에 이를 만큼 많이 생기지만, 종양이 매우 빠르게 커지는 특징이 있어 치료가 어렵고, 그래서 사망률도 높다.

왜 생기는지는 아직 모른다. 그동안 수많은 의사와 연구자들이 이 문제에 매달렸다. 가장 유력한 가설은 유전자 변이 때문이라는 것.

바로 그 가설의 스타트라인에 한국인 의사 한 사람이 있다. 신경외과 전문의 이창훈. 암 치료로 유명한 미국 ‘엠디앤더슨’(MD Anderson)에 연수(1997~98년) 가서 교모세포종 연구를 하다 ‘우연히’ 발견했다.

다양한 뇌신경 교종 검체에서 유전자 프로파일링을 통해 교모세포종에 특징적으로 과(過)발현되는 유전자를 발견하고, 이를 1998년 ‘암연구(Cancer Research)’에 발표했다.

앰디앤더슨 연구실은 이를 더 발전시켜 2000년 뇌종양 분야 국제학술지인 ‘신경종양학(Neuro-Oncology)’에 ‘분자유형에 의한 인체 신경교종의 분자생물학적 분류’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바로 그해, “올해 가장 훌륭한 신경종양학 논문”에 수여하는 ‘루빈스타인상(賞)’을 받았다. 이창훈 박사도 공저자 중 한명이었다.

이 논문은 20여 년이 지나 2016년 뇌종양 분류법을 나오게 한 역작으로 꼽힌다. 그럼에도 그는 “단지 운(運)이 좋았다”라고만 했다. 하지만 그가 평생 신경종양학을 하게 된 계기가 됐다. 난치성 교모세포종을 ‘72시간 정맥주사’라는 새로운 접근법으로 치료에 성공, 세상의 주목도 받았다. 2002년, 우리나라에 사이버 나이프도 그가 처음 도입했다.

[사진=동남권원자력의학원]
서울대 의대 출신으로 서울대병원에서 의학박사와 신경외과학 전문의를 땄다. 첫 직장, 한국원자력의학원에서만 31년을 봉직했고, 의학원 산하 원자력병원장도 지냈다.

그가 지난해 11월, 동남권원자력의학원(부산 기장군) 제7대 의학원장에 부임하며 평생 처음으로 ‘객지’ 생활을 시작했다.

– 이번 의학원장이 의사 생활 마지막(?) 보직일 수도 있겠다.

“그동안 몸담아 온 한국원자력의학원은 1963년 방사선의학연구소로 출범한 이래 ’방사선의학’으로 우리나라를 대표해왔다. 또 원자력병원은 우리나라 첫번째 암 전문병원이다. 코발트-60 치료기를 처음 도입했고, 감마 카메라와 PET/CT, 사이버 나이프 등도 처음으로 진료에 이용하기 시작했다. ‘국내 최초’가 많다. 거기에 의료용 방사성동위원소를 생산하고, 의료용 가속기를 개발하는 등 방사선의학 기술을 고도화하는 허브(hub) 역할도 해왔다.”

– 그런 점에서 부산 동남권원자력의학원에도 특별한 미션이 있을 텐데.

“다른 병원들과는 태생부터가 다르다. 보건복지부가 아닌,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소속의 ‘과학기술특성화병원’이다. 방사선의학 R&D, 방사성동위원소의 생산 분배 연구, 그리고 국가 방사선 비상진료를 한다. 지난해 연말, ‘방사선의학 실용화센터’도 문을 열었다. 전문적인 암 진료를 하면서, 동시에 첨단 의·생명 R&D 결과를 임상에 적용하며 실용화하는 플랫폼 역할도 하는 거다. 올해엔 신약 GMP 시설을 구축하고, 첨단재생의료 실시기관으로 지역의 다른 기관들과 상생하는 개방형 플랫폼의 역할을 더 확대한다.”

– 그런 역할을 할 동남권의학원이 한동안 침체기를 겪으며 여러 한계에 봉착해 있는 듯하다.

“수도권에 유명한 의사들이 많지만, 여기 와서 보니 우리 병원 의료진 수준이 절대 뒤처지지 않는다. 임상 경험 풍부하고, 여러 분야의 의료진이 모여 환자에게 어떤 게 최적일까 고민한다. 방사선의학 강점을 살려 ‘방사선 색전술’과 ‘암 냉동제거술’, ‘복강 내 항암온열요법(HIPEC)’등 고난도 암 치료도 두루 시도하고 있다. 다른 병원에선 접하기 힘든 수술도 많다. 항문을 통한 직장암 절제술, 폐암 구역 절제술이 그런 것이다. 쉽지 않은 ‘대뇌동맥류 코일 색전술’을 연간 50례 이상 하고 있다. 응급환자가 오면 언제, 어디에 있더라도 바로 달려가야 하는 고단한 삶이 기다리고 있는데 말이다.”

그는 “올해 말이면 ‘심뇌혈관질환센터’도 문을 연다”고 했다. “이것도 골든타임을 다투는 응급 시설이다. 부산 기장군과 울산 울주군까지 나서서 지역주민들을 위한 필수의료 시설로 만들었다. 환자를 위한 마음이 없다면 시작조차 하기 어려운 시도들”이라 설명했다.

– 그래도 서울로만 가려는 환자들은 지금도 넘쳐난다.

“역시 시설과 전문인력의 격차 때문인 듯하다. 하지만 그게 서울까지 오가는 큰 불편을 감수해야 할 만큼 크냐 하면 꼭 그렇지는 않다. 암 치료는 하루 아침에 끝나지 않는다. 수술과 방사선, 항암치료까지 몇 년이 걸리는 경우도 많다. 역설적인 상황도 있다. 서울에서도 치료가 어려워 포기하고는 지방으로 다시 내려와 집 근처 병원에서 치료받는데, 그러다 결국 사망하면 ‘지방이라서 그렇다’고들 하더라. 오해다. 우리 병원에도 그런 환자들이 찾아온다. 서울에서도 치료가 어렵다는 이야기를 듣고 여기 왔다면 질환 중증도가 더 높은 것 아닌가. 예후를 좋게 하기 위해선 더 잘 보살펴야 하고, 그래서 직원들 근무 강도는 더 높다.”

– 동남권의학원은 그래도 방사선치료에 특장점이 있지 않은가.

[사진=동남권원자력의학원]
“물론, 맞다. 우리가 거기에 특장점이 있다. 하지만 암 치료에서 해외와 국내, 가장 격차가 큰 게 바로 방사선치료다. 미국과 유럽 암 환자는 50% 이상이 방사선치료를 받는데, 우리나라에선 29%만 방사선치료를 받는다. 또 서울에선 방사선치료 받는 비율이 44%에 육박하지만, 동남권은 12%만 받고 있더라.”

– 방사선 치료율에 그렇게 차이가 큰 건 왜 그런가.

“우리나라 사람들 마음에 방사선치료에 대한 심리적 거부감이 아직 큰 게 한 원인인 듯하다. 의료용 방사선치료가 갖는 특별한 효과를 아직 잘 모르시는 것 같기도 하고….  또 한 가지는 서울과 지방 사이의 격차다. 똑같은 치료를 굳이 서울까지 가서 받으며 경제적, 정신적 고통을 감내하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 초고령화 시대에 암 환자가 더 빠르게 늘고, 방사선치료도 더 일반화됐을 때도 그런 불편이 계속되야 하느냐 염려된다.”

그는 이 대목에서 “신경외과, 그중에서도 뇌종양을 평생 치료해온 제 입장에서 감히 말씀드리면 방사선치료를 포함한 암 치료에서 동남권원자력의학원은 국내 최고 수준”이란 점을 재차 강조했다. 이어 “가까워서 더 자주 진료를 받을 수 있으니 지역 환자에게 오히려 더 유리한 측면도 있다”면서 “백번을 양보해도, 서울이 정말 잘하는 분야는 거기서 고쳐야겠지만, 지방도 충분히 잘하는 분야는 여기서 받는 것이 유리한 거다. 무조건 서울부터 찾는다, 그게 현명한 선택이겠는가”고 물었다.

“예를 들어 자궁경부암을 완전히 없애주는 치료는 동남권에서도 세 곳이나 하고 있다. 우린 방사성 동위원소를 암 부위에 삽입해 치료하는 ‘근접방사선치료(brachytherapy)’를 하고 있고….”

– 그렇다면 서울로만 가려는 환자들은 무언가 중요한 걸 놓치고 있다는 건가.

“동남권원자력의학원은 곧 국내 최첨단 방사선치료의 메카가 될 것이다. 우리 병원 인근에 대규모 ‘방사선의학 융합클러스터’가 추진되고 있지 않은가. ‘꿈의 암 치료기’라 불리는 중입자가속기, ‘방사선 신약 생산’을 위한 연구용 원자로가 수년 내에 들어온다. 특히 중입자가속기는 서울 세브란스병원 기종보다 조금 더 발전한 모델인데, 내달 중순 본격적인 공사를 시작해 3년 후, 2027년부턴 환자를 받는다.”

이 원장은 또 “연구용 원자로는 암을 ‘진단’하고 ‘치료’할 수 있는 다양한 방사성동위원소(RI)를 만들어낸다”고 했다. “진단과 치료, 두 분야에서 암 정복에 한 발 더 다가서는 것”이란 얘기다.

“예를 들어 방사성 동위원소 치매 진단 약을 먹고 PET CT를 찍으면 치매 유발물질이 얼마나 생겼고, 또 어느 부위에 얼마나 퍼져있는 지를 영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또 갑상선암이 여러 곳에 전이됐다면 아이오딘-131이라는 흩어져 있는 암세포들을 동위원소로 죽일 수도 있다. 현재 서울 원자력의학원 국가RI신약센터(KRICP)가 국내 유일의 방사성 동위원소 임상 기관이지만, 여기 동남권 연구센터도 우수의약품제조(GMP) 시설을 비롯한 공유형 연구플랫폼을 갖추고 있다. 더 확대해 나갈 것이다.”

그는 이어 “여기에 방사선기술을 활용하는 파워반도체 상용화센터, 동위원소 융합연구 기반시설까지 더해지면 우리나라를 떠나 동북아 최대의 ‘첨단 방사선 의과학 거점’으로까지 나아갈 수 있다. 전량 수입에 의존해오던 방사선 치료기의 국산화 연구도 가능하다”고 덧붙였다.

[사진=동남권원자력의학원]

– 이런 큰 비전과 잠재력을 구현하려면 특별한 동력과 함께 혁신도 필요할 것 같다.

“지난 연말, 막 부산에 내려와 있을 때다. 병원 직원들이 연 ‘의료질(質) 경진대회’를 보며 깜짝 놀랐다. 현장에서 환자를 돌보며 느낀 문제점을 발굴하고 개선점을 연구한 발표 내용에 한번 놀랐고, 새로운 치료법을 시도하고 연구까지 병행하는 의사들이 많아 또 한번 놀랐다. 이들이 조금 더 자신 있게 새로운 도전을 계속할 수 있도록 북돋아 주어야겠다 생각했다.”

그는 동남권원자력의학원이 ‘공공’병원으로서 특별한 자세도 갖고 있다고 했다. 환자 부담을 최대한 줄여주려 한다는 것이다.

“지난 2021년인가, 경실련에서 조사했던데 우리 병원이 전국에서 ‘환자 부담이 가장 낮은’ 종합병원이더라. 건강보험 보장률이 80.8%나 되니, 환자가 따로 부담해야 하는 진료비가 그만큼 적다는 거다. 고가 진료, 과잉 진료, 비급여 진료를 최대한 자제하고 있다는 얘기다.”

[자료=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이 원장은 인터뷰 끝에 우리나라 방사선치료 메카로 가기 위해 큰 그림을 그리고 있음도 내비쳤다.

“하지만 거기에 그치지 않고 부울경 주민들 위한 필수 진료를 더 보강하기 위해 우수한 의료진을 더 충원할 것이다. 환자 진료 동선을 감안한 시공간의 개선책을 찾고, AI 판독 등 인공지능 혁신 의료기술도 더 발빠르게 도입하려 한다. 방사선 의과학 융합클러스터에서 동남권원자력의학원이 어떻게 동반 성장을 해야 할 지 검토한 연구용역 결과가 조만간 나온다. 이를 바탕으로 올해부터 ‘최첨단 암 치료 허브’로 나아가기 위한 로드맵을 만들어 강력히 추진하려 한다. 계속 지켜봐달라.”

    윤성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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