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돌아보는 세월호, 그리고 다이빙벨
[김희덕의 잠수의학 세계]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사건은 단순한 선박 침몰 사고만으로 끝나진 않았다. 476명이 타고 있던 그 배는 정치적인 변혁, 노란 리본, 그리고 국가가 민간 선박 사고에도 책임이 있다는 특별한 선례를 남겼다.
거기서 300명이 넘게 죽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났다. 그 사이 우리 사회를 할퀸 상처는 꽤 아물었지만, 일부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기도 하다. 이를 잠수의학자 관점에서 되돌아보면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사고 당시, 필자는 대구 인터불고호텔에서 열린 대한응급의학회 초빙강사로 잠수의학, 잠수병을 강의하고 있었다. 그런데 강의하는 도중, 곳곳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일부 의사들이 급히 자리를 떴다. 무언가 큰 일이 일어났다는 긴박감이 밀려오면서,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강의는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사건의 실체를 알게 된 것은 행사장을 나와 식당에서 본 텔레비전 중계방송 덕분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 사고 사망지 인양 과정을 보고 있는데, 바닷 속 수중 폭발로 민간인 전문 다이버가 사고를 당했다는 속보가 떴다.
사망자들 중엔 내가 입원시킨 감압병 환자가 있었다. 자초지종을 알아보니, 그는 병원에서 외출 허가증을 받아선 바로 진도 팽목항으로 달려갔다 했다. 구조에 참여할 마음으로 자신의 친형 이름으로 등록을 하고는 구조에 나섰으나, 끝내 사망한 것이다.
나도 이젠 더 이상 '시청자'로만 머물러 있을 수는 없었다. 현장으로 즉시 달려가 중앙의료원 의료진을 대상으로 다이버들 안전을 위해 감압병에 대한 교육, 해군 구조함인 청해진 의료진들의 교육, 그리고 만약의 경우를 대비하여 의료인들과의 원격 의료 지원을 시작했다.
구조작업 사망자 중에 내 환자가..."더 이상 '시청자'로만 머물 순 없었다"
그러나 현장 돌아가는 사정은 너무 답답했다. 현장에 와 있는 정부(보건복지부, 해양수산부) 당국자들에 “응급의학 전문의는 있지만 (정작 필요한)잠수의학, 고압의학 전문의사는 어디 있는가? 전국 어느 대학병원에도 이쪽 자문할 의사조차 없다. 도대체 그동안 무엇 하고 있었던가?”라고 쏘아붙였다.
우리나라 의술은 여러 분야에서 세계적인 수준이 됐다. 일부 과목은 외국 의사들이 우리나라로 수련 받기 위해 먼 길을 마다 않고 찾아오기도 한다.
하지만 고압의학, 잠수의학은 국내 유수의 의대들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 심지어 국립대 병원들도 마찬가지다. 최근 몇몇 대학병원에서 고압산소 챔버를 구비했다고는 하나, 이를 다루는 의사들의 전문성 여부는 알 길이 없다.
하물며 관련 응급구조사, 챔버 오퍼레이터, 전문 간호사들이 양성돼 있는냐 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면 더 말할 필요조차 없다. 이 분야는 아직 '1980년대'에 머물러 있다. 그 때 도입한 낮은 진료수가조차 지금까지 그대로다. 40년간 제자리란 얘기다. 돈이 안 되는데, 대형 병원들에서 고가 장비를 설치하고 의료진 전문교육을 시킬 동인이 없기도 할 것이다.
세월호 구조 작업은 그 후에도 지지부진했다. 그러다 '전문적인' 구조 영역에 '비(非)전문적'인 사람들이 끼어들기 시작했다. 수심과 조류 등 바다 특성과 현지 상황을 알지 못하는 정치인들이 다이빙벨 얘기를 꺼내들었다.
수많은 갑론을박이 등장했다. '전문가' 행세를 하는 인사들이 매시간 텔레비전에 나와선 정부와 현장 지휘자들을 압박했다.
그때 '다이빙벨' 논란이 터졌다. 다이빙벨(Diving Bell)이란 중심도 수심(40~100m)에서 '바운스 다이빙'(Baunce Diving)이란 방법으로 다이빙할 때 잠수전문 선박 위에 고압챔버(Hyperbaric chamber)를 구비한 상태에서 할 수 있는 잠수법이다.
감압병이 4% 이상 생길 수 있는 매우 위험한 잠수법인 만큼 잠수 전문 선진국에서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감압병 전문 의료진이 있을 때 예외적으로 적용하는 위험한 잠수법이기도 하다.
특히 다이빙벨은 조류가 정지된, 아주 짧은 시간 동안에만 사용할 수 있다. 사용이 아주 제한적이라는 얘기다. 그래도 정치인들, 정치평론가들, 일부 언론들은 하루가 멀다하고 신문 방송을 통해 정부를 압박했다.
정부 당국자들도 비전문가들뿐이니 이에 대해 대응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했다. 사망자 인양 작업은 장비만 있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다이버를 비롯한 응급구난 시스템이 구비되야만 할 수 있는 매우 고난도의 구조술이다. 세월호 침몰부터 인양 구조작업까지 정말 얼토당토 않은 사건의 연속이었던 셈이다.
태국은 그러지 않았다. 세월호 사건이 일어나고 몇 년 후(2018년 6월)였다. 치앙라이주 유소년축구교실 소년(11~16세) 12명과 코치가 한 동굴에 갇혀 고립됐다.
그때 태국 정부는 세계적인 동굴구조 잠수전문가들을 비밀리로 불러왔다. 구조팀이 2주여만에 아이들을 완전히 구조할 때까지 태국 언론들은 있는 사실만 보도하지, 이래라 저래라 하지 않았다. 관련 전문가의 고유 영역을 존중해준 것이다.
세월호 사건, 우린 거기서 무엇을 배웠던가
그에 비해 우린 아직도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그 후유증이 지금도 남아있다. 세월호 인양에 투입된 민간 다이버들이 지금도 감압병에 시달리고 있고, 그 치료에 국가 예산이 투입되고 있는 걸 아는 이들은 많지 않다.
게다가 세월호 선박 인양에 대한 비용만을 계산해 중국 업체에 이를 위탁한 것은 커다란 실책이다. 우리나라 수중 구조전문업체들이 인양 기술을 습득하고 축적할 좋은 기회를 놓친 것이다.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세월호 사건이 다시 생긴다 해도, 우린 똑 같은 실수를 되풀이 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지식은 얕되, 말만 잘 하는 이들의 입에 좌우되는 세상에 우린 여전히 살고 있는 것 같으니까. 임진왜란 끝나고 서애 유성룡이 '징비록'(懲毖錄)을 왜 쓰려고 했는지, 그 이유를 짐작이나마 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