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변과 철학은 오래전부터 묘하게 연결돼 왔다. 사람들은 흔하고 하찮게 여겨지는 개똥에 철학이라는 말을 붙여 ‘개똥철학’이라는 표현을 만들었다. 체계 없는 개인적 생각을 낮춰 말할 때 쓰이지만, 때로는 일상 속 지혜를 뜻하기도 하고, 삶의 본질을 꿰뚫는 통찰을 의미하기도 한다.
대변을 다른 사람의 장에 옮겨 넣는 치료법인 ‘대변미생물이식’(Fecal Microbiota Transplantation, 대변이식)은 얼핏 철학과 거리가 멀어 보인다. 그러나 조금만 들여다보면 대변이식은 깊은 철학적 질문을 품고 있다. 과장해서 말하자면 대변이식은 철학적 사건이다. 사람의 똥은 뜻밖에도 철학의 한가운데로 들어왔다.
내 몸은 어디까지가 나인가
먼저, 대변이식은 존재에 관한 질문을 던진다. 철학의 출발점은 늘 존재론 (ontology)이다. 존재론은 “무엇이 존재하는가?”, “존재란 무엇인가?”를 묻는 철학 분야다. 몸에 대한 존재론적 질문의 대표는 “내 몸은 어디까지가 나인가?”이다.
대변은 내 몸에서 나온 것이지만, 밖으로 나오는 순간 버려진 것이 된다. 대변은 ‘나의 일부’이다가 ‘나 아닌 것’이 되는 애매한 존재다. 이것만으로도 대변은 존재론적 문제를 일으킨다.
그런데 대변이식은 존재론적 문제를 의료의 중심으로 불러온다. 다른 사람의 대변 속 미생물이 내 장에 들어와 자리를 잡고 병을 고친다니 “내 몸은 어디까지가 나인가?”라는 철학적 질문은 더 깊어진다.
우리 몸속 장내 미생물의 수는 인간 세포 수를 능가하고, 그들이 가진 유전정보도 인간 유전자보다 훨씬 많다. 이 미생물들은 우리의 면역 체계뿐 아니라 기분과 인지 기능에도 깊이 관여한다.
그렇다면 ‘나’라는 존재는 무엇으로 정의되는가? 나를 결정하는 것은 뇌일까, 유전자일까? 아니면 내 장 속에 함께 사는 미생물들일까?
대변이식은 이 질문을 일상의 수준에서보다 추상적인 철학 영역으로 끌어 올린다. 내가 ‘나’라고 느끼는 상태가 타인의 미생물 이식으로 달라질 수 있다면 존재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다. 그렇다면 나란 존재는 내가 아닌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고 변화하는 구조로 다시 이해되어야 한다.
나는 나를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대변이식은 인식에 관한 질문도 던진다. 인식론(epistemology)은 우리가 무엇을 안다고 말할 수 있는지, 그 앎의 근거는 무엇인지를 묻는 철학 분야다.
대변이식은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정말 알고 있는가?”라는 문제를 건드린다. 근대 철학은 자기 인식의 확실성에서 출발했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명제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장내 미생물의 존재와 미생물군을 바꾸는 대변이식은 이 확실성을 흔든다. 나의 기분, 판단, 건강 상태가 장 속 미생물의 구성과 균형에 영향을 받는다면 내 인식의 진짜 주체는 누구인가?
“나는 과연 나 자신을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무엇을 안다고 할 수 있는가?”
대변이식은 이 오래된 인식론적 질문을 다시 묻게 만든다. 대변이식은 질병을 이해하는 인식 자체도 바꿔 놓는다.
기존 의학은 병원체나 이상 조직, 유전자 변이에 주목했다. 하지만 장내 미생물 군집은 수많은 생명체가 얽힌 복잡한 생태계다. 이들이 일으키는 질병은 단순한 원인과 결과의 관계로 설명하기 어렵다. 이제 건강을 이해하려면 한 사람과 함께 사는 미생물들의 패턴과 변화, 그것이 다른 사람의 미생물에 의해 어떻게 흔들리고 회복되는지를 함께 보아야 한다.

가장 사적인 배설물이 타인을 살릴 때
대변이식은 가치의 문제도 불러온다. 가치론(axiology)도 전통적인 철학의 중심 분야다. 윤리학은 가치론의 일부이면서 가치론의 가장 큰 분야다. 윤리학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묻는 철학의 영역이다.
한 사람의 몸에서 나온 가장 사(私)적인 배설물이 다른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자원이 된다. 이때 기증자와 환자 사이에는 단순한 생물학적 교환을 넘어선 깊은 신체적 연결이 생긴다. 대변이식은 하나의 윤리적 실천이 된다.
우리는 타인의 대변을 받는 이 행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것은 윤리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리투아니아 출신으로, 프랑스에서 활동한 유태계 철학자, 레비나스(Emmanuel Levinas)는 철학의 중심을 내가 아닌 남에게 둔 철학자다. 그는 자신을 이해하기 전에 먼저 자기 앞사람에 대한 책임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그는 타자의 얼굴이 “나를 해치지 말라”고 말한다고 읽었다. 그리고 윤리를 제1의 철학으로 세웠다.
이식이 흔한 시대, 우리는 얼굴도 보지 못한 타자의 도움 속에서 살아가게 되었다. 대변이식도 우리가 얼마나 타인에게 의존하는 존재인지 보여준다. 레비나스의 생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대변이식이 그의 명제 ‘타자의 얼굴과의 만남’ 가치를 높여준다.
대변이식으로 자아와 타자의 경계도 흔들린다. 내 장 속에서 살아가는 그것(미생물)이 나인지 타자인지 불분명하다. 우리는 타자와 완전히 분리되어 완성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대변이식은 윤리의 범위를 더 넓혀야 한다고 우리에게 요구한다. 타자를 돌보고 받아들이는 일이 곧 나를 지키는 일이 되는 새로운 윤리 관점을 제시한다.
'낮은 기관' 장(腸)이 마음을 움직인다
대변이식은 현대 몸 철학의 지평을 더 넓혀준다. 근대 철학이 이성을 중심에 두었다면, 현대의 몸 철학은 장(腸)과 같은 ‘낮은 기관’에 주목한다.
장은 ‘제2의 뇌’라 불리며 감정과 기분, 심지어 판단에도 영향을 준다. 장내 미생물은 신경전달물질을 조절하며 ‘뇌와 장을 잇는 축’(Gut-Brain Axis)의 중요한 역할을 한다.
대변이식은 이런 몸 철학을 실제 치료의 장으로 끌어왔다. 우울증이나 자폐, 불안장애 같은 정신질환이 장내 미생물 조절을 통해 호전된다는 연구는, 우리의 마음과 감정조차 대변과 연결되어있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이 주제에 현대 철학이 들썩이지 않을 수 없다.
대변이식은 건강 개념에 대한 철학적 관점도 바꾼다. 대변 공여자가 먹고 마시는 일상적인 행위는 그의 몸속 생태계에 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대변이식 받을 타인의 몸에도 영향을 미치는 사건이 되었다. 이는 건강이 독립된 개체의 완전성이 아니라 타자와 맺는 올바른 관계의 회복이라는 현대 철학적 관점을 지지한다.
대변이식은 현대 기술이 인간의 몸에 깊숙이 개입하는 사례이다. 대변이식을 통해 우리는 미생물 생태계를 설계하고 이식함으로써 생명을 구성하는 요소를 직접 조절한다.
20세기 프랑스 철학자, 푸코(Paul-Michel Foucault)가 말한 ‘생명관리권력’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점점 관리되고 조정되는 생명체가 된다. 이 과정에서 자유와 통제, 자연과 인공의 경계에 대한 철학적 질문이 이어진다.
대변은 의료 규제 대상이다. 치료제이지만 감염 위험이 있는 물질이므로 대변을 엄격히 관리하는 법 제정이 필요하다. 누가 기증할 수 있는지, 어떻게 검사할지, 어떤 조건에서 시술할지 모두 ‘생명정치’의 문제로 이어진다. 대변을 통해 국가와 제도가 생명을 어떻게 다루는지를 볼 수 있다.
차 한 잔에서 사람똥철학까지
차(茶)도 장내 미생물에 영향을 주는 외부 요소를 받아들이는 행위라는 점에서 대변이식과 유사한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 대변이식이 급격하고 의학적인 방법으로 장내 세계를 재구성하는 사건이라면 차를 마시는 일은 훨씬 완만하고 일상적인 방법으로 그 세계에 개입하는 행위이다.
차 마시기도 대변이식처럼 장과 뇌를 잇는 축(軸)에 작용해 기분과 사고, 자율신경에 영향을 준다. 차를 마시는 행위 역시 ‘나를 구성하는 요소가 어디까지인가’라는 질문을 자연스럽게 불러낸다.
대변이식으로 철학은 똥을 깊숙이 논하는 단계에 들어왔다. 철학은 이제 더 이상 똥을 외면할 수 없다. 똥은 그동안 철학의 눈 밖에 있었지만, 대변이식은 그것을 가장 깊은 중심으로 끌어들인다.
혐오와 배제의 대상이던 것이 치유와 관계, 책임과 공생의 주체로 등장했다. 우리는 다시 묻게 된다.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무엇을 안다고 할 수 있는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 질문 속에는 생명에 대한 겸손, 타자에 대한 책임, 존재의 복잡함과 변화 가능성, 그리고 새로운 공생의 윤리가 담겨 있다. 이제 우리는 ‘개똥철학’이 아니라 ‘사람똥철학’의 시대에 들어섰다.
유영현 티클리닉 디렉터(오디오칼럼 1+1이야기 https://www.youtube.com/@yhyoo09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