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에 열광한 유럽"…그게 이 의사 덕분이라는데

[차 권하는 의사 유영현의 1+1 이야기] ⑨ “유럽의 뵈르하베”

[사진=클립아트코리아]
차는 네덜란드 덕분에 유럽에 처음 전파되었다. 영국이 1600년 동인도회사를 설립하고 인도 식민지 개척에 나서자, 네덜란드도 2년 뒤 동인도회사를 세우고 ‘아시아경영’에 뛰어든다.

그 결과,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포르투갈 및 영국과 치열한 식민지 쟁탈전을 통하여 동남아시아를 지배한다. 인도네시아를 본거지로 동아시아 무역을 장악한다. 특히 포르투갈과는 치열하게 싸워 말라카 해협이라는 안전한 해상 운송로도 마침내 확보한다.

네덜란드는 동남아 향신료와 중국 차를 유럽으로 싣고 간다. 특히 1610년경, 푸젠성(福建省) 샤먼(廈門)을 통해 차를 유럽에 전파한다. 차는 곧 유럽인들을 사로잡았고 수십 년간 네덜란드는 유럽인들에게 차를 공급하는 역할을 한다.

동양 차와 채색 자기를 유럽에 전했던 네델란드

네덜란드는 일본과의 무역도 사실상 독점하게 된다. 16세기 후반에 포르투갈에 교역의 기회를 잠시 허용하였던 일본 막부는 교역과 종교가 함께 들어온다는 걸 알게 된다. 그러면서 점차 일본 내 가톨릭교도(‘기리시탄’)들을 박해하고 포르투갈을 경계하게 된다.

1637년, 가톨릭교도들이 대규모 ’시마바라의 난(亂)’을 벌이자 막부는 폭동을 진압하고 일본 내 기독교를 전면 금지한다. 그리고 “선교 없는 교역에만 집중하겠다”는 확신을 준 네덜란드를 더 신뢰한다.

1641년, 일본 막부는 1579년부터 포르투갈이 사용해오던 나가사키 앞바다의 인공섬 ‘데지마’를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상관(商館)으로 독점 사용하는 권한을 준다. 이 섬을 무역 창구로 할양받은 네덜란드는 아시아 무역에서 더욱 탄탄한 입지를 다지게 된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이익 대부분은 일본과의 교역에서 나왔다. 네덜란드는 유럽 신(新)물품과 인도 면직물을 일본에 판매하고, 일본으로부터는 구리와 은을 수입하였다. 구리는 아시아 역내 다른 나라에서도 수요가 높아 네덜란드는 아시아 역내 무역으로도 큰 수입을 올렸다.

일본에서의 입지를 탄탄하게 구축한 네덜란드는 중국 청(淸)나라가 이전 명(明)의 남은 세력을 소탕하는 과정에서 중단된 도자기 무역을 담당하는 절호의 기회를 맞는다.

마침 일본은 조선의 숱한 도공들을 임란(壬亂) 포로로 데려와 자국에서 도자기 생산에 성공하고, 일본 특유의 채색(彩色) 자기 생산에 열을 올리고 있던 시점.

네덜란드는 일본의 채색 자기를 유럽에 수출한다. 일본의 채색 자기는 청나라의 청화백자보다 화려한 색으로 유럽인들의 찬사를 받았다.

특히 유럽에서 차의 수요가 크게 늘면서 차 도구로 쓰이는 도자기 수요까지 비례해 급증하였다. 차를 끓이는 주전자와 차를 담아 마시는 찻잔 수요는 유럽이 자체로 도자를 생산할 때까지 급증하였고, 스페인에서 어렵게 독립한 네덜란드는 단숨에 강국의 하나로 뛰어올랐다.

네덜란드의 아시아 무역 지배는 포르투갈 영역을 흡수하면서 크게 흥하였지만, 결국 해양강국 영국에 의하여 위축되기 시작한다. 17세기 후반기, 해양 지배권을 두고 영국과 네덜란드는 엎치락뒤치락 치열한 접전을 벌이게 된다. 궁극적으로 영국은 네덜란드보다 우세해졌고, 해상로를 장악한 영국은 차 무역도 장악하게 된다.

네덜란드는 그에 비해 일본에서의 입지는 꽤 오래 유지하였다. 일본은 서양으로 통하는 창구로 네덜란드를 선택한 뒤, 데지마 섬에 네덜란드인 체류를 계속 허용하였을 뿐 아니라 해마다 쇼군이 네덜란드 상인들을 만나 국제정보를 취득하는 등 네덜란드와 돈독한 관계를 이어간다.

일본에서 마주친 서양의학 vs. 동양의학

네덜란드를 통하여 들어온 서양 학문은 통칭 ‘난학’(蘭學)으로 불리며 일본에서 붐을 일으킨다. 일본은 네덜란드 학문으로 넘치기 시작하였고, 난학은 일본 사회 전체를 바꾸어 나가기 시작한다. 결국, 메이지 유신까지 이어지는 일본의 서양화, 근대화는 네덜란드를 창구 삼은 일본의 변신 결과였다.

특히 데지마 섬에 함께 거주하던 서양 의사들이 일본인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17-18세기에도 서양의학은 ’치료 허무주의‘에 빠져 있을 정도로 별다른 진전을 보지 못하였다. 동양의학과 비교하면 그다지 빼어난 실적을 거두지 못할 때이기도 했다.

그래도 그들은 동양 의사들과는 달리 외과(外科) 의술을 일부 발휘하였다. 칼로 몸을 가르고 수술을 하는 외과 의술은 한방 의학과는 구별되었다. 서양의학을 배우려는 일본 의사들이 나가사키로 유학을 오기도 했다.

서양 의술이 붐(boom)을 일으키면서 네덜란드의 ‘해부학’ 교과서가 일본어로 번역된다. 조총이 일본을 깨운 1543년에서 230년 지난 때, 새로운 인체해부학 ‘해체신서’(解體新書)가 번역되어 나온 것.

일본이 네덜란드로부터 의학을 한창 수입하던 시기, 네덜란드는 잠시 세계 의학을 주도하였다.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작은 나라, 네덜란드는 1575년 설립한 ‘라이덴 의과대학’을 중심으로 서양의학 강국이 되었다.

유럽 의학의 맹주로 떠오른 네델란드 라이덴 의대

라이덴 의대는 렘브란트의 유명한 그림 ‘해부학 강의’ 주인공 니콜라스 튈프를 포함하여 뛰어난 해부학자들을 배출하였다. 그리고 여러 의학연구에서 중요한 진전을 이루며 17~18세기 서양의학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특히 의학교육에 혁신을 이루어 의학교육의 질을 높였다. 유럽 전역에서 교육을 받으려는 학생들을 네델란드로 몰려들었고, 네델란드는 이로서도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라이덴 의대 융성기의 최고 의학자로 평가받는 이는 ‘헤르만 뵈르하베’(1668-1738). 뛰어난 해부학자이자 병리학자이기도 했던 뵈르하베는 환자의 병력(病歷)을 들은 후 체계적으로 관찰하고 진단하는 방법을 강조하였다.

네델란드 라이덴대학 홈페이지 '역대 교수'코너에 올려져 있는 H. 뵈르하베. [사진=유영현 제공]
의학에 정량(定量) 개념을 도입하였고, 온도계를 임상에 응용하였다. 그가 수립한 도제식 임상 교육은 현대 임상의학 교육의 기초가 되었고, 다른 나라의 의학교육기관들 전체로 퍼져 나갔다.

아시아에서 “유럽의 뵈르하베”를 수신인으로 보낸 편지가 바로 그 뵈르하베 교수에게 전달되었다는 일화는 뵈르하베 영향력이 당대에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이다.

지구 반대편에서 온 편지, ‘뵈르하베’란 이름만으로도 OK

그는 특히, 식도에 구멍이 난 ‘식도 천공(穿孔, perforation)’을 관찰하고 자신의 이름을 붙인 ‘뵈르하베 증후군’(Boerhaave's syndrome)이란 질병 이름을 의학 역사에 남겼다. 식도 내압이 상승하여 식도 전 층이 찢어져서 구멍이 생긴 위험한 상황을 뜻한다.

보통은 심한 구토로 인하여 유발되고, 배에 힘을 주는 기침이나 물건 들기 등에 의하여서도 생긴다. 식도 내용물이 가슴의 종격으로 들어가 염증을 일으키는 ‘종격동염’(縱隔洞炎, mediastinitis)으로 이어지며 사망에 이르게 할 정도의 응급상황이다.

뵈르하베가 활동하는 시기는 유럽으로 수입된 차가 널리 퍼지던 때이기도 하다. 특히 초기에는 차에 어떤 가치가 있느냐는 논란을 심하게 거치게 된다. 이때 뵈르하베도 차의 효능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졌다.

뵈르하베는 차의 약리학적 특성을 연구하여 문서로 발표하였다. 그는 “차가 소화를 돕고, 기분을 좋게 하며, 특정 질병들을 예방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기술하였다.

더 나아가 “차가 약(藥)으로 사용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하였다. 차가 체액의 균형을 유지하고, 염증을 줄이며, 열을 낮추는 데 도움이 된다고 보았다. 그는 자신의 환자들에게 차를 권유하였다.

지금도 차는 ‘건강’에 유익한 음료라는 인식이 강하다. 오늘날 차가 이처럼 널리 소비되는 데는 이를 실어나른 네덜란드 상인들과 함께 ‘유럽의 뵈르하베’ 영향도 크게 작용하였다.

유영현 앨앤더슨병원 진료원장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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