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보다 환자…디지털 헬스케어, 신뢰 쌓아야”

[인터뷰] 박성호 서울아산병원 영상의학과 교수

[사진=PORTRAIT IMAGES ASIA BY NONWARIT/shutterstock]
IT 분야에서는 데이터 수집 기능이 탑재된 의료 기기와 분석 소프트웨어가 헬스케어 솔루션이라는 이름으로 묶여 연일 언론에 오르내린다. 하지만 산업계는 기존 의료 시장의 문턱, 규제의 벽이 높다는 지적을 쏟아내고 있다. 정부가 지난 한 해(2018년) 발표한 규제 완화책은 한편으로는 “아직 부족하다”는 비판을, 다른 한편으로는 “지나치게 빠르다”는 비판을 받았다.

인공지능 ‘딥러닝(deep learning)’ 기술이 가장 많이 적용되는 영상의학 분야에 몸담은 박성호 서울아산병원 영상의학과 교수(대한영상의학회 임상연구네트워크 이사)를 만나 디지털 헬스케어 분야에 대한 의료계의 입장을 들어봤다. 박 교수는 최근 영상의학계 최고권위의 학술지 ‘라디올로지’의 인공지능 및 라디오믹스 분과 부편집장에 선임됐다.

– 지난 2018년 12월 열린 ‘의료 기기 규제 혁신 심포지엄’에서 보험 급여를 받을 만큼 임상적 유용성이 확인된 AI 의료 소프트웨어는 전 세계 어디에도 없다는 말씀을 하셨다. AI 기술이 환자 치료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인가?

“현재까지 나온 AI 의료 소프트웨어는 환자를 치료하는 데 직접 도움을 주기보다 의료진의 진료 시간을 줄이거나 병원 경영 프로세스를 원활하게 하는 보조적인 역할을 한다.

예를 들면, AI 소프트웨어가 전문의 대신 컴퓨터단층촬영(CT) 영상을 보고 환자의 응급 상태를 알리는 등 응급 치료 프로세스를 개선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스템 변화가 모든 환자에게 이득을 주지는 않는다. AI 판독 결과로 다른 환자의 진료 대기 시간이 더 길어지거나, 다른 응급 환자의 순번이 바뀔 수도 있다.

공공보험 지출은 다른 의료 행위보다 현저히 효과가 좋우 의료 기술을 더 많은 환자에게 제공하기 위해 쓰인다. 신기술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신기술을 적용한 의료 행위가 어떤 임상 효과를 가졌는지 충분한 확인 작업을 거쳐야 한다. 병원 차원에서 의료 시스템 최적화를 위해 제품을 구입할 수는 있겠지만, 공공보험 체계상 별도 수가를 책정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 일부 산업계에서는 식품의약품안전처의 안전성 검토, 건강보험심사평가원-한국보건의료원의 보험 등재를 위한 효과성 검토가 이중 규제라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박 교수가 발표에 나섰던 지난 심포지엄에서도 우리나라의 단일 보험 체계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미국 같은 다보험 체계를 도입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나.

“의료 시장에 대한 산업계의 이해가 부족한 데서 나온 주장이라고 본다. 공공보험과 사보험이 같이 운영되는 다보험 체계에서 임상적 효과가 밝혀지지 않은 의료 행위에 급여를 지급할 민간 보험이 과연 있을까.

2016년 알파고와 이세돌 9단의 대국 이후 많은 IT 업체가 의료 소프트웨어 개발에 뛰어들었으나, 실상 의료계의 상황을 충분히 이해하고 단계적으로 접근한 기업은 많지 않았다. 당시에 의료 시장 진입을 위한 정보 공유가 이뤄졌다면 좋았겠지만, 지금에 와서는 보건 당국이 의료계, 산업계, 시민 사회 등 여러 분야의 요구를 한꺼번에 들어야 하는 상황이 됐다.

신약을 개발하는 제약 회사의 경우 의약품 개발, 보험 등재, 시장 진출로 이어지는 전 과정을 세팅하고 병원과의 연계를 돕는 중개 업체가 많다. 반면, 신생 디지털 헬스케어 업계에는 이러한 체계가 구축되지 않아 기업이 관련 분야 의료진을 컨택하거나 대학병원 내 지원 센터의 도움을 받고 있다. 의료 시장에 관한 부분적이고 부정확한 정보로 인해 일부 앞뒤가 맞지 않는 주장이 나오고 있지 않은가 한다.”

– 디지털 헬스케어는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뜨고 있는 분야이기도 하다. 다른 나라에서도 의료계와 산업계의 입장 차이가 나타나는지.

“미국 IT 업계 접근 방식도 우리나라와 크게 다르지 않다. 얼마 전 스탠포드대학교의 한 공학자가 의료 소프트웨어 임상 검증을 어떻게 진행해야 하느냐고 개인적으로 물어왔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블로그에 임상 시험 피험자 모집 공고를 올렸다고 하더라. 블로그 모집 글을 보고 어느 정도 사람이 모인다 하더라도, 이 공학자가 학술적, 상업적으로 인정받는 제품을 만들려면 결국 실험적으로 잘 설계된 임상 시험을 다시 진행해야 할 것이다.

알파고 쇼크 이후 국제적으로도 많은 의료 인공지능 포럼이 열렸다. 이들 포럼에서는 ‘AI’, ‘데이터’, ‘신기술’이 강조됐을 뿐 정작 의료의 본질이 언급되는 경우는 드물었다. 다행히도 최근에는 ‘환자’를 핵심 키워드로 언급하는 등 의료계의 니즈에 대한 고민이 조금씩 늘어나는 추세다.”

– 디지털 헬스케어 분야에서 주목할 만한 기업이 있다면?

“개인적으로 구글의 행보에 주목하고 있다. 구글이 개발한 당뇨성 망막증 진단 소프트웨어는 진단 정확도가 전문의 수준에 근접할 정도로 높다. 발병 초기 단계 검증을 도와주기 때문에 환자를 위한 쓰임새가 높은 기술이기도 하다. 이처럼 의료 현장의 니즈를 반영한 기술 고도화에 공들이는 한편, 상업화를 위해 과하게 속도를 내지 않는다.”

– 탁월한 기술력을 갖춘 제품이라도 그 제품이 실제 현장에서 쓰이는 데는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씀으로 들린다. 스타트업 중심으로 운영되는 국내 디지털 헬스케어 업계의 발전을 위해 필요한 점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결국 디지털 헬스케어 제품을 개발하는 목적을 분명히 해야 할 것 같다. 자율주행차 기술이 더 많은 차를 팔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행자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쓰이는 것처럼, 디지털 신기술도 ‘환자에게 어떻게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인가’가 우선되어야 한다.

알파고 쇼크로 인한 AI 붐이 일어난 직후 수많은 기업이 너나 할 것 없이 디지털 헬스케어 분야에 뛰어들었다. 기업이 새로운 투자 영역을 발굴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소위 의료계가 돈이 되려면 환자들이 그만큼 더 많은 돈을 의료비로 지출해야 한다. 이를 상회할 만한 목표, 가치, 윤리성이 먼저 고민되어야 하지 않겠나.

환자 치료보다 기술 상업화를 우선한 일부 산업계의 모습에 신뢰를 잃은 동료들의 소회를 여럿 들었다. 의사가 사업 창출, 일자리 창출에 발목 잡는 집단으로 치부될수록 의료의 본질을 고민하는 의료진이 산업계와 협업하기 어려워질 것이다. 의료계에서도 대형 병원을 중심으로 다양한 시도가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의료의 본질, 의료계와의 신뢰를 전제한 비즈니스 모델이 나올 것이라 기대 중이다.”

    맹미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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