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대로 보이는 85세 패션디자이너의 건강비결



토요일, 가을비가 여름비처럼 우두둑 내리더니 일요일 하늘이 새파래졌습니다. 노랗게, 발갛게 물든 나뭇잎들이 더욱 또렷해졌습니다. 행인의 옷에서도 만추(晩秋)의 분위기가 나뭇잎을 따라 시나브로 번지겠군요.

1956년 오늘은 우리나라 최초로 패션쇼가 열린 날입니다. 지금의 롯데호텔 자리에 있었던 반도호텔에서 패션디자이너 노라노 씨가 영화배우 최은희, 조미령 등을 모델로 첫 패션쇼를 선보인 것이지요.

노라노 씨는 우리나라 패션의 산증인입니다. 윤복희의 미니스커트도, 펄 시스터즈의 판타롱도 그의 작품이었습니다. ‘한국의 코코 샤넬’, ‘패션계의 지존’ 등으로 불리지만 “옷 만들어 돈 받고 팔았을 뿐”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말합니다. 그러면서도 “코코 샤넬은 중간에 휴지기가 있었으므로 내가 더 오래 일하고 있다”고 말할 정도로 은근한 자존감을 갖고 있기도 합니다.

그의 본명은 노명자. 일제 강점기 방송인 부부 사이에서 태어나 어릴 적 ‘옷의 아름다움’에 눈을 뜰 정도로 여유 있게 자랐지만 정신대로 끌려가는 것을 피하려고 서둘러 결혼했다가 이혼합니다. 당시는 이혼녀가 손가락질을 받던 시대였지요. 가정을 못 지켰다고.

노라노씨는 어머니의 반대를 무릅쓰고 아버지의 허락을 받아 1948년 혈혈단신으로 미국으로 향합니다. 입센의 ‘인형의 집’에 나오는 주인공 이름 노라를 여권이름으로 하고.

1950년 6.25전쟁 직전에 아버지가 사업에서 실패하자 학업을 중단하고 서둘러 귀국합니다. 서울 퇴계로 가정집 2층에 ‘노라노 꾸르띠에’를 차리고 가계를 책임집니다. 전쟁통이었던 1952년 명동에 ‘노라노의 집’을 오픈했고 56년에는 패션쇼를 열기까지 합니다.

그의 삶은 최초의 연속이었습니다. 최초의 패션디자이너였고 유명 연예인의 패션을 책임졌습니다. 1959년 미국 LA 롱비치에서 열린 미스유니버스 대회에서 미스코리아 오현주 씨가 그가 만든 옷을 입고 ‘베스트 드레서 상’을 받습니다. 66년에는 미우만백화점에서 최초의 기성복 패션쇼를 열었고 처음으로 TV에 의상협찬을 했습니다. 파리 프레타포르테(고급기성복 박람회)에 참가했고 뉴욕 플라자호텔에서 패션쇼를 열기도 했습니다. 1977년 예림양행을 설립, 본격적으로 수출 길에 뛰어들어 79년에는 뉴욕에 ‘노라노’ 간판으로 쇼룸을 열었고 메이시 백화점에 옷을 납품했습니다. 모두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열심히 일하다보니 최초의 수식어가 따라왔습니다. 

노라노씨는 “자신은 야망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일에 도전을 하되, 욕심을 부리지 않는 삶을 살았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시련이 없지는 않았겠지요? 억울한 비난도 많이 들었습니다.

전쟁 중에 미국의 NBC방송 취재전이 찾아와서 취재에 응했더니 다음날 아침 언론이 “여자들이 웃통 벗고 난리”라고 융단폭격을 가했지요. 이때 아버지가 “이 정도에 마음이 상할 거면 그만 둬라”면서 “호평보다 혹평이 자신을 빨리 알리는 길일 수도 있다”며 마음을 다잡아줬다고 합니다.

그는 56년 이후 단 한 해도 패션쇼를 거르지 않았습니다. 그의 손은 굳은살과 잔 상처투성이입니다. 올해 우리나이로 85세이지만 아직도 열정적으로 일을 합니다. 겉모습은 조쌀하고 날씬합니다. 모르는 사람이 나이를 들으면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합니다. 노라노씨는 건강비결에 대해 “단순하고 욕심내지 않고 즐겁게 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자유로운 정신의 소유자이지만 절제된 삶을 삽니다.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서 여러 가지 과일을 중심으로 간단하게 식사하고 스트레칭 40분, 자전거 운동 40분, 산책 40분 등으로 하루를 엽니다. 노라노씨가 소망대로 90세까지 건강하게 일하게 되기를 빕니다.

그는 우리나라에 패션의 아름다움을 퍼뜨린 주인공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건강한 삶에 대해서도 스승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즐겁게 도전하되, 욕심내지 않는 삶. 건강에 있어서도 요행을 바라기 보다는 하나하나 실천하는 삶. 주연이 아니어도 즐겁고, 자신의 가치를 강요하지 않는 삶! 이 태도가 조쌀하고 즐거운 노년을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노라노 밑줄 긋기

-“럭셔리의 반대는 빈곤, 싸구려가 아니다. 천박함이다. 비싼 명품을 입는다고 멋쟁이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옷을 잘 입는 비결은 세 가지다. 옷에 대한 안목이 있어야 하고, 몸매가 적절히 받쳐줘야 한다. 때와 장소에 맞게 입어야 멋쟁이라고 할 수가 있다.”

-“쉬지 않고 꾸준히 일해야 시대감각을 잃지 않는다. 한번 게으름을 피우면 그것을 회복하는데 3배 이상의 시간이 걸린다.”

-“패션이 없는 게 곧 패션이다. 쉽게 말해서 자기가 입고 싶은 대로 입는 것이다.”

-“멋은 절제돼야 멋이다. 튀면 멋이 아니다.”

-“내가 패션디자이너로 여기까지 온 것은 호기심이 많았던 덕이다. 거기에 더해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정확히 알았기 때문이다.” 

오늘의 음악

1787년 오늘은 모차르트의 오페라 돈 조반니가 초연된 날입니다. 제임스 레바인 지휘로 ‘돈 조반니 서곡’ 듣겠습니다. 노라노씨와 관련이 있는 음악 두 곡을 준비했습니다. 저와 페이스북 친구인 윤복희 씨의 절창 ‘여러분’과 펄시스터즈의 ‘커피 한 잔’이 이어집니다.

♫ 돈 조반니 서곡 [제인스 레바인] [듣기]
♫ 여러분 [윤복희] [듣기]
♫ 커피 한 잔 [펄 시스터즈] [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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