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손으로 최고의 피아니스트 될 수 있을까?

[이성주의 건강편지]

2023년 11월 27일ㆍ1599번째 편지


온라인 백과사전 위키피디아 한국어판에는 1931년 오늘, 프랑스 작곡가 모리스 라벨이 오스트리아 빈에서 ‘왼손을 위한 피아노협주곡’을 초연했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그날 라벨이 빈 어느 곳에서 이 곡을 연주했을지는 모르지만, 이 곡의 공식 초연은 이듬해 1월 5일 빈 교향악단과 파울 비트겐슈타인의 협연으로 이뤄집니다.

파울 비트겐슈타인은 라벨에게 이 곡을 의뢰한 왼팔 피아니스트입니다. 오스트리아 유대인 ‘철강 부호’ 비트겐슈타인 가문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고, 분석철학을 창시한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의 형이기도 합니다. 파울은 천재 피아니스트로 명성을 얻기 시작할 무렵,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조국 오스트리아의 군에 자원입대합니다. 그러나 그는 우크라이나 전투에서 러시아군과 싸우다 팔꿈치에 총상을 입고 잡혔고, 오른팔이 절단된 채 포로수용소에 갇힙니다.

매서운 추위의 시베리아 옴스크 포로수용소에서 파울은 나약해지는 자신을 다잡습니다. 그는 왼손만으로도 피아노를 칠 수 있다고 다짐하고 나무상자를 피아노 삼아 왼손가락으로 상상의 연주 연습을 합니다. 중립국 덴마크에서 감시관으로 파견된 외교관이 이 모습에 감명을 받고 진짜 피아노로 연습토록 알선합니다. 파울은 그 외교관을 통해 스승인 장님 피아니스트 요셉 라보르에게 자신을 위한 작곡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스승은 곧바로 답장을 보냈습니다. “열심히 작곡하고 있다!”

파울은 수용소에서 석방되자 벤자민 브리튼, 폴 힌데미트,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 에리히 볼프강 코른골트 등 당대의 작곡가에게 자신을 위한 작곡 또는 편곡을 요청합니다. 1929년 파울의 의뢰를 받은 라벨은 생상스, 체르니, 쇼팽 등이 한 손으로 연주하게끔 작곡한 작품들을 연구하면서 2년의 각고 끝에 ‘왼손을 위한 피아노협주곡 라장조’를 내놓습니다.

그러나 파울은 처음 악보를 보고 뜨악한 표정을 짓습니다. 곡의 흐름이 난해했고 보통 피아니스트는 양손으로 연주하기에도 벅찰 정도로 어려웠기 때문이지요. 라벨이 작곡하면서 한 손으로 어려워 두 손으로 시연했을 정도였으니···. 파울이 몇 번이나 요구했지만 라벨은 곡의 수정을 거부합니다. 언쟁도 벌입니다. 그러나 파울은 연주를 거듭할수록 이 곡의 매력에 빠져들어서 나중에는 자신의 ‘최애곡’으로 삼습니다.

파울이 부호의 아들이어서 재기할 수 있었다고 의미를 평가절하하면 저도 할 말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쉽게 말하는 사람은 어떤 환경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이가 아닐 가능성이 크겠지요? 한쪽 팔을 잃은 채 한파 속에서 심신의 고통을 이겨내며 피아니스트의 꿈을 다지고, 나무 상자를 건반 삼아 연습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가 없겠죠?

여러분 가운데 어떤 분은 어쩌면 시베리아 수용소 같은 한파 속에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은 모리스 라벨의 ‘왼손을 위한 피아노협주곡’을 감상하며, 파울처럼 그 난관을 이길 방법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뜻이 있으면, 길이 있다.” 주변 사람들을 보면, 대체로 맞는 말인 듯합니다. 함께 그 길로 발을 디뎌 볼까요?

프랑스 피아니스트 장 에플랑 바부제와 핀란드 지휘자 에사 페카 살로넨이 지휘하는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가 협연하는, 라벨의 ‘왼손을 위한 피아노협주곡 라장조’ 준비했습니다. 재즈의 영향이 스며들어 자유로우면서도 아름다운 곡이지요?

    이성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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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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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iy*** 2023-12-21 10:08:28

      불굴의 의지 앞에 불가능은 없어 보입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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