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든이 존경한 세자르 차베스, 그리고 백기완

Dr. 곽경훈의 세상보기

영국은 흥미로운 국가다. 전통과 명예에 집착하면서도 경악할 만큼 대담한 발상도 수용한다. 그러면서 ‘격렬한 싸움’이 ‘모두의 파멸’로 치닫기 전, 절묘한 타협을 제시한다. 청교도혁명을 일으켜 찰스 1세를 처형하고 올리버 크롬웰이 이끄는 ‘공화정부’를 출범한 역사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여전히 여왕이 ‘브리튼 연합왕국’의 수장이다. 신교와 구교의 피비린내 가득한 투쟁에서는 ‘신교도 아니고 구교도 아닌 묘한 특징’을 지닌 성공회를 출범시켰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심장’인 19세기 런던에서 공산주의를 구상했으나 영국은 ‘위대한 절충주의자’인 존 스튜어트 밀의 공리주의를 선택했다.

20세기 접어들어 ‘대영제국’의 위상이 흔들리자 그런 특징은 한층 도드라졌다. ‘식민지를 영국의 영구적인 일부로 만들겠다’는 망상 따위는 애초에 품지 않은 듯, ‘영국에 우호적인 정부의 출범’을 목표로 식민지를 하나씩 포기했다. 심지어 아일랜드조차 ‘영국의 일부’로 남기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자 독립시켰다. 반면에 ‘식민지를 영구적인 일부로 만들겠다’는 목표에 집착한 프랑스는 재앙이나 다름없는 전쟁을 겪은 뒤에야 알제리와 베트남을 포기했다.

20세기 후반과 21세기 초반 국제무대에서도 영국은 독특한 특징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재빨리 힘의 한계를 인정한 뒤, 독자노선을 무리하게 고집하지 않고 새로운 ‘초강대국’인 미국의 충실한 동맹이 되어 영향력을 유지하는 것으로 타협했다. 영국이 미국에 윈스턴 처칠의 흉상을 선물하고 미국이 백악관 집무실에 그 흉상을 전시한 것도 그런 ‘굳건한 대서양 동맹’을 과시하는 표현에 해당했다.

그런데 조 바이든이 대통령 임기를 시작하면서 윈스턴 처칠의 흉상을 집무실에서 치웠다. 그리고는 세자르 차베스의 흉상을 새롭게 배치했다. 그렇다면 세자르 차베스는 과연 누구일까?

세자르 차베스는 여러 측면에서 윈스턴 처칠과 대척점에 있다. 공작 가문 출신으로 할아버지는 아일랜드 총독, 아버지는 재무장관을 지낸 처칠과 달리 세자르 차베스는 멕시코 이민자 출신이며 부모는 대공항 시절에 소유한 농장이 파산하여 농장 노동자로 전락한 부류였다. 처칠이 명문 사립학교와 샌드허스트(영국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여 장교로 군대를 경험한 반면, 세자르 차베스는 미국 해군에 병사로 복무했다. 물론 둘의 공통점도 있다. 윈스턴 처칠과 세자르 차베스 모두 20대 후반부터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정치와 밀접히 연관한 삶을 살았다. 그러나 그마저도 처칠은 하원의원을 시작으로 장관과 총리를 역임하며 제도권에서 활동한 반면에 세자르 차베스는 ‘선출직 공무원’에 오르지 않고 ‘재야 운동가’로 활동했다.

1927년에 태어난 세자르 차베스는 1950년대 초반부터 노동운동을 시작했다. 미국 극우진영에서 ‘루시퍼(천계에서 추방당한 사탄)’라고 부르는 솔 알린스키(Saul Alinsky)의 영향을 받아 농민과 노동자를 조직하는 일을 시작했지만, 차베스는 알린스키와도 구별되는 독특한 존재다.

히스패닉 특히 멕시코계 이민자가 대부분인 캘리포니아 지역의 농장 노동자를 조직하여 그들의 부당한 처우를 알리고 ‘헌법이 보장한 정당한 권리’를 되찾는 운동을 벌인 차베스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그러니 ‘하나님과 예수의 정의를 구현하는 것’을 신성한 의무라 생각했고 그에게 ‘하나님과 예수의 정의’는 ‘죽은 후 천국’ 같은 좁은 의미가 아니라 ‘가난하고 힘없는 자도 인간답게 사는 세상’을 만드는 것 같은 넓은 의미였다. 또 마하트마 간디에게 크게 감명하여 내내 ‘비폭력주의’를 고수했다.

그리하여 차베스는 ‘전국 농장 노동자 연맹(National Farm Workers Association)’을 조직, 1965년 캘리포니아에서 포도 농장 노동자의 처우 개선을 요구하는 파업을 시작한다. 5년간 지속한 긴 파업을 통해서 미국 진보진영의 스타로 떠오르는 동시에 FBI를 비롯한 사법기관의 감시명단에 올랐고 보수진영에서 ‘미국을 무너뜨리려는 빨갱이’로 비난받기 시작했다.

로버트 케네디 상원의원이 그를 방문했고 민주당의 진보주의자 사이에서 큰 인기를 누렸지만, 차베스는 선출직 공무원에 대해서는 별다른 욕망을 품지 않았다. 그는 재야 운동가에 만족했고 시간이 지날수록 마하트마 간디 같은 ‘종교적 지도자’로 자리매김하려 노력했다. 그런 이유로 1970년대 말부터 미국 노동운동에서 그의 힘은 점점 약해진다. 농민, 노동자 같은 특정 계급의 이익만을 대변하지 않고 또 정치사상보다는 가톨릭 신앙과 비폭력주의를 강조하면서 1980년대에는 공동체 운동에 몰두하여 ‘좌파 운동가’로 영향력은 더욱 감소한다.

그러면서 적지 않은 좌파 운동가가 세자르 차베스의 독단과 독선, 지나친 종교적 열망, ‘가톨릭 성인을 흉내내는 태도’를 비판했다. 또 여전히 보수진영에서는 ‘가톨릭 신자의 탈을 쓴 빨갱이,’ ‘알린스키의 이론을 따르는 멕시코 녀석’이라 부르며 경멸했다.

그러나 그 모든 논란에도 불구하고 1993년 사망할 때까지 세자르 차베스는 변함없이 자신이 정의라 생각하는 삶을 고수했다. 그래서 1994년 빌 클린턴 대통령은 그에게 미국에서 민간인에게 수여하는 최고훈장인 대통령 자유 훈장(Presidential Medal of Freedom)을 추서했고 오늘날에도 ‘미국 노동운동의 상징’이자 ‘멕시코계 노동자의 수호성인’으로 불린다.

바이든이 대통령 집무실을 새롭게 꾸미면서 세자르 차베스의 흉상을 배치한 이유는 전임자인 트럼프와 차별하려는 시도가 틀림없지만, 설날 연휴 끄트머리에 백기완 선생의 부고를 접하면서 문득 ‘미국에 세자르 차베스가 있다면 한국에는 백기완이 있지 않나?’란 생각이 떠올랐다.

물론 세자르 차베스와 마찬가지로 정치성향에 따라 백기완 선생에 대한 평가는 엇갈릴 가능성이 크다. 솔직히 말하면 나도 선생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부분이 많다. 그러나 고인이 평생토록 가난하고 힘없는 자의 편에 서서 싸운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또 선생이 평생토록 많은 고통을 겪고 적지 않은 희생을 치르면서도 권력을 탐하지 않은 것도 마찬가지로 틀림없는 사실이다. 제 13대, 14대 대통령 후보로도 나왔지만, 고인이 권력욕에서 나오지 않은 것은 명백해 보인다. 그러니 정치성향과 관계없이 선생의 부고에 숙연한 마음을 갖고 애도하는 것은 당연한 도리가 아닐까? 정치성향과 관계없이 거인의 삶에는 고개 숙여 경의를 표할 만큼 성숙한 사회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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