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안 변산 ‘마실길’ 걷기

새만금전시관∼격포해수욕장

채석강에는 시간이 층층으로 쌓여 있다. 몇 길 높이로 쌓아놓은 헌책(古書) 같은

바위 틈새에서 옛 이야기를 찾아 읽으며 바다는 흐느끼다 낄낄거린다. 그 소리가

바다 위에 물거품으로 하얗게 깔린다. 바닷가 모래알들은 그 책장에서 떨어져 나온

글자들이다. 바람은 그들을 짜 맞추느라고 부산하게 뛰어다닌다. 하루 두 번씩 생각난

듯 다시 와서 그 책장에 숨겨 놓았던 지난날들을 들추던 바닷물이 뒤를 돌아보지

않고 주춤주춤 수평선에게 끌려간다. 넘어가는 해는 황금빛 긴 꼬리로 바다 바닥을

번쩍번쩍 쓸고 있다. <김정희의 ‘격포에서’ 부분>

전북 부안 변산은 바다와 들판 사이에 있다. 누에처럼 낮고 길게 엎드려 있다.

양쪽 옆구리가 모두 열고 닫힌다. 전동차 자동문 같다. 때론 왼쪽 문이 스르르 열리고,

때론 오른쪽 문이 덜커덩 열린다. 바깥쪽이 바다이고(외변산), 안쪽이 들(내변산)이다.

한쪽에선 파도가 어미 젖을 빠는 강아지들처럼 구물구물 달려들고, 그 반대편에선

곡식들이 우우우 자란다.

해안 절벽 바위는 잘게 썬 무채다. 시루떡이 켜켜이 겹쳐 있다. 수만 권의 책들이

가지런히 정돈돼 있다. 바다는 떡을 먹으러, 혹은 책을 읽으러 우르르 몰려왔다가,

스르르 물러간다. 바닷물은 칙칙하다. 멸치 젓국물 같다. 쪽빛이나 푸른 물은 ‘아득한

기억의 저편’에 있다. 더 이상 하늘을 담지 못한다. 개펄은 쪼글쪼글하다. 늙은

어머니 젖가슴이다. ‘폐경기 맞은 여인처럼(최광임 시인)’ 붉은 노을을 바라보고

있다.

게나

바지락들은 뻘 속에서 꼼지락거린다. 석기시대 사람들은 그곳의 조개들을 잡아먹고

살았다(대항리 패총). 소금밭을 일궜다. 거무튀튀한 밭에서 하얀 소금을 얻었다.

소금은 개펄이 육탈되어 남긴 사리다.

변산 안쪽 들판엔 기름진 논밭과 내소사, 개암사가 있다. 절은 화장기 하나 없이

곱게 늙었다. 무명옷 차림의 농부들처럼 수수하다. 내소사 대웅전 단청은 무채색이다.

연꽃 창살무늬도 맨얼굴이다. 청동기시대 사람들은 그곳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받침돌이 있는 남방식 고인돌 밑에선 돌칼, 돌화살이 나왔다. 도대체 그 엄청난 바위(길이

6.4m, 너비 5.12m, 두께 0.69m)는 어디서 가져왔을까.

변산은 높지 않다. 기껏해야 해발 300∼500m대에서 머문다. 하지만 그 품에 바다와

들을 모두 품는다. 이 세상 온갖 어린 것들을 감싸 안는다. 바다와 들의 경계에서

꽃을 피운다. 산자락 밑에 생명을 키운다. 변산은 미륵보살이다.

전북 부안 변산 해안 따라 마실 길이 열렸다. 부안군과 사단법인 ‘우리 땅 걷기모임’(이사장

신정일)은 21일 변산 ‘마실 길(약 100km 예상)’ 중 제1코스 개통에 맞춰 걷기축제를

갖는다. 길은 새만금전시관에서 격포해수욕장까지 이르는 18km. 해안백사장 길과

호젓한 숲길이 수시로 번갈아 나타난다.

모래바닥은 말랑말랑하다. 나뭇잎 숲길은 푹신하다. 모래밭은 맨발로 걷고, 참나무

숲길은 콧노래를 부르며 걷는다. 마치 지리산 둘레길과 제주 올레길을 반반씩 섞어

놓은 것 같다. 올레길보다 그늘 숲이 많고, 둘레길에 없는 파도소리가 들린다. 짭조름한

바다 냄새와 ‘쎄에∼’한 나뭇잎 냄새가 버무려져 콧속이 구수하다. 오르막이나

내리막도 심하지 않다.

해안 초소를 휴게소로 바꿀 계획

길은 부안 쪽 새만금 방조제가 있는 곳에서부터 시작된다. 그곳에서 물막이 댐을

따라 33km를 거슬러 올라가면, 끝 지점에 군산이 있다. 새만금 방조제는 올 12월에

전면 개방된다. 그때는 군산 쪽 물막이 댐 33km를 거쳐 변산 마실 길까지 쭉 이어

걸을 수 있다. 바다를 지운 물막이 댐에서, 또 다른 길이 열리는 것이다.

모래사장이나 바닷가를 걷는 길은 약 25%. 나머지는 젊은 군경이 오가던 해안초소

길이다. 그곳을 지키던 군경들은 2007년 노무현 정부 시절 모두 철수하고 지금은

잡초만 무성하다. 아직도 초소와 초소를 연결하는 삐삐선이 곳곳에 남아 있다. 벙커와

초소엔 거미줄이 어지럽다. 얼룩무늬 시멘트벽도 군데군데 무너져 내렸다. 해안을

따라 이어진 철조망은 녹슨 채로 그대로 있다.

초소 길은 바다가 잘 보이는 곳을 따라 이어졌다. 경치가 빼어난 곳엔 어김없이

초소나 벙커가 나타난다. 변산해수욕장-고사포해수욕장 해안초소 숲길은 발 밑에

파도소리가 간지럽게 밟힌다. 인동초가 덩굴손으로 나무를 타고 올라가 하얀 꽃을

피웠다. 소나무, 참나무 숲이 무성하다. 한낮에도 그늘을 이뤄 제법 어둑하다. 산뽕나무의

까만 오디가 새콤달콤하다. 농가 재배 오디보다 작지만 맛은 강하다.

해안가 뾰족 바위 위에 묘 하나가 누워 있다. 도대체 저 바위 위엔 어떻게 올라가

산소를 썼을까. 망자는 말동무 하나 없이 얼마나 외로울까.

길섶엔 명아주, 바랭이, 미국산자리공, 개망초가 지천이다. 보랏빛 엉겅퀴 꽃도

피었다. 피가 날 때 엉겅퀴 꽃을 짓이겨 바르면 금세 피가 ‘엉기면서’ 그친다.

그래서 이름도 엉겅퀴다. 푸른 꿀풀 꽃잎을 따서 혀끝에 대니 달콤하다. 벌들이 잉잉거리며

화를 낸다.

김보국 박사(41•전북발전연구원)는 “해안 초소 길에 남아 있는 군 시설은 앞으로

국방부와 협의를 해야 하겠지만, 철거하기보다는 리모델링을 통해서 얼마든지 관광자원으로

활용할 수 있다고 본다. 길손들의 휴식처로 쓸 수 있고, 안내소나 전망대로도 안성맞춤이다.

커피나 음료를 공급하는 간이 휴게소 역할을 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숫사자 갈기 같은 적벽강 해안 절벽

고사포해수욕장을 지나면 해안 사구가 나온다. 해안 사구는 말 그대로 모래언덕.

바닷바람을 막아주고, 그 밑엔 지하수를 담아 둔다. 사구의 붉은 해당화 꽃이 거의

지고 있다. 붉은 입술 같다. 그 대신 연분홍 갯메꽃이 하나 둘 피고 있다. 순비기나무,

갯완두, 수송나물, 갯쇠보리도 보인다. 한 달에 한 번 그믐날엔 고사포해수욕장∼하섬의

바닷길이 갈라진다.

적벽강 해안 절벽은 숫사자를 닮았다. 언뜻 보면 숫사자가 엎드려 있는 것 같다.

붉은 벽돌을 차곡차곡 쌓아 만든 숫사자. 또 한 절벽은 숫사자가 고개를 들고, 먼

곳을 한가롭게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다. 어떻게 보면 ’세상에서 가장 큰, 붉은 혓바닥을

가진 짐승(박미라 시인)’ 같기도 하다.

마실 길은 적벽강 아래 모래밭을 지나 격포까지 1.5km가 이어진다. 적벽강은 중국의

소동파(1036∼1101)가 노닐던 적벽강의 모습과 닮았다고 해서 붙은 이름. 그 다음

닿는 곳이 1코스 끝 지점인 채석강이다. 채석강 역시 중국의 시선 이백(701∼762)이

강물 속의 달을 따려다가 빠져 죽은 채석강과 닮은 곳. 바위가 뒤란 땔감처럼 켜켜로

쌓여 있다. 책으로 말하면 미국 국회도서관 장서보다 많다.

‘또 한 페이지 철썩, 거대한 수평선 넘어오는/책 찍어내는 소리가 여전히 광활하다,

바다책/바다책, 바다책,/ 공부를 하지 않아도 되는 이 작은 각다귀들’ <문인수의

‘바다책, 채석강’ 부분>

서해 바다는 짠하다. 젓갈 냄새 가득하다. 그 해안 길은 쪼글쪼글한 할머니의

뱃살이다. 늙은 아버지의 밭이랑 이맛살이다. 개펄은 주름지고 석탄 반죽처럼 질펀하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서편제 가락이다. 바다는 아득하다. 바람은 축축하다.

서해 노을은 먹먹하다. 바다는 짐승처럼 운다. 붉은 노을을 치마폭에 싸 안고

소리 죽여 흐느낀다. 바위에 지악스럽게 달라붙은 따개비들도 밤에는 손을 놓고 엉엉

운다.

변산은 바다를 안는다. 자꾸만 머리를 부비며 달려드는 바다를 쓰다듬는다. 들판의

곡식들은 바다 소리를 듣고 자란다. 그 흐느낌을 들으며 익는다. 결코 쓰러지지 않는다.

채석강의 책 읽는 소리를 듣고 깨우친다. 적벽강 숫사자의 기개를 배운다.

김화성 전문기자 mar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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