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다 핀 해부학자가 떠나며 찍어 준 세포사 방점

[유영현의 의학논문 속 사람 이야기]

논문 35: Park JB, Ko K, Baek YH, Kwon WY, Suh S, Han SH, Kim YH, Kim HY, Yoo YH. Pharmacological Prevention of Ectopic Erythrophagocytosis by Cilostazol Mitigates Ferroptosis in NASH. Int J Mol Sci. 24:12862

사람: 박준범(석사과정), 고강은(동아대 체육학과)
■학문적 의의: 간에서의 적혈구 포식 매개 페롭토시스에 의한 지방간염

동아대 의대 출신 박준범 군이 해부학에 입문하였다. 아들같이 사랑스러운 제자가 되었다. 그때부터 내 방의 연구는 ‘박준범 해부학 교수 만들기’에 집중되었다.

전국에서 의대 출신 기초의학 교수 요원 부족으로 아우성이다. 나는 내가 신설한 동아대 의대 해부학 교실에 내 제자 두 사람을 교원으로 남기고 떠날 수 있다는 희망으로 뿌듯하였다.

박준범 본인도 열정을 가지고 연구하였다. 그러나, 돌연 그에게 입대 영장이 발부되었다. 병무청을 오가며 온갖 수단을 찾았지만, 조금이라도 계획이 틀어지면 곤란에 처할 상황이었다. 입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박준범이 군 복무를 해결하고 돌아와 학위를 받으면 내 은퇴와 동시에 신규 임용될 수 있어 입대는 행운으로도 보였다. 다행히 2년 넘게 진행하였던 동물실험을 마쳤고, 샘플을 모두 냉동 저장해 놓고 입대하였다. 박준범은 복무 기간 중에도 내 방 연구원들과 연락하면서 실험을 이어 나갔다. 군 복무 중 꽤 많은 연구자료들이 산출되었다.

박준범. [사진=유영현 제공]
박준범이 제대한 후 실험실에 첫 출근하는 날, 나는 부푼 마음으로 향후의 실험계획을 속사포처럼 설명하였다. 그런데 듣고 있던 그의 표정이 어째 이상하였다.

예기치 않게 군 입대로 2년을 보내버린 박준범은 제대 후…

입을 연 그의 일성은 내 희망을 좌절시켰다. 코로나 시국에 가정형편이 더 어려워져 임상으로 진출하겠다고 했다. 해부학자가 될 꽃봉오리 하나가 피지 못하고 지고 말 위기였다.

그는 석사학위 청구실험을 부랴부랴 마치고 임상 현장으로 떠났다. 내 모든 계획도 틀어졌다. 내가 박준범에게 넘겨주려던 많은 장비와 전공 서적들의 주인도 바뀌었다.

박준범의 석사학위 청구논문인 이 논문은 나의 마지막 연구 논문이 되었다. 그는 갑작스러운 군 복무와 임상 진출이란 격변 와중에도 아주 중요한 자료들을 내었다.

그의 연구에 의하면 비알코올성 지방간이 지방간염으로 바뀌면 지라(복강 왼쪽 뒷부분 횡격막 바로 밑에 있는, 약 100g 정도의 기관)의 적혈구 파괴 기능을 간의 쿠퍼 세포가 대신하게 된다. 그리고 간에서 적혈구가 파괴되며 나온 산물인 철(Fe)이 이웃 간세포에 축적되면 간세포가 ‘페롭토시스'(*)라는 세포사로 파괴된다.

(*페롭토시스(Ferroptosis): 철분 의존성 세포사멸. 세포 내 철에 의존하는 비세포 사멸과 세포 사멸의 한 형태를 말한다. 약물유전체학에서 정밀의학적 분석에 일관성을 나타낼 때, 매우 중요한 세포사멸 과정이다.-위키피디아 인용. 편집자 주)

적절한 대조군 자료가 모자라는 등 자료에 허점이 조금 보이지만 아주 훌륭한 연구 결과이다. 조금 더 시간을 바쳐 연구하였다면 교과서에도 수록될 만한 중요한 업적이 될 수 있었다.

석사학위 청구논문이건만 교과서에도 수록될 만한 중요한 업적

아주 좋은 잡지에 제출하여 평가를 받아 보니 그럴 가능성이 더 뚜렷이 보였다. 하지만 연구자가 이미 떠났고, 은퇴를 앞둔 내가 논문을 더 업그레이드시킬 수 없어 이 잡지에 게재하는 데 만족하였다. 이 연구 마감과 함께 남는, 진한 미련은 남은 생애 내내 나의 반추 거리가 될 것이다.

박준범 선생은 현재 서울대병원에서 응급의학과 전공의로 근무 중이다. 그는 전공의 합격 소식을 전하면서 학위과정 동안 쓴 논문들이 높게 평가받았다고 내게 감사의 뜻을 표하였다.

바쁜 수련 기간에도 틈을 내어 연구실을 자주 방문한다. 은혜를 잊지 않는, 예의 바른 이 청년이 응급의학 전공의와 전문의로 활동하며, 못다 핀 해부학자의 꿈을 보상 받기를 바란다.

한편, 고강은 선생은 체육생리학 박사를 취득한 후 내 방에 합류하여 성실하게 공부하고 실험하였다. 박준범 군 복무 기간에 본 실험을 성실하게 도와 공동 1저자가 되었다.

본 논문은 내 연구 경력 후반기 주제인 지방축적 연구가 지방 독성을 거쳐 마침내 내 평생의 연구 주제인 ‘세포사’로 회귀하였다는 점에서 뜻이 깊다. 내 연구 경력을 이어 주기를 바랐던 박준범은 아쉽게 해부학을 떠났지만, 이 논문으로 내 세포사 연구 경력에 멋진 방점을 찍어 주었다.

내가 국제잡지에 낸 첫 논문이 세포사 연구인데, 마지막 논문도 세포사 연구이다. 그렇게 세포사는 내 연구의 알파요 오메가가 되었다.

칼럼을 마치며…

우리나라 최고의 헬스케어 미디어 <코메디닷컴>을 통해 연재한 [유영현의 의학논문 속 사람 이야기] 마지막 회를 쓰며 나와 동시대에 힘쓴 전국의 기초의학자들에 응원을 보낸다.

필자는 1979년 의학과 1년 때 기초의학 전공을 결심하고, 졸업 후 해부학자로 42년 동안 마라톤을 달렸다. 전반부엔 학생들에게 해부학을 전달하는 교육자로 만족하였지만, 국가연구비가 증액되며 지식 산출 의무가 강조될 때부턴 교육자에서 연구자가 되었다.

연구에 뛰어든 이후엔 의학 연구에 매진하며 여러 성과를 내었다. 나와 동년기에 수고하면서 성과를 많이 내기도 하고 좀 부진하기도 하였던 기초의학자들 모두의 분투에 박수를 보낸다.

실험연구의 길에 들어섰다 하더라도 모든 연구자에게 모두 다 좋은 조건이 마련될 수는 없다. 미래 어떤 곳에서, 또 어떤 때에 연구하는 기초의학자에게는 보다 더 단단한 마음이 요구될 것이다. 그래서 부족한 여건 속에도 자신의 임무를 다할, 미래의 기초의학도들에게도 미리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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