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려 43년 전, 1975년부터 시작된 논문

[유영현의 의학 논문 속 사람 이야기]

논문 30: Oh YJ, Kim HY, Lee MH, Suh SH, Choi Y, Nam TG, Kwon WY, Lee SY, Yoo YH. Cilostazol Improves HFD-Induced Hepatic Steatosis by Upregulating Hepatic STAMP2 Expression through AMPK. Mol Pharmacol. 2018;94:1401-1411.

■사람: 오유진(박사과정, 현 울산대 의대 연구교수) 박문기 교수 (대구한의대)
■학문적 의의: STAMP2 증강제 ‘실로스타졸’(cilostazol)에 의한 지방간 완화 기작 규명

이 논문의 기원은 1975년 부산의 한 고등학교 2학년 때로 올라간다. 나와 함께 등장하는 인물은 당시 1학년 박준묵이다.

당시 우리 학교에서는 1교시 수업 전 약 30분 정도 자습시간이 있었다. 학교는 학생 중에서 ‘자습지도위원’을 임명하였다. 자습지도위원은 매일 한 학년 아래 반으로 내려간다. 교탁 옆에는 후배들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책걸상이 놓여 있었다. 자습지도위원은 이 책상에 앉아 공부하며 후배들 자습이 원활히 진행되도록 관리하는 역할을 맡았다.

나는 2학년 때 자습지도위원으로 1년 동안 1학년의 자습을 지도 관리하였다. 임시 선생님 역할을 맡은 셈이다.

2008년 연구재단 연구비 심사장에서 대구한의대의 한 교수가 내게 아는 표를 내었다. 낯이 익는데, 심사위원 명패는 박문기 위원이었다. 38년 전 고교 시절 ‘박준묵’이란 명찰을 달고 있던 그는 후에 개명하였다.

그날 복원된 인연은 이후로 계속 이어졌다

하루는 박문기 교수가 우수한 학부 졸업생을 소개할 테니 대학원생으로 지도하여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는 오유진을 소개하였다. 학부 성적이 아주 뛰어났다. 흔쾌히 오유진을 면접하였고 내게서 석사와 박사과정을 받기로 정하였다. 집이 김해여서 출퇴근 시간이 오래 소요되었으나 지각과 결근이 거의 없이 성실하게 전 과정을 밟았다.

이전에 우리 실험실에서는 약물 스크리닝을 통하여 ‘실로스타졸’(cilostazol)이 지방간 치료제로 사용할 수 가능성을 발견하였다. 오유진의 박사학위 주제도 실로스타졸의 지방간 치료 효능 가설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본 연구는 아주 소중하게 다루어졌다. 실로스타졸은 임상에서 혈관질병 치료를 위하여 안전하게 사용되던 약물이다. 가설을 실험으로 입증하면 지방간 치료약제를 제시할 수 있다는 기대로 들떴다. 연구원들에게 보안을 유지하게 시키면서 극비리에 연구를 수행하였다. 연구 결과는 가설을 온전히 입증하는 자료들로 풍성하였다.

하지만 의외의 암초를 맞았다. 이 논문을 잡지에 제출하기 직전, 한 연구진이 학회 포스터 발표를 통하여 실로스타졸이 지방간을 개선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아주 일차적인 분석에 불과한 내용이었으나 대사와 간 관련 최상위 잡지의 심사위원들은 이 포스터 내용을 언급하면서 본 연구의 독창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후로도 그 연구진의 후속 연구 발표가 없는 점은 지금도 미스터리(mystery)다.

“그토록 비밀을 유지했건만”… 논문 발표 직전, 다른 이에게 선수를 뺐기고

비록 원하는 정상급 잡지에서는 거부되었지만, 이 논문은 권위 있는 약리학 잡지에 채택되어 가치는 인정받았다. 박사 졸업 후 오유진은 서울아산병원 내과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 아주 바쁘게 일하였고, 오래 사귀었던 신랑과 결혼하여 최근 딸을 낳았다.

오유진 박사와 딸. [사진=유영현 제공]
모든 논문 첫 페이지에는 논문의 역사가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 논문에는 “2018년 5월 제출되어 10월 채택되었다”라고 돼 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제출일과 채택일은 연구 역사의 극히 일부일 뿐이다. 이 논문의 경우 연구가 2015년 시작되었으니 실제 역사보다 3년이 누락되어 기록되었다.

게다가 굳이 본 논문의 기원을 추적하자면 1975년 부산의 한 고등학교 자습시간으로 이어지니 40년이 추가로 빠졌다. 그 세월을 더하면 이 논문의 역사는 43년 더 길어진다. 의미도 깊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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