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는 존재만으로 스승을 만든다

[유영현의 의학 논문 속 사람 이야기]

논문16: Jeong SH, Jo WS, Song S, Suh H, Seol SY, Leem SH, Kwon TK, Yoo YH. A novel resveratrol derivative, HS1793, overcomes the resistance conferred by Bcl-2 in human leukemic U937 cells. Biochem Pharmacol. 2009;77:1337-1347

■사람: 정승훈(박사과정)
■학문적 의의: 레스베라트롤 유도체인 HS1793의 항암활성 기작 규명

대학원생 공고를 내고 며칠 뒤 정승훈 군이 내 방에 나타났다. 듬직하게 느꼈다. 정승훈 군은 남자 연구원이 드물었던 내 실험실을 6년 동안 지켰다.

[사진=클립아트코리아]
정군의 진학 이후 내게 몇 가지 의문이 생겨났다. 우선 실험실 옆에 거주지를 마련하여 달라는 청을 받고 의아하였다. 대학 신입생들도 흔히 학교 옆에서 자취하지만, 굳이 집을 나오려는 정군의 형편을 당시 이해하지 못하였다.

또 하나는 정군이 프린트하여 읽는 문서를 보고 놀랐다. 내 방의 다른 학생들과 달리 정군은 한 쪽을 2등분 하여 작은 글씨로 출력하여 문서를 읽었다. 아무리 눈이 좋은 젊은 시절이라도 다른 실험실원과는 달리 굳이 종이를 아껴 출력하는 이유가 궁금하였다.

그리고 학교 옆에 방을 마련해 주었는데도 새벽에 출근하면 실험실 간이침대에서 자는 날이 흔하다는 점도 특이하였다.

포스터 발표자로 터키 학회에 참석한 정승훈 연구원. [사진=유영현 제공]
나는 정군이 오후와 밤에 주로 실험한다는 사실을 뒤에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 모든 점을 제대로 해석하지 못하고 꽤 시간이 흘러갔다.

진학하고 2년 정도가 흐른 어느 날 밤이었다. 나와 정군 둘만이 실험실에 있는 흔하지 않은 상황에서 정군이 입을 열었다.

정군은 부모님 결별과 이후의 학창시절에 대하여 내게 말하였다. 아주 긴 이야기일 테지만 짧게 이야기했다. 그 짧은 이야기를 듣고 나는 내가 지난 시절 정군의 스승이 아니었다는 반성을 하게 되었다.

대학원에 진학하는 젊은이는 미래를 모두 걸고 지도 교수를 선택한다. 지도 교수는 그 젊은이의 미래에 대한 깊은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

그러나 의과대학 출신인 나는 모교 교수가 된다는 보장된 미래를 가지고 대학원을 다녔다. 내게는 내 미래를 지도교수님에 건다는 의식이 없었다. 내 지도 교수님도 딱히 나를 걱정해주실 필요가 없었고 내 보호자라고 의식하지 않으셨다.

미래를 걸고 스승을 선택한 제자… 그렇다면 나는?

정군의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 나는 그에게 실험이나 가르치고 논문이나 작성하여 주는 존재이지 그의 인생을 이해하는 스승이 아니었다. 내가 올바른 지도 교수였다면 정군의 행동을 이상히 여기지 않고 그에 대해 깊이 공감했어야 하였다.

그러나 나는 정군이 왜 부모님과 떨어져 사는지, 공용으로 사용하는 종이를 왜 남보다 그리 아꼈는지, 그리고 왜 내 방 대부분을 차지하는 여성 연구원 학생들에게 실험실 장비 사용을 양보하고 오후와 밤을 이용하여 실험하였는지 깨닫지 못하고 지냈다.

그날 이후 나는 정군을 더 이해하게 되었다. 그와의 관계가 막역하여졌다. 실험실 이사 때는 매우 수고하였으나 사소한 실수를 범한 정군을 남 앞에서 마음껏 꾸짖고도 마음이 불편하지 않았다.

비로소 정군 덕에 나와 내 지도 교수님 사이에서는 별 필요도 없었던 스승 제자의 관계에 대한 소중한 깨달음을 얻었다.

이를 계기로 나는 동아대 의대 학부 졸업생도 아니면서 나를 지도 교수로 삼고 진학하여 청춘을 바치는 젊은 후학들을 이해하려는 선생이 되었다.

스승은 존재만으로 제자를 가르친다고 한다. 하지만 제자도 존재만으로 스승을 스승답게 만든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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