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반신 절단환자의 가르침

남쪽

어딘가를 매섭게 치고 올라오는 폭풍 끝으로 적당히 구름이 끼고 얕은 비 뿌리는

날에 마치 꾀병처럼 몸살이 나버렸다. 지난 달포 가량을 이런저런 일로 휴일이 없이

뛰어다닌 탓인지 어제 저녁부터 마치 온몸이 누구에게 맞은 것처럼 아프더니 오한과

미열까지 동반한 풀스케일 몸살을 앓는 중이다.

사실 이것 저것 받아놓은 일만 없다면 이 정도 몸살은 꽤 즐길만한 일이기는 하다.

유난히 일 욕심이 많은 탓인지 혹은 거절하는 걸 어려워하는 성격 때문인지 언제나

내 책상과 머리 속은 수두룩 할 일이 쌓여 있어서 이렇게 모처럼 맞는 강제휴식이

아니고는 사는 일의 중요한 일들의 우선 순위를 생각해 보는 일도 드물기 때문이다.

우선 눈에 띄는 것은 창가에서 보이는 아름드리 고목이 어느새 푸른 잎새로 가득

차 있었다. 봄에 새로 피는 꽃과 여름의 무성한 푸른 잎새와 가을에 색이 바뀌는

고운 잎새를 대하면 늘 알 수 없는 설렘이 일곤 하는데 그 설렘이 사는 일에 갖는

애정의 원동력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 힘의 원천을 곁에 두고도 매일매일

앞만 보고 뛰어다니는 일에 대해 반성하게 된다.

또 하나 아플 때마다 생각하게 되는 것은 얼마나 많은 것을 갖고 누리고 있는가에

대한 감사이다. 이렇게 잠시가 아니고 꽤 많은 날들을 아프거나 아니면 평생 남의

힘을 빌리지 않고는 바깥바람을 쏘이기는커녕 철따라 변하는 나뭇잎 하나도 만져보지

못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에 생각이 미치게 되면 절절한 고마움을 느끼지 못하고

사는 무심함을 또한 반성하게 된다.

실제로 전에 내가 돌보았던 환자 중에 하반신을 절단한 삼십대의 여자 환자가

있었다. 혼자 몸을 가누지 못해서 등과 엉덩이에 욕창이 자주 생기곤 했는데 그이가

하루 일과 중 가장 기다리는 일은 목욕 후 창가로 침대를 옮겨 바깥 광경을 잠시나마

바라보는 일이었다.

늘 산소와 다른 보조기구가 필요한 사람이라 그나마도 여러 사람의 힘으로 가능했는데

어느날 여러 간호사들의 힘으로 휠체어로 산책을 나가게 되었다. 얼마나 좋아했는지

상기된 표정으로 세상을 처음 보는 아이처럼 좋아했다.

그이가 잘 잊혀지지 않는 것은 그이의 처한 사정이 정말 힘들기도 했지만 늘상

감사하는 그이의 생활태도 때문이기도 하다. 아무리 본인이 아프고 힘들어도 도와주는

이들에게 진심으로 고맙다고 인사하던 그이의 천사 같은 표정이 자주 생각난다. 아,

그러고 보니 그이는 우리 큰아이에게도 근사한 가르침을 준 분이기도 하다.

워낙 내 마음에 많이 남은 인물이어서 당시 학생이었던 우리 큰아이에게 자주

이야기를 했었는데, 가난한 유학생 부부의 첫 아이로 크던 우리 아이의 당시 소원은

동대문 말표, 남대문 호랑이표 운동화 대신 그 이름도 세련된 나이키 스니커를 한번

신고 싶었던 모양이다. 자나 깨나 나이키 운동화를 염불하고 다니던 아이가 어느

날 내 여자 환자이야기를 찬찬히 듣더니 “엄마, 그럼 그이는 신발을 신을 발이 없단

말이지?”라고 되묻고는 긴 상념에 빠졌다.

발이 없어도 늘 남에게 감사하는 사람이 있는데 유명메이커 신발을 내 놓으라고

조르는 자신이 부끄럽게 생각되었는지 그 이후로는 유명메이커 신발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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