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로 하늘 덮어 푼 312일간의 대 봉쇄

이재태의 종 이야기(28)

베를린 봉쇄와 ‘베를린 자유의 종’

전통적으로 전쟁의 최종 승리는 적의 수도를 점령하는 것이었다. 베를린은 오랫동안 독일의 수도인 까닭에 2차 세계대전의 말기로 갈수록 연합군의 집중 공격을 받았다. 결국 도시는 공습과 포격으로 초토화되었고, 전쟁 전 460만 명이던 베를린 시민은 1945년에는 280만 명으로 감소하였다. 소련군은 스탈린그라드 겨울전투에서 독일군을 격파하고, 계속 추격하며 독일 영토로 진입하였고, 베를린은 가장 먼저 점령당하였다. 이태리와 알프스를 지나 독일 남부로 진출한 미군과 프랑스와 벨기에를 거쳐 독일로 진입한 미국·영국·프랑스 연합군은 2개월이 지나서야 베를린에 진입하였다. 보급이 원활하지 못했던 소련군은 연합군이 진군하기 전까지 많은 약탈, 강간 등을 자행하여 베를린 시민들의 분노를 샀다.

2차 대전 승전국들은 포츠담 회담의 결정으로 전쟁 후 동서 양 진영이 독일을 분할 점령하였고, 폴란드에 인접한 독일의 동부 지역에 위치한 수도 베를린은 별도로 다시 동서로 분할하였다. 그러나 소련과 미국·영국·프랑스 3국간의 베를린 점령 정책이 대립하며, 베를린도 결국 동·서로 양분되게 된 것이다. 서베를린은 미국, 프랑스, 영국 3국이 점령하고 있던 지역을 통합하여 형성되었고, 소련군의 점령하던 공산주의 국가 동독 안의 ‘육지의 섬’이라고 불렸다. 당시 동독은 서독의 영토인 서베를린을 인정하지도 않았고, 지도를 발행할 때에도 별도의 표기를 하지 않았다. 소련 관할의 동베를린은 동독 영토와 인접하므로 계속 동독의 수도가 되었지만, 서베를린은 서독 본토와 떨어져있으므로 수도 역할을 할 수 없었기에 독일의 재통일되기 전까지는 본이 행정 수도가 되었다.

베를린은 독일이 다시 통일되기 전까지 소련과 미국 중심의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국가들 사이에서 냉전의 상징이 되었다. 정치가들은 냉전을 상징하는 서베를린을 방문하고, 대중들을 대상으로 연설을 하였다. 쿠바의 미사일 위기로 냉전의 정점에 있었던 1963년 6월 26일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은 서베를린 시청 광장에서 연설 중 “나도 한사람의 베를린 시민입니다. (Ich bin ein Berliner)”이라는 유명한 연설을 하였다. 베를린 장벽이 설치된 후 22개월이 지난 시점이었는데, 그는 독일 국민과 베를린 시민들에 대한 미국의 무한한 지원과 연대감을 표현한 것이다. 지금도 독일 국민들의 미국에 대한 호감은 다른 어떤 나라보다 강하다고 하는데, 이것은 전승국 미국이 패전국 독일에 보여준 대가없는 재건사업 지원과 어려웠던 그들에 대한 인류애에 기인한다고 한다. 한편 1987년 레이건 대통령은 베를린의 브란덴부르크 개선문을 방문하여 “이 장벽을 허무시오.(Tear down this wall.)”라는 연설을 하며 냉전의 종식을 천명하기도 하였다. 

전후 유럽 재건을 위한 미국의 마셜플랜으로 서독은 착실하게 복구가 진행되었으며, 1948년에는 화폐개혁이 단행되었다. 전쟁의 패배로 가치가 떨어진 독일 화폐에 대한 개혁이 필요하였고, 당시 독일 조폐창을 장악한 소련이 3개 연합국의 동의 없이 독일 화폐를 마구 발행하여 마르크화의 가치를 더욱 떨어뜨렸기 때문이었다. 새 화폐가 베를린 지역에서도 통용되자 소련은 동 베를린이 흡수될지 모른다는 위기의식으로, 1948년 6월 24일 전격적으로 연합군과 서독인의 베를린 출입을 봉쇄시켜 서베를린을 서독으로 부터 완전 고립시켰다. ‘베를린 봉쇄(Berlin Blockade)’는 소련과 자유진영 간의 ‘냉전(Cold War) 시대’를 불러오는 첫 역사적인 조치였다.

소련과 연합국 3국간 종전 후 서독과 서베를린 사이의 왕래와 관련한 어떤 협정도 체결된 바 없이, 상호 신뢰와 소련 측의 선의에 의존하며 왕래가 이루어져 왔다. 그러나 소련이 일방적으로 항공로를 제외한 육상 및 수상 통행을 모두 봉쇄하였다. 당시 서베를린에는 36일치의 식량과 45일 동안 사용 가능한 석탄이 남아 있었다. 당시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은 종전 후 대부분 부대가 해체되었고 군인들은 감축하던 중이었다. 서 베를린에는 미국·영국·프랑스의 군인은 전체 2만 명 이하가 주둔하고 있었고, 서독 주둔 미군의 수도 전투요원 3만 명을 포함해 10만 명 이하였다. 반면 서베를린을 포위한 동독 및 동 베를린 주둔 소련군 병력은 150만 명에 달하였다. 미국은 2차 대전 후 전쟁이 발발하면 병력의 희생을 줄이기 위하여 초전에 원자폭탄으로 해결하는 작전을 수립하고 지상군 병력을 삭감한 것이다. 그러나 내부적으로 핵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인력이나 작전은 완비되지 못했다.

소련은 베를린을 외부 세계로부터 봉쇄를 하면서도 항공로를 막지 못하였다. 소련 측과 연합군 측 사이에는 1945년 11월 서독과 베를린 간에 항공 통행을 보장하는 협정이 체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식료품에서 연료까지 대부분을 서독에 의존하던 서베를린 주민들은 졸지에 적진에 고립되어 보급이 끊어지며 절박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연합국은 식량, 연료, 의약품 등을 공중으로 수송하는 ‘베를린 대 공수 작전(The Great Berlin Airlift)’에 돌입하였다. 미국, 영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남아공 조종사들까지 참가하여 군용 수송기와 화물기 380 대를 동원하여, 엄호전투기의 호위 하에 1일 4,700 톤의 식량과 생활용품을 서 베를린의 공항으로 공수하였고, 악천후 시에는 낙하산으로 공중 투하를 하였다. 연합국 측이 대대적인 공수 작전을 감행하자 소련군은 이를 저지하기 위하여 전투기를 투입하여 위협 비행을 하거나 항공기 추락을 시도하는 등 공수 작전을 좌절시키려고 시도하였다. 수송기가 접근하는 항로에 낙하산 투하 훈련을 하여 방해하기도 하였다.

베를린 공수 작전이 막바지에 도달한 1949년 4월에는 공수 작전만으로 봉쇄 전 육상, 수상 수송 물동량보다 더 많은 생필품을 서 베를린에 반입할 수 있게 되었다. 연합군 측은 1949년 4월 16일 하루에만 1,383 편의 항공기를 투입하여 매 1 분 단위로 항공기를 이륙시킴으로써 앞 뒤 두 항공기간에 불과 300m의 간격을 두고 베를린 상공을 수송기로 뒤덮도록 하였다. 이렇게 공중 퍼레이드를 펼침으로써 공중 전력의 위세를 통한 위력 시위로 소련 측을 간접적으로 압박하는 효과를 거둔 것이다.

이를 목도한 소련 측은, 연합군의 물량 공세와 서베를린을 사수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봉쇄로는 굴복시킬 수 없음을 깨닫고 베를린 봉쇄를 풀 용의가 있음을 표명하였다. 결국 점령 4개국 대표 회담의 결과로 312일 만인 5월 12일에 봉쇄 해제가 이루어졌고, 8월 30일 부로 모든 공수작전이 종료되었다. 공수 작전 기간 동안 총 278,228 편의 항공기가 투입되어 2,326,406 톤의 물자를 수송하였으며 수송된 물자의 환산 가액은 당시 가격으로 미화 4백만 달러에 이르렀다. 공수작전에 투입된 항공기 중 25 대가 악천후 등에 의해 추락하였으며 이로 인해 101 명이 희생되었다.

‘베를린 봉쇄’와 ‘베를린 장벽 설치 사건’은 별개의 사안이다. 1961년 베를린 위기는 냉전 중 전후 독일과 베를린의 지위를 놓고 벌인 마지막 대사건이었다. 1950년대 초, 소련의 이주 제한 정책은 여타 대부분의 동구권 국가 내에서도 똑같이 적용되었다. 그러나 해마다 동독 사람 수 십 만 명이 동서 베를린 사이에 있던 조직을 이용해 ‘작은 구멍(loophole)’을 통하여 서독으로 이주하였다. 그리하여 동독의 교육받은 젊은 전문인들이 서독으로 이동하는 대규모 ‘두뇌 유출’이 벌어졌으며 1961년까지 동독 인구의 약 20%가 서독으로 이주하였다.

그해 6월, 소련은 서방 연합군으로 부터 서베를린에서 철수하라는 새로운 최후통첩을 받았다. 요구는 거부되었고, 8월에 동독은 가시철사로 된 벽을 세웠는데, 이것이 베를린 장벽 건설로 확대되어 사실상 ‘작은 구멍’을 막아버렸다. 이것이 베를린 장벽의 설치이다. 베를린 장벽은 1961년에 설치되었다. 베를린 장벽(-障壁, 독일어: Die Berliner Mauer)은 동독이 건설한 것으로서 서베를린을 동베를린과 그 밖의 동독으로부터 분리하는 장벽이다. 그래서 서베를린을 공산주의 국가안의 유일한 자본주의 지역이라고 해서 ‘육지의 섬’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동독의 관리들은 이 장벽을 반파시스트 보호벽(독일어: Antifaschistischer Schutzwall)이라고 불렀다. 냉전의 상징이자 독일의 분단을 상징하였기 때문이다. 동독 탈주자가 많아지자 이를 막으려고 1961년 8월 13일에 만들어진 이후 점차 이 장벽은 보강되었으며, 1989년 11월 9일 자유 왕래가 허용된 이후 차례로 장벽이 붕괴되었다. 일부는 기념으로 남겨져 있다. 1990년 12월 3일에는 서독이 동독을 흡수 통합함으로써 베를린은 냉전과 분단의 시대를 마감하고 하나가 되었다. 1991년 7월 새로 구성된 전독일의회는 베를린을 통일독일의 수도로 의결하였다.

독일 베를린의 자유의 종(The Liberty Bell, Freiheitsglocke)은 1950년 미국 국민이 자유와 유럽의 공산주의들과 투쟁하고 있던 베를린 시민들에게 헌정한 종으로서, 미국 독립의 상징인 필라델피아 ‘자유의 종’에서 영감을 얻어 제작하였다. 지금도 처음 설치된 베를린의 구 시청청사에는 ‘자유의 종’ 소리가 주기적으로 울리고 있다. 청동 몸체에는 횃불을 든 두 손을 마주 잡으며 자유를 갈망하는 세계인들의 모습이 조각되었고, 가장자리에는 ‘That this world under God shall have a new birth of freedom.(신 아래의 이 세상에 자유가 다시 탄생할 것이다.)’ 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무게 10톤의 청동 종은 영국의 길렛&존슨 주물 공장에서 제작되어 먼저 미국으로 운송되었다. 미국에서는 21개의 도시를 돌며 거리행진을 하였는데, 하늘에서 오색 색종이가 뿌려지고 시민들은 자유를 연호 하였다고 한다. 미국 전역 1600만 명의 국민들이 ‘베를린 자유의 종’을 앞세워 세계 자유의 선언 행진을 지원하는 서명을 하였고, 서명자 목록은 종과 함께 뉴욕을 떠나 베를린으로 보내졌다. 서베를린에 도착한 종은 1950년 유엔의 날인 10월 24일에 최종적으로 설치되었다. 종을 헌정하는 기념식에는 위험을 감수하고 소련 지배구역의 경계를 넘었던 동베를린 시민 10만 명을 포함한 40만 명의 시민들이 시청 광장(현재 존 에프 케네디광장)에 모여들었다.

연합군 사령관이던 미국의 클레이장군이 연설을 한 후, 스위치를 누르자 종소리가 울리기 시작하였다. 청동종의 크고 깊은 울림은 동 베를린 전체에서 들을 수 있었고, 그 여운이 동독으로 퍼져 나갔다. 서베를린 시장 에른스트 로이터는 “독일은 노예의 삶을 강요받고 있는 동유럽 국민들 위로 자유의 빛이 내려 쪼일 때까지 종소리를 절대 중지하지 않겠으며, 긴장의 끈을 풀지 않겠다.”고 선언하였다. 지금은 매일 정오와 크리스마스 이브, 그리고 새해 첫날 12시에 베를린의 자유의 종이 울려진다.

처음 ‘자유의 종’이 설치된 이후, 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동독 공산당정부는 종이 설치된 시청광장에서 몇 마일 떨어진 곳에 큰 소음을 발생하여 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을 방해 하였고, 이 종은 ‘자유의 종’이 아니라 ‘전쟁의 종’, ‘기아의 종’, ‘죽음의 종’이라고 자국민들에게 선전하였다. 동독 공산당 중앙위원이었던 한스 젠드레츠키는 “죽음의 종의 손잡이 줄이 그 종을 치는 사람들에게는 교수대의 목줄이 될 것이다“라는 험담을 하였다고 한다.

서독의 괴벨(Goebel)회사는 베를린 자유의 종을 원형으로 높이 9cm 직경 9cm의 도자기 자유의 종을 만들었다. 백색의 종체에 원래의 종과 같은 “That this world under God shall have a new birth of freedom”이라는 글귀가 양각되어 있고, 내면에 코발트색의 괴벨사 마크가 표시되었다. 이 도자기 종은 동서 베를린 간의 군사 정치적 긴장감이 최대에 달하였고 동독이 베를린 장벽을 설치하기 시작하던 1960년에 처음 제작되었고 1972년까지 판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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