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맨십과 게임스맨십

쓰러지면서도

마지막까지 바벨을 놓지 않았던 이배영, 아무는 데 6개월이나 걸릴 부러진 갈비뼈를

부여안고 최선을 다한 왕기춘, 외팔과 외다리로 각각 선전한 폴란드의 나탈리아 파르티카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나탈리 뒤 투아….

이번 베이징올림픽에서도 콧잔등을 시큰하게,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감동의 장면들이

잇따랐다.

우리 국민은 이번 올림픽에서 한층 성숙된 시민의식을 보여줬다. 메달을 못 땄어도

최선을 다한 선수들에게 아낌없이 박수를 보냈고, 멋진 스포츠맨십을 보여준 사람들의

블로그에 ‘선플’을 달았다. 베이징 올림픽을 통해서 스포츠맨십에 눈을 떴다고 하면

너무 앞서간 표현일까?

우리 네티즌들은 특히 남자 유도 60㎏급 결승전에서 승리한 뒤 흐느끼는 최민호를

일으켜 세우고 손을 번쩍 들어준 오스트리아의 얼짱 루트비히 파이셔에게 ‘스포츠맨십의

승자’로 찬사를 보냈다.

스포츠맨십은 올림픽 정신의 고갱이로, 흔히 다섯 가지로 규정된다. 첫째, 연습

때나 경기 때나 최선을 다해야 한다. 둘째, 규칙과 심판의 판정에 따라야 한다. 셋째,

사회적 예의를 지켜야 한다. 서로 악수를 하고 상대편의 뛰어난 점을 인정해야 한다.

넷째, 상대방을 배려해야 한다. 상대방이 필요하다면 자신의 장비를 빌려줘야 하며

상대방의 부상을 이용하지 않아야 한다. 다섯째, 상대방에게 무례를 범해서는 안

된다. 승리자가 패배자를 깔봐서는 안 되고 자신의 승리를 위해서만 경기를 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스포츠맨십에 반대되는 영어 표현이 게임스맨 십(Gamesmanship)이다. 승리지상주의를

가리키는 말이다. 스포츠맨십은 굳이 운동에서 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 통용되는 정신이다.

선진국은 스포츠를 교육의 고갱이에 둔다. 아이들은 스포츠를 통해 사회성, 준법의식,

상대편에 대한 배려를 체득한다.

반면 우리나라 교육에서 스포츠는 여줄가리 중의 여줄가리다. 아이들이 방과 후

운동장에서 뛰어 놀 수도 없다. 초등학생 딸아이에게 친구들과 노는 것도 공부라며

방과 후 학교 운동장에서 놀게 했더니 당장 담임교사가 ‘금지령’을 내렸다. 아내가

교사에게 불려가서 싫은 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건강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Mens

sana in corpore sano)’는 로마 격언이 무색하다. 이렇게 자란 나약한 아이들이 게임스맨십에

물들어 있는 것이 지금 우리 사회의 한쪽 모습 아닌가?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양에서도 예전에는 ‘책상공부’만을 공부로 보지 않았다.

공부의 한자는 ‘工夫 또는 功夫’인데 뜻을 그대로 풀이하면 지아비, 즉 가장(家長)이

되기 위한 노력이다. 여기에는 당연히 문(文)과 무(武)가 다 포함됐다. 공부의 중국어는

쿵푸인데, 우슈(武術)와 동의어로 쓰이는 그 쿵푸다. 중국에서는 책상머리 공부는

학습(學習)이라고 한다. 조상들도 문과 무를 함께 연마했다. 문과에 떨어진 이순신이

무과에 급제할 수 있었던 것도 어릴 때 전쟁놀이를 하는 등 무를 닦았기 때문이다.

스포츠는 남을 배려하지 않고, 서로 뭉치지 못하고, 법을 지키지 않으면서 목소리만

큰 우리의 단점을 메워줄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아이들에게 스포츠정신을 가르치는

것이 영어 단어 외우기 경쟁을 벌이게 하는 것보다 아이들의 성장과 행복에 훨씬

중요하지 않을까?

 

<이 기사는 한국일보 8월21일자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이성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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